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장군은 남고, 레닌 부하 홍범도는 꺼져라홍범도, '자유시참변' 주모자… 오히려 독립군 배신했어
  • ▲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등 독립운동가 5인 흉상. ⓒ연합뉴스
    ▲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등 독립운동가 5인 흉상. ⓒ연합뉴스
    요즘은 철근 없이 지어진 아파트 앞에 순살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공산주의를 사모하는 대통령 재임 5년 동안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뼈대 없는 순살 대한민국이 됐다. 국정원 원훈석(院訓石)에 간첩의 서체가 새겨졌고, 공산당원이 국군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대한민국의 흔들리는 정체성을 바로잡기 위해 윤석열정부의 군이 나섰다. 국방부는 최근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홍범도의 동상을 독립기념관 등 다른 적합한 곳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흉상 이전을 둘러싸고 홍범도의 공산당 가입과 활동 이력이 드러나며 자격 시비가 벌어졌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방부의 흉상 이전 논의에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독립운동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우는 반역사·반민족적 폭거"라며 반발했다. 좌파들이 발끈하고 이종찬 광복회장이 국방부 장관 물러나라고 소리쳤다. 홍범도의 행적에 관해 구체적인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일부 우파들도 동조하고 나섰다. 홍범도 덕분에 좌파들과 어정쩡 우파들까지 역사전쟁에 들어온 꼴이다. 잘됐다. 이제라도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자. 

    반역사, 반민족이라는 말을 들어야 할 진짜 당사자는 누구인가? 

    홍범도는 청산리·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영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반 쪽 평가일 뿐이다. 그는 끝까지 독립영웅으로 살지 못했다. 오히려 독립군을 배신한 혐의로 한인 무장부대 대원에게 처단당할 뻔하기도 했다. 홍범도가 항일 독립군을 궤멸시킨 소위 '자유시참변'의 주모자, 혹은 적어도 적극적 공모자였기 때문이다.           

    한인 독립군들은 청산리·봉오동전투 이후 주요 활동무대였던 간도지역을 떠나야 했다. 일본이 독립군 토벌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독립군들은 활동 근거지를 러시아령인 연해주 쪽으로 옮겼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당시 레닌 정부는 공산주의 운동에 포섭할 민족을 물색했다. 한국 독립군은 레닌의 적당한 먹잇감이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한인 공산주의자 이동휘를 이용해 독립군을 러시아령으로 끌어들였다. 소비에트가 한인 독립군을 강한 통합 군대로 만들어주겠다는 달콤한 말에 속아, 자금이 필요했던 독립군들이 속속 연해주로 모여들었다. 소비에트는 이동휘를 이용해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 중인 한인 무장부대를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편입하고자 했다. 2000~3000명으로 추정되는 한인 무장부대가 모인 곳이 바로 자유시라 불리는 스보보드니였다. 스보보드니에서 독립군의 꿈은 산산조각났다. 

    스보보드니에 집결한 독립군들은  1921년 6월28일, 소비에트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는다. 빨치산 군대에서 명성을 날리던 갈란다시빌리 사령관의 기마부대와 장갑차부대가 투입됐다. 한인 독립군들은 총에 맞아 죽고, 더러는 제야(Zeya)강 쪽으로 도망가다 익사해 죽었다. 피의 살육이었다. 

    소비에트 정부가 일본의 사주를 받고 한국 독립군을 공격했다는 주장도 있다. 러시아 적백 내전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을 지원한 일본이 시베리아에서 철군하는 조건으로 소비에트 공산당에 독립군 처리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퍼즐을 맞춰보면 한인 무장부대는 소비에트 공산당에 속고, 일본의 흉계에 속아 궤멸되었다.  

    이날 홍범도 장군은 무얼 했을까? 명확한 기록이 없다 보니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홍범도 장군도 소비에트 정부에 속은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렇다고 정말 홍범도는 독립군 궤멸에 어떤 책임도 없을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홍범도의 다음 행적이 심상치 않다.

    홍범도는 자유시참변으로 붙잡힌 독립군을 처리하는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위원으로 활약했다. 홍범도는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켰고, 그 자신은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됐다는 것이 훗날 학계의 연구로 드러났다. 순진했던 홍범도로 치부하기에 그의 행적은 소비에트와 지나치게 긴밀했다. 

    홍범도는 1923년 8월 암살 위기를 겪는다. 자유시참변 이후 한인 무장부대(사할린부대) 출신 김창수와 김오남은 배신자 홍범도를 처단하겠다고 달려들었다. 이때 홍범도는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곧 레닌으로부터 증명서를 얻어 석방된다. 

    홍범도는 소비에트 적군의 최고 실력자로부터 하사품과 면죄부를 얻은 인물이었다. 레닌에게 권총을 하사품으로 받은 공산당 영웅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홍범도는 1927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결정 때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다. 스탈린의 취업명령서를 받아 든 홍범도는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극장 수위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1921년 독립군 궤멸의 진실을 쉬쉬 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의도는 무엇인가? 한때 존경했던, 그리고 여전히 애틋한 항일 장군 김일성에 대한 의리이거나, 반일 클릭으로 국민의 마음 한번 얻어보겠다는 표(?)퓰리즘의 욕망이거나!

    역사의 진실 앞에서 홍범도는 민족의 영웅인가? 죄인인가? 민주당이 말하는 반역사, 반민족의 진짜 죄인은 누구인가? 자유민주주주의 뼈대를 잃고 친북 순살만 남은 문재인정권 5년, 잘됐다. 홍범도 논쟁을 계기로 리빌딩(rebuilding)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