조선일보 기자가 쓴 식민지 조선의 삶과 기호, 욕망'배달의 민족' 원조 라이더, 100년 전 경성을 누비다주식, 금광, 모르핀, 특혜 분양… 모던의 빛과 그림자
  • 유난스러운 한국의 배달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영화 '1947 보스톤'을 보면, 전차가 다니는 도심 한복판에서 커다란 나무 배달통을 들고 냉면 배달을 하는 서윤복 선수의 모습이 나온다.

    당시에도 서울에는 평양냉면을 즐겨 먹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성질 급한' 민초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서윤복 같은 배달원까지 등장했던 모양이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1900년대부터 서울에는 온갖 음식점들이 문을 열었는데, 직접 음식점에 가서 먹는 걸 꺼리는 '모던 보이'나 '모던 걸' 때문에 '배달 서비스'가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

    배달원들이 임금 인상 요구하며 파업도

    1920년대는 자전거 음식 배달 전성시대였다. 설렁탕과 냉면, 국밥, 중국 음식이 주요 메뉴였다. 조선일보의 1928년 1월 10일 자 기사를 보면, "하루에도 수백 그릇씩 팔아먹는 설렁탕집에서 설렁탕의 주문을 산같이 받아놓고서도, 거리가 미끄러워서 배달을 해주지 못해 수백원어치의 손해를 봤다"는 내용이 나온다.

    자전거 배달이 많다 보니 교통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했고, 자전거 음식 배달원들이 저임금에 항의해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1929년 4월 2일 자 기사에는 "평양 각 국수집에서 자전거로 국수를 배달하는 면옥 노동자들이 각 국수집 주인에게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교섭이 파열되자 파업을 단행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 시절에도 '배달 라이더'가 있었고,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연대파업을 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100년 전 조선인들이 가졌을 기호와 욕망, 환호와 한숨은 요즘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의 동경과 욕망, 환호와 한숨


    '라이더, 경성을 누비다(도서출판 시공사 刊)'는 식민지 상황에서 '근대'라는 시기를 맞닥뜨린 100년 전 조선의 삶과 욕망, 사회와 문화를 당시의 신문과 잡지 기사로 살펴본 책이다.

    100년 전 언론 매체는 △전차가 분주히 거리를 지나가고 △도쿄와 경성을 잇는 비행기 노선이 생기고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카페와 서점을 순례하는 조선을 묘사한다.

    △이정표 없는 황량한 들판에서 문학과 예술을 일으켜 세우고 △스포츠로 식민지 조선의 자존심을 달래며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상해와 중경, 만주와 미국, 유럽을 돌아다닌 당당했던 조선인들의 모습도 엿보인다.

    이 책은 100년 전 '근대'를 처음 경험한 식민지 조선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는 생활사이자 문화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삶과 욕망의 본질이 똑같다는 점과, 갑작스럽게 근대를 맞닥뜨린 조선인의 일상은 물론,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의 분투도 만나볼 수 있다.

    아파트, 문화주택, 주식, 금광…

    1938년 7월 3일, 한 청년의 음독자살 기사가 실렸다. 검시한 종로경찰서에 따르면 주식에 손을 댄 28세 청년이 2000여원의 손해를 본 것을 비관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한 사건이었다. 1936년 6월 7일 신문에 실린 채만식의 수필에는 금을 얻고자 집 벽까지 헐은 사람 이야기가 소개됐다. 1930년대 내내 세계를 지배한 대공황의 여파는 조선에까지 미쳤다. 화폐 가치가 폭락하는 반면 금값은 폭등했고, 이는 전 조선의 황금광 열풍으로 이어졌다.

    신문과 잡지가 쏟아낸 사람들의 동경과 욕망은 주식과 황금만이 아니었다. '탕남음녀의 마굴'로 손가락질 받은 아파트, 은행 빚을 얻어 장만한 그래서 곧 무너질 모래 위의 성과 같은 것으로 비난받은 문화주택이지만 한편에서는 그곳에 살기를 꿈꾼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피아노, 유성기, 라디오, 35전짜리 화신 백화점 런치 세트 등은 모던의 시기에 만난 선망의 대상이었다.

    단발, 산아제한, 모르핀, 특혜 분양…


    100년 전, 조선이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근대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1922년 청년 문사와 사귀다 결별을 한 강향란이 단발을 하자 그는 유명 인사가 됐다. 1920년대 신문과 잡지는 앞다투어 '단발 찬반 논쟁'을 다뤘다. 단발은 "무분별한 서양 문화 수입"이었고 "허영심의 발로"였으며 "사회적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 '어느새 여학교의 교복과 같이 취급'될 정도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식민지 조선의 인구가 약 2000만명이던 시절, 경성에서는 '산아제한'을 둘러싼 토론회가 수시로 열렸고 신문은 이를 소개했다. 1920~1930년대 세계적인 이슈였던 맬서스주의와 우생학, 여성 권익 향상에 대한 관심 등은 조선을 비켜가지 않았다. 여성 단발과 산아제한 논쟁은 불과 그때보다 10여 년 전인 191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인의 관념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1927년 봄, 경성 한복판 서소문의 '자신귀굴'을 르포한 기사가 실렸다. 아편도 문제였지만 아편을 정제한 '모루히네(모르핀)' 중독자를 일컫는 '자신귀'가 골칫거리였다. 아편보다 싸고 사용이 용이하며 당국의 규제까지 느슨한 모루히네의 당연한 확산이었다.

    1929년 일본인 시마 도쿠조에게 경성 신당리 토지를 특혜 분양한 사건은 경성부윤이 나서서 사과했을 정도로 이슈가 됐다. 식민지라는 엄혹한 시절이었음에도 권력형 특혜 분양 의혹을 쏟아낸 신문은 경성부를 조롱하는 기사까지 실었다. 조선인 빈민들은 토막에서 굶주리는데, 조선의 공적 자금을 마음대로 쓰는 일본인과 그를 비호한 권력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것이다. 100년 전 조선이 만난 모던의 그림자들이다.

    조선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그들


    100년 전은 '닫힌 제국'에서 '열린 세계'로 봇물처럼 쏟아져 나간 '출국열'의 시대이기도 했다. 1928년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학생이 드문 스웨덴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최영숙을 소개한 신문은 "그가 고국에 돌아오는 날은 반드시 한줄기 희망의 불이 비칠 것"이라는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1909년 여권도 없이 미국으로 건너간 김동성은 "구두닦이에게도 상류층 사람이나 백만장자만큼의 자유가 있다"는 미국 관찰기를 출간했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미국과 유럽은 물론 남미까지 공연을 다닌 무용가 최승희의 동정은 수시로 신문과 잡지에 소개됐다.

    남편과 함께 1년 반이라는 긴 시간 세계 일주 여행에 나선 나혜석, 중국으로 건너가 비행술을 배워 독립운동에 뛰어든 최초 여성 비행사 권기옥, 서른을 목전에 둔 나이로 제국대학의 조선 첫 여성 유학생이 된 신의경 등 기존의 관념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여성의 모습이 등장한 것도 모두 이맘때였다. 조선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 그들의 이야기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여러 미덕 중 하나다.

    ◆ 저자 소개

    김기철 =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입사한 조선일보에서 사료연구실장 겸 문화부 학술전문기자로 있다. 100년 전 신문과 잡지를 밑천 삼아 조선닷컴에 '모던 경성'을 연재하고 있다. 소파 방정환처럼 빙수를 즐기는 '빙수당(黨)'이고, 가산 이효석처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