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6년경 30대중반 김일성과 40대중반 박헌영(오른쪽).
    ▲ 1946년경 30대중반 김일성과 40대중반 박헌영(오른쪽).
    박헌영, 김일성 만나러 7차례 밀입북

    1946년 6월 어느 날, 스탈린이 명령한다. “김일성과 박헌영을 크렘린으로 데려오라”
    그동안 폴란드, 동독, 항가리 등의 대규모 숙청과 공산화에 몰두했던 스탈린은 KGB(국가공안위원회)의 극동 보고를 받자 한반도에 눈을 돌린 것이다. KGB의 보고는 바로 박헌영의 ‘투서’ 내용이었다. 
    박헌영은 미소공위가 무기휴회 되자 스탈린에게 직접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러시아어로 써서 김일성 몰래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KGB극동지부에 보냈다. 그는 김일성이 국내공산주의자들을 무시하고 빨치산 출신들만 앞세우는 독재가 심하며 남한실정에 맞지 않는 정책을 일방적으로 남발하고 자신을 따르는 당간부들을 배제하는 등 분열을 획책한다며 집중 비난하였다. 평양의 소련군사령부에 대해서도 “조선공산당 책임자 박헌영을 따돌리고 김일성만 옹호하니 당의 권위가 추락하여 공산혁명 사업에 차질이 심하다”고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스탈린이 보기에 이는 박헌영이 자신의 지도력을 정면비판한 것이다. 슈티코프에게 맡긴 미소공위도 1차 실패한데다 남북한 공산당이 패싸움 하는 꼴이니, 이참에 획기적인 ‘한반도 혁명 계획’을 부과할 때가 왔음을 직감한 스탈린이 직접 나선 것이었다.

    박헌영, 네번째 밀입북서 모스크바로=박헌영은 해방후 김일성을 만나러 7차례나 밀입북하였다.  그는 6월 27일경 측근 세 사람을 데리고 극비리에 서울을 떠나 평양을 향했다. 작년 10월 개성 북쪽에서 김일성과 밀담한 이래 네 번째 밀입북이다. 개성 루트를 이용하기로 결정한 소련군정은 김일성의 전용 승용차를 내주었고 대남연락 실무자들은 군용 찦을 타고 38선까지 달려와 박헌영을 맞았다. 이번엔 모스크바 스탈린을 만나러 가기위한 월북이므로 북한 지도자들도 모르게 비밀을 지켰다고 한다. (박병엽, 앞의 책).
    평양에 도착한 박헌영은 29일 북조선공산당 지도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남한정세를 설명하는 가운데 집중논의된 것은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다. 
  • ▲ 조선공산당의 대규모 지폐위조사건, 1945년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거액을 찍어낸 정판사 위폐사건을 보도한 신문지면(자료사진).
    ▲ 조선공산당의 대규모 지폐위조사건, 1945년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거액을 찍어낸 정판사 위폐사건을 보도한 신문지면(자료사진).
    ▶조선공산당 위폐사건◀ “김구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해방 두 달후 조선공산당이 저지른 거액의 지폐 위조 사건, 1945년 10월 20일부터 이듬해까지 6회에 걸쳐 ‘조선 정판사’ 사장 박낙종(朴洛鍾) 등 공산당원 7명이 약 1,200만원(당시화폐)의 위조지폐를 찍어 공산당에 제공하였다. 박헌영의 공산당은 일본총독부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近澤)빌딩(옛 미도파백화점 옆, 현 롯데백화점 남측)을 접수하여 조선정판사로 개칭하고, 위조지폐 인쇄 장소로 사용하였다. 활동자금 조달방책을 모색하던 공산당은 그 건물에 지폐원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장실에서 사장 박낙종, 서무과장 송언필(宋彦弼), 재무과장 박정상(朴鼎相), 기술과장 김창선, 평판기술공 정명환(鄭明煥), 창고계주임 박창근(朴昌根) 등이 비밀리에 모여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李觀述)과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權五稷)의 지령을 받아 거액을 위조하게 하여 당자금으로 활용하였다고 수사당국이 발표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 사건과 얽힌 ‘뚝섬 위폐사건’ 수사가 진행되던 중, 뜻 밖에 김구의 이름이 등장하고 큰 며느리 안미생(安美生) 등이 거론되면서 파문이 커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미군정 경찰의 수사결과에는 ‘정판사 위폐사건’만 발표되었기 때문에 또 한 차례 ‘모종의 은폐 의혹’이 일었다는 이야기이다. (김상구 [김구 청문회] 2014). 
    이때 조선공산당은 위폐사건 자체가 경찰의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 역선전을 폈다. 구속된 범인 14명도 공산당원이 아니라 우기며 재판을 폭력으로 방해하였지만 허사로 돌아간다.
    앞서 말했듯이 평양에 간 박헌영도 북조선 간부회의에서 증거물 처리 소홀 등에 대하여 추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설에는 거액을 확보한 박헌영이 은밀한 축하자리를 마련하고 “권력은 돈에서 나온다”며 북조선공산당까지 장악할 수 있다는 듯 ‘객기를 부렸다’는 말도 있다.
    미군정은 1946년 5월16일 공산당 지관지 [해방일보]를 폐간시켰고, 11월 28일 공판에서 이관술-박낙종-송언필-김창선 등 무기징역, 기타 징역 15~10년을 선고하였다. 이 경제교란 위폐사건을 계기로, 공산당을 합법대우 하던 미군정이 강력 대응함으로써 좌익세력은 지하로 잠입하는 시대로 변한다.    
  • ▲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이 스탈린이 베푼 만찬에서 젓가락질하는 모습.(북한이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조작했다는 사진)
    ▲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이 스탈린이 베푼 만찬에서 젓가락질하는 모습.(북한이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조작했다는 사진)
    ◆스탈린, “평양에 군사고문관들을 파견하라...기술원조”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의 부름에 평양을 출발한 날은 6월30일쯤이다. 하바로프스크의 소련 극동군 연재구군관구 사령관 메레치코프 원수가 특별기로 평양에 착륙, 김일성과 박헌영, 소련군정사령관 로마넨코 등을 태웠다. 박헌영 등 남한공산당 점담 샤브신(Anatolli I. Shabsin, 서울주재 소련부영사)도 박헌영의 통역 겸 동행한다. 샤브신은 해방 전야부터 박헌영을 매일 만나 지휘하고 복종하는 ‘바늘과 실’ 관계이다. 

    여기서 눈길은 끄는 점은 평양의 소련군정사령부 정치위원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가 김일성에게 스탈린과의 문답에 대비하여 빈틈없이 준비시켰는데, 특히 ‘북한의 무장’(武裝)문제에 관한 스탈린의 발언과 지시사항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충고했다는 사실이다. (레베데프 증언 [비록: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앞의 책)
    스탈린과 평양의 소련군정은 이때 이미 ‘북한의 남침계획’을 준비했다는 이야기이다. 신탁통치안을 지렛대 삼은 스탈린의 한반도 공산화 시나리오는 이제 미국과 화전(和戰) 양면작전 단계로 돌입한 것이다. 

    ★“남북 정당 단일화” 스탈린 지시...레베데프 “김일성은 아첨꾼”
    스탈린은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남북한의 정세부터 설명을 요구했다.
    김일성이 스탈린을 직접 만나는 것은 지난해 8월 소련군빨치산 장교로 ‘면접’한 이래 두 번째, 보잘 것 없는 자신을 ‘김일성’으로 만들어 북조선 단독정권 두목으로 세워준 ‘은인’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할 지경이다. 더구나 슈티코프와 로마넨코 등 ‘직속상관’ 소련 군부 장성들이 합석한 자리, 무슨 명령이 떨어질지 긴장한 것은 김일성만도 아니다. 김일성에 도전한 박헌영도 스탈린의 입술을 주시한다. 김일성에게 질문을 던진 스탈린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북조선 풋내기 ‘꼭두각시’의 달라진 모습이 대견했을지도 모른다. 
    달달 외우듯이 대답하는 김일성의 설명을 들은 스탈린은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김일성에게 북한 정당들을 합쳐 “단일당으로 통합, 일당독재체제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김일성의 대답은 대체로 충실했던 것 같다. 스탈린의 통역관 말로는 “김일성이 아첨하는 어조를 쉬지 않았고 스탈린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는 잔뜩 긴장해 있었고, 자기 주인의 명령을 언제라도 따르겠다는 충신의 자세인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스탈린은 김일성이 마음에 들었다. 김일성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린 지도자’는 스탈린의 손으로 차지한 ‘영웅’의 자리가 ‘큰 지도자’의 손짓 한번으로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분명히 이해하였다...」 (레베데프 증언, 앞의 책)
    스탈린은 박헌영에게 말했다. “힘든 여건에서 분투하는 당신의 혁명투쟁을 높이 평가한다. 남한의 좌익정당들도 통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때의 모임을 두고 그동안 일부 학자들은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테스트하는 자리’였다는 해석을 붙여 왔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그보다는 미소공위 결렬 등 달라진 국면에서 이에 대비하여 만들어놓은 스탈린의 새로운 전략 ‘큰 목적’이 따로 있었다. 그것은 ‘오래된 구상’ 북한의 군사력을 동원한 한반도 장악이다.

    스탈린은 김일성-박헌영과의 대화 끝에 측근들에게 지시한다.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의 정치적 준비태세를 전면 강화할 것.
    ▶김일성의 단독정권을 위하여 평양으로 경험 많은 군사고문관들을 파견할 것.
    ▶북한의 군사적 원조와 기술 원조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조속히 마련할 것.
    지시를 받은 소련군 총참모부는 물론, 소련 정치 지도부는 “극동의 위성국 북한이 강력하고 현대적인 군대를 가져야 할 때가 왔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레베데프, 앞의 책)

    그날 저녁 스탈린은 모스크바 근교의 별장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을 위한 만찬을 베풀었다. 박헌영을 격려한 스탈린은 슈티코프 등 간부들에게 박헌영에게 며칠 동안 모스크바 관광을 시키고 산업시설을 견학시키라고 말했다. 자신에게 ‘투서’를 올린 박헌영의 심정을 모를 리 없는 스탈린은 김일성과 달리 공산주의에 해박한 이론가를 북한의 프롤레타리아혁명 경제통으로 이용하라는 지시였다. 

    스탈린의 한마디로 박헌영은 좌절한다. 행여나 기대했던 김일성에 대한 ‘과감한 도전‘은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어쩔 것인가. 김일성을 뛰어넘을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
    소련은 박헌영에게 10여년 전 헤어진 외동딸 비비안나를 만나게 해주었다. 첫 부인 주세죽과 낳은 딸은 어느새 18세, 상하이에서 주세죽이 박헌영을 버리고 남편 친구 김단야(金丹冶)와 눈이 맞아 도망칠 때 모스크바로 데려왔다. 그후 김단야가 ’일본 간첩‘ 혐의로 사형되고 주세죽은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유배되었으므로 보육원에서 자란 비비안나는 소련 민속무용단에서 발레리나가 되어 있었다.
  • ▲ 레닌이 1919년 창설한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로고(왼쪽).  1946년 스탈린이 만든 코민포름의 로고(오른쪽).
    ▲ 레닌이 1919년 창설한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로고(왼쪽). 1946년 스탈린이 만든 코민포름의 로고(오른쪽).
    ◆스탈린,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로...공산당을 ‘노동당’ 개칭

    레닌의 코민테른이 1928년 스탈린주의로 변질되면서 스탈린의 대숙청 등 공포정치에 대한 국제적 반감이 팽배, 1943년 자멸하다시피 해체된 국제공산당의 힘은 종전후 새롭게 소환된다. 동유럽 등 점령지역을 공산화 하는데 스탈린은 소련의 중앙집권적 파워가 절실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그동안 반발이 컸던 계급투쟁성을 희석하고 대중성을 위장 강화하기 위하여 ◉당 명칭에서 ‘공산’을 빼고 ‘노동’을 넣어라. ◉정강 등에서 ‘공산주의 대신 민주주의’를 표방하라는 새로운 원칙을 세워 밀어붙인다. 이에 따라 폴란드에는 공산당과 사회당을 합쳐 통일노동자당을 창립하였고, 헝가리는 사회노동당으로 단일화, 동독에서도 사회통일당으로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한다. 스탈린이 김일성-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명령한 ‘합당’도 이처럼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대중을 포섭하려는 총체적 사기극으로서 ‘북조선로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을 만들게 하여 통합시킨 ‘조선로동당’ 탄생, 스탈린의 작품이다. 
    이 ‘대중화 위장전략’ 원칙은 이듬해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이 나오자 스탈린은 ‘코민포름’(Cominform: Information Bureau of the Communist and Workers' Parties)으로 대응한다. ‘반공’으로 돌아선 미국의 자유블럭 형성에 소련이 9개 위성국을 묶어 10월5일 폴란드에서 국제공산조직을 부활시켰다. 마침내 자유세계 블록과 공산세계 블록이 정면충돌하는 냉전시대의 현실화이다. 그 3년 뒤 38선에서 6.25침략전쟁으로 ‘영토야욕’을 폭발시킨  최악의 군사독재자가 스탈린이다. 

    북한의 무력 현대화를 서두른 것은 미국과의 협상 끝이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미국의 정책 비밀을 빼내는 KGB 보고에 따라 미군철수가 머지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죽은 루즈벨트도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없다”고 확답을 해준 바 있으며, 트루먼 정부의 ‘한국화 정책’도 ‘명예로운 미군 철수’를 위한 고육지책임을 재빨리 확인을 거듭하였다. 
    미소공위 협상은 미국이 지치면 끝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을 지치게 하자. 주인 없는 남한은 무주공산(無主空山), 천적 일본이 손대기 전에 선점해야하는 방법은 무력 밖에 없지 않은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신전술’을 지령한 그날부터 소련의 군사전문가들이 평양을 향해 떠날 준비에 바빠졌다.
  • ▲ 조선공산당 박헌영과 조선인민당의 여운형(오른쪽).
    ▲ 조선공산당 박헌영과 조선인민당의 여운형(오른쪽).
    박헌영 “소련은 늦어도 3년내 남한을 점령한다”

    모스크바에서 평양을 거쳐 7월22일밤 서울에 온 박헌영은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간부들을 소집, 중대발언을 터트린다. 이번 방북에서 얻은 극비정보라며 “소련은 늦어도 3년 이내에 남한을 점령할 계획임을 알았다”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그 점령은 협상을 통해 실현할 것이지만 “어떤 방법으로든지 꼭 이뤄질 것“이라 장담하였다.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G-2 문서). 물론 이것은 스탈린과의 면담에서 파악한 정보였는데 모스크바 여행 자체가 극비였던지라 그것까지는 입을 다물었다. 
    1946년에서 3년 이내라면 늦어도 1949년, 바로 미군이 남한을 완전 철수하던 해, 스탈린의 정보력이 놀랍기만 하다. 

    ★”밀린 활동자금 빨리 보내라“ 소련군정에 재촉한 박헌영
    박헌영은 공산당을 약화시키려는 미군정의 좌우합작에 반대투쟁을 시작한다. 스탈린의 ’3당합당‘을 기화로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내부에 프락치를 심어 여운형 없는 인민당을 먹으려한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을 이용해 미군과 짜고 자신을 제거하려한다는 정보도 알고 있었다.
    박헌영은 여운형을 경멸한다. 소신 없는 ’좌익 멋 부리기‘ 부르주아 기회주의자라 여긴다.
    여운형은 박헌영을 몹시 싫어한다. 공산당 프락치로 자신의 인민당을 파괴하고 ’합작5원칙‘을 내세워 좌우합작를 폭력으로 뒤엎으려 기도하기 때문이다. 좌우합작은 여운형이 살아남을 유일한 출구였다. (박병엽, 앞의 책).
    이리하여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지 한 달이 넘어도 박헌영의 합당 교섭은 갈수록 갈등만 깊어진다. 남한의 ‘좌익 3당합당’은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합당이다. 박헌영은 8월20일 평양의 소련군정 레베데프, 로마넨코에게 도움을 청한다. 세가지 요구 사항은 ◉남조선신민당에게 반공세력과 손을 끊고 합당하라고 압력을 가해 줄 것, ◉북조선공산당 명의로 남조선공산당을 반대하는 좌익들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줄 것, ◉끝으로 ‘남은 것들’을 속히 보내 줄 것 등이다. 여기서 ‘남은 것들’이란 소련군정이 박헌영에게 보내주는 활동자금을 가리킨다. 해방 후부터 소련군정이 남한 공산당을 정기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 ★‘북로당’ ‘남로당’ 탄생...박헌영은 ‘신전술’ 감행
    북한에선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열흘 만에 북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민주당, 천도교청우당 등 4개정당과 북조선직업동맹, 북조선농민동맹 등 15개 단체를 묶어 7월22일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는 속전속결을 자랑한다. 누구에게? 스탈린에게!
    종주국 제왕 앞에서 장담한 대로, 절대강자 슈티코프와 레베데프의 지휘감독에 따라서 김일성은 특유의 아첨과 만용을 무기로 임무를 완수한다. 마침내 8월28일부터 사흘 동안 ‘북조선로동당’ 창립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레베데프는 박헌영의 도움 요청에 답하듯 ‘창립대회 결정서’를 채택 공표한다. ”남조선공산당은 종파분자 분열분자들에 대하여 ‘결정적 대책’을 실시하여 합당하라“
    박헌영은 1주일 뒤 9월4일 3당합동준비위원 연석회의를 열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3당합당-남조선로동당 창당’이란 ‘결정서’를 가결한다. 박헌영의 1인 쿠데타—‘남로당’의 등장이다. ([조선로동당대회 자료집-1])

    동시에 박헌영은 ‘신전술’의 칼을 뽑았다. 이것은 그동안 벌여온 ‘합법투쟁’에 ‘비합법투쟁’을 적극 동원하는 공산혁명전술의 전환인데, ‘정당방위를 위한 정면대결’이란 구실을 내 세운 폭력투쟁이다. 스탈린 면담후 귀환길 평양에서 김일성 등 북조선 간부들과의 회의에서 대강을 합의했던 것이다. 김일성은 미군정의 탄압이 가중된다며 신중론을 폈지만, 김일성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박헌영에게는 남한의 주도권까지 내놓을 수 없는 카드였다. 
    ”탄압이 가중될수록 정당방위를 위해 군중투쟁의 힘을 동원, 제압해야 한다. 좌우합작 음모도 포기시킬 수 있고 인민공화국도 인정받을 자신이 있다“며 박헌영은 ‘반합법-비합법 투쟁’을 철저히 배합시켜야 승리한다며 극좌 폭력투쟁에 들어갔다. 
    ‘북한의 총독’ 격인 공산화 총지휘자 슈티코프는 ‘양손의 무기’ 김일성과 박헌영을 가지고 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레베데프, 앞의 책)

    ★‘남로당 폭동시대’ 개막...미군정, 그제야 박헌영 체포령
    미군정은 결국 공산당에 강경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자유 운운하며 방치해왔던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3개 좌익신문을 폐간시키고, 9월7일에는 마침내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등에 체포령을 내렸다. 박헌영은 도피하고 다음 날 이주하만 검거된다. ([조선일보] 1946년9월7일자, [동아일보] 1946년 9월10일자)
    지하로 숨은 박헌영은 서울자동차파업 투쟁에 이어 전국적인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을 일으킨다. 극좌적 남한파괴 무법투쟁, 살인, 방화, 무차별 폭력사태가 ‘남로당의 테러시대’ 막을 열었다. 
    꿈꾸는 미국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