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서 독립운동 당시 이승만 박사와 미국무부 소련 간첩 앨저 히스(오른쪽).
    ▲ 워싱턴서 독립운동 당시 이승만 박사와 미국무부 소련 간첩 앨저 히스(오른쪽).
    ★미국무부, 소련의 요구에 순응하는 ‘대한정책’ 지시

    “이승만을 은퇴시켜라”
    이것은 이승만의 정읍선언 3일후 6월6일, 미국무부가 일본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내린 훈령이다. 이날 미국무부가 확정한 [대한정책](Policy for Korea)은 해방후 1년간 세 번째로 만든 한국정책으로서 미국이 한국문제에 얼마나 소극적인지를 말해준다. 
    미국 스스로도 “소련이 미국의 한국문제 무관심을 지적하며 하지 한사람에게 내맡긴 상태로 여긴다”라고 인정하며 미소공위 무기휴회 한 달 만에 ‘새로운 대책’이랍시고 내놓은 것이었다.
    [대한정책]의 핵심은 ‘한국화’(Koreanization)였다. 미군정의 각 분야에 한국인들을 많이 참여시켜야 하고 소속정당 문제로 차별을 두어선 안 된다고 했다. 즉, 좌우를 막론하고 등용하라는 말이다. 
    ‘한국화’란 한마디로 풀면 “한국문제는 한국인의 손에 맡기라”는 정책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바로 1975년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의 방위는 베트남인들에게 맡긴다”던 ‘닉슨독트린’이 그것이다. 수렁에 빠진 월남전에서 ‘명예롭게 철수’하려는 미국의 궁여지책, 그 ‘월남화’ 30년 전에 19045년 분단된 한국을 떠나려는 미국의 ‘한국화’이다.

    [대한정책]은 한국화를 위해 ‘좌우 차별없이 광범한 등용’을 지시하면서도 장황한 단서를 붙였다.
     “미군사령관은 일본의 항복이후에 귀국한 한국지도자들의 자발적인 정계은퇴를 어떤 방법으로든 반대하지 말아야한다.” 
    곧 이승만, 김구 등 ‘반탁’ 세력을 자발적 형식으로 은퇴시켜 미소공위 협상에서 배제시키라는 미국 정부차원의 노골적인 명령이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한국의 정치적 논쟁에서 태풍의 눈이 되어 온 몇몇 인사들이 일시적으로 정치무대에서 은퇴한다면, 미국과 소련 사이의 합의뿐만 아니라 남한의 여러 파벌들 사이의 합의도 크게 충족될 수 있다. 표현의 자유 원칙을 주장하는 미국의 의견과, 공공연히 반소적인 특정 한국 지도자들을 임시정부에 참여시킬 수 없다는 소련의 결정 사이에 충돌을 일으켜 협상이 결렬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해석의 근거가 이것이다. 이들 지도자들은 일본의 항복이후 귀국한 원로 망명인 그룹이다. 그들이 한국의 여론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한국의 민주주의 건설이나 미국의 목표달성에 필수적이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 반대로 그들이 정치무대에 존재함으로써 소련과 합의하는데 어려움을 증폭시킬 뿐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한국정치 참여는 미국에 도움보다는 대체로 방해가 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면서 [대한정책]은 ”되도록 일본지배기간에 한국 안에 있던 지도자들이 참여하도록 고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미국무부 문서, FRUS 1946, vol.Ⅷ], 손세일, 앞의 책)

    요컨대, 소련과 조속한 합의를 원하는 미국 정부는 소련이 거부하는 기피인물들 ‘반탁-반소’ 세력의 은퇴공작을 펴라고 공식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이승만과 김구를 비롯한 임정의 우익 인사들이다. 
    특히 해방 전부터 미국무부의 거물 소련간첩 알저 히스(Alger Hiss)와 충돌했던 이승만을 ’반소주의자‘로 낙인찍은 미국무부가 이승만의 귀국도 막았고, 소련도 그때부터 극히 싫어하는 인물이 이승만이다. ”누구보다도 이승만을 반드시 은퇴시켜라“ 하지 사령관에게 떨어진 새로운 숙제다.
  • 이승만과 하지.
    ▲ 이승만과 하지.
    ★하지, 이승만의 자문교수 올리버를 데려오다
    미국무장관 번스가 진작부터 하지사령관의 반공적 언동이 못마땅하여 소련과의 협력에 악영향을 준다며 경고성 편지를 보낸 것은 앞에서 보았다. 한국 현지사령관 하지는 ’현장을 모르는 본국지시‘를 비난하면서 한국 실정에 맞는 대응책을 여러 가지로 이승만의 자문에 따라 진행해 왔다. 민주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러면서도 이승만의 격렬한 ’반소-반공‘ 주장이 걱정스러운 하지는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는 미국 시라큐스 대학 교수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1909~2000)를 서울로 불렀다. 
    올리버는 이승만이 정읍서 연설하던 6월3일 김포에 도착했다. 이튿날 하지 사령관과 러치 군정장관이 불러 찾아갔다.

    ”우리가 당신을 오라고 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오. 당신이 부디 이승만 박사를 자제하도록 노력해주기 바랍니다. 당신이 그렇게 안하면 그의 생애는 끝날 것이고, 우리가 소련과 합의할 수 있는 기회도 이미 망쳐버린 상태란 말이오. 내가 보기에 이 박사는 한국 정치가들 중에 거의 유일하다고 할 만큼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지 않는 한, 그는 새로운 한국정부에서 어떤 자리도 맡지 못할 것이오.“
    하지는 쌓여있던 사연이 터진 듯, 긴 시간 말을 멈추지 않았다고 올리버는 썼다.
    ”개인 적으로 이야기 할 때는 아주 쾌활하고 훌륭한 인물이지만 집회에 나가면 한 없이 난폭해져서 소련과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매도하여 우리를 몹시 난처하게 한다오. 그가 계속 이런다면 미군정으로서는 이박사의 유용성이 끝날 것이며, 그를 내가 공개적으로 비난하여 파멸시켜야 할지도 모르겠소.“ 하지 장군은 착잡한 듯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긴 대화가 끝나고 나서 올리버는 그날 [나의 노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이 소련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밖에는 대책이 없다고 생각한다. 당장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 하는 것이라 한다. 지금 소련의 야심을 관대하게 넘기는 것은 과거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 그랬던 것과 꼭 같이 소련의 공격력을 길러주는 일이 된다고 역설한다. 그의 견해가 옳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있는 많은 미국인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지 장군과 러치 장군은 소련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대책을 강구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은 이승만 박사를 ‘목안의 가시’처럼 여기게 되었구나.」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출판사, 2013.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Panmun Book Company LTD. 1978)
  • 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열린 덕수궁 석조전, 좌우합작위원회 사무실도 여기 있었다.(사진 1910년 한일병탄 무렵 모습)
    ▲ 미국-소련 공동위원회가 열린 덕수궁 석조전, 좌우합작위원회 사무실도 여기 있었다.(사진 1910년 한일병탄 무렵 모습)
    ◆ 36세 중위 버치.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 책임 맡다

    미군정에서 ‘좌우 합작’이란 막중한 정치적 임무를 부여받은 인물은 새파란 36세 장교 버치(Leonard M. Bertsch,1910년생) 중위였다. 하버드 대학을 나와 변호사 경험밖에 없는 젊은 군인이 난마(亂馬)의 한국정치세력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얼마나 힘을 발휘할 것인가.
    미고공위 소련 대표단이 서울 회담에 처음 참석했을 때 미국 대표단을 보자 ”장군은 두 명 뿐이고 모두 애송이들이니 우리가 이겼다“며 속으로 웃었다고 전해진다. ([박병엽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앞의 책]. 
    그러나 버치는 금방 한국정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미국정부가 이승만 등 ‘반탁’ 지도자들을 제쳐놓고 ‘좌우합작’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버치의 집이 새로운 정치무대로 변했다.

    ◉좌우합작의 첫 예비접촉은 5월25일 신당동 버치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 한국민주당 총무 원세훈,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여운형, 조선인민당의 황진남(黃鎭南), 우익 2명, 좌익 2명이다. 이날부터 모든 모임은 버치가 주재하였다.
    ◉6월14일 2차 모임, 한민당 원세훈이 18일 ‘기본원칙’으로 ”부르주아민주공화국 건설에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발표하자 거센 반론이 일었다. 지난해 스탈린이 북한에 지령한 ‘부르주아민주국’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이강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기본원칙이 돼야한다“고 주장했다.
    ◉6월20일 박헌영이 ‘합작3원칙’ 제시, 3상결정지지 원칙이면 참여 용의 발표.
    ◉6월22일 버치의 집에서 4자 회합.
    ◉6월26일 버치의 집에서 김규식-여운형 2자 회담. 
    ◉7월1일 하지 사령관, 김규식-여운형의 좌우합작 노력지지 성명 발표.
    ◉7월2일 좌우합작 위원을 5대5로 증원, 버치가 결정.
    ◉7월10일 좌우합작위원회 성립.
    ◉7월12일, 버치가 민주주의민족전선 여운형, 김원봉, 장건상 등과 좌우합작기구 및 입법기구 설치 논의. 이날 ‘좌우합작위원회’ 첫 회의 개최.
    ◉7월16일 버치의 집에서 좌우합작위 2차 회의. 본격적인 토의 개시.
    ◉7월17일 버치의 집에서 회의, 여운형이 권총괴한들에게 집단폭행 당함.
    ◉7월21일 버치의 집에서 제1차 좌우합작 공식 예비회담. 공동의장에 김규식-여운형 합의. 회의장소로 덕수궁 미소공위 미국대표단 본부로 결정.
    ◉7월25일 덕수궁에서 제1차 정식 회담 개최, 비서국 설치 결정.
    ◉7월26일 좌익이 약속을 깨고 ‘합작 5원칙’ 발표. 우익서 절대 반대.
    ◉7월27일 원세훈의 좌익비난 담화 발표, 좌익이 회담 거부.
    ▶참조: 좌익의 ‘합작5원칙’ 내용
    1)3상결정 전면지지, 미소공위 재개,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과 행동 통일.
    2)북한식 토지개혁 무상몰수-무상분배, 주요산업 국유화, 노동계급 정치적 자유 보장.
    3)친일파, 민족 반역자, 파쇼 반동 거두들 완전배제.
    4)남조선에서도 미군정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할 것.
    5)미군정고문기관 및 입법기관 설립에 반대할 것.
    ▶좌익의 ‘합작5원칙’은 남한도 북한처럼 소비에트화시켜 ‘공산통일’하자는 주장이다.
  • 로버트 올리버(오른쪽)가 쓴 [이승만의 대미투쟁](원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의 번역본)표지.ⓒ뉴데일리DB
    ▲ 로버트 올리버(오른쪽)가 쓴 [이승만의 대미투쟁](원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의 번역본)표지.ⓒ뉴데일리DB
    ★이승만 ”해봐야 안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좌우합작 찬성“

    오랜만에 만나는 자문교수이자 동지인 로버트 올리버를 돈암장으로 초청한 이승만은 3남순회강연과 좌우합작까지 의견을 나누며 당분간 침묵을 지키며 시국을 관망하겠노라고 말했다.
    로버트 올리버가 이승만을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9월, 이승만이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언한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을 출간을 직후였다. 일손이 필요했던 이승만이 한국서 태어난 선교사의 아들 전킨(Edward Junkin) 목사에게 부탁하여 올리버를 소개받았다. 당시 33세의 젊은 학자 올리버는 시라큐스 대학을 거쳐 버크넬 대학교수로서 잠시 휴가중이었다. 올리버는 워싱턴 백악관 인근 라파예트 광장 부근의 숄스 카페테리어(Sholl’s Cafeteria)에서 처음 만난 이승만의 첫 인상을 그의 책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67세의 적지않은 나이에서 풍기는 젊은이 같은 패기...언변이 좋았다. 적절한 어휘 선택과 나무랄데 없는 발음으로 쉬고 조리있게 말을 구사한다. 하지만 말보다는 그의 온몸으로 나타내는 표현이 더 웅변적이다. 얼굴을 동적이고 눈을 빛났으며 입과 눈가의 주름에서도 풍부한 유머 감각과 진지함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내가 받은 강항 인상은 그의 절제된 품위였다. 침착함과 자신감이 결연하고도 도를 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이 사람은 대인이다. 자제력과 지도력을 겸비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남의 말도 경청할 줄 알았다. 그의 말 속에는 자신감과 더불어 탐구적인 자세가 풍긴다. 아무튼 그가 사라들과의 소통에 유난히 신경을 많이 쓴다는 점은 분명했다. 한마디로  이승만이란 사람은 소통의 달인이었다.
    번잡한 식당에서 처음으로 한국이 겪은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감동한 나머지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글로 쓰지 않습니까?”
    그는 미소로 대답하였다. “나는 작가가 아닙니다. 당신이 그걸 써보면 어떻겠소?”
    나는 그의 저의에 말려들었다. 어떻게 그 제의를 거절한단 말인가.“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앞의 책). 그리하여 올리버는 그때부터 1960년 이승만의 하야까지 18년간 동지가 된다.

    필자가 올리버의 글을 길게 인용하는 까닭은 이승만의 지성적 자유투사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반공 반소’의 극렬분자로 매도하는 미국이나 소련 패들의 끈질긴 모략을 견뎌내며 어디까지나 논리적인 대응으로 일관한 자유지성 이승만, 국제정치 국제법 박사 이승만이 어이없는 미국의 ‘좌우합작에는 어떻게 반격할 것인가.
    한달 쯤 지켜보던 이승만이 6월26일 저녁 김규식을 집으로 찾아갔다. 
    이승만은 담배 대통을 선물로 내놓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이승만보다 6살 아래, 유난히 담배를 즐기는 애연가이다.
    ”이 일은 아우님이 잘해주기 바라오. 이것이 하지의 개인 의견도 아니고 미국무성의 정책이란 말이오. 우리가 이 정책을 실행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거절합니까? 아우님이 한번 해 보시오. 독립을 위하여 미국사람들이 한번 해보라는 것을 어떻든 해봐야만 안 된다는 것이 증명될 게 아니겠소.“ 

    이승만은 다음날 미국으로 떠난 굿펠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하지 장군이 시도하는 것은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소련이 동의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만일 김구와 내가 제외된다면 소련이 받아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지 장군은 내가 지지하지 않으면 김규식은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김규식이 연립정부 수립에 성공하고 그 정부가 강대국들의 승인을 받은 뒤에는 전국 선거를 실시하기로 다짐하고 하지 장군에 동의하였다.“ ([대한민국사 자료집-28])

    이승만은 7월1일 하지 사령관의 ’좌우합작지지‘ 성명이 나오자 기자회견을 연다.
    ”내가 지금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는 김구씨와 내가 이미 협의하고 김규식 박사가 여운형씨와 교섭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언명하였나니, 여운형씨의 협조를 얻으면 우리 민족통일이 좌익까지 포함되어 더욱 원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좌우합작이 깨질 줄 알면서도 ’지지한다‘고 발표한 뜻은 무슨 일이든지 한 발 앞서 보고 국면을 활용하는 이승만 특유의 전략적 사고에서 나온 것, 미군정과 좌우파에 던진 ’1석3조‘의 미래카드였다.
    올리버가 말한 ’소통의 달인‘ 이승만은 무작정 반대하는 ’고집통‘이 아니다. 한치도 양보하지않는 것은 오로지 ’공산주의 반대‘ 뿐, 그래서 공산당과 미국이 뒤집어씌운 누명이다.
    해봐야 안되는 좌우합작, 공산주의를 모르는 미국이 원한다니까 ’겪어봐야 알 것‘이란 자세로 일단 지켜보겠다는 이승만이다. ”좌우합작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함“을 미국 스스로 체험하여 증명해보이라“는 것, 미국을 반공교육 시켜서 이용하려는 포석이기도 하다.
  • 미국의 선택을 받아 남한의 '좌우합작' 협상을 진행한 김규식과 여운형(오른쪽).
    ▲ 미국의 선택을 받아 남한의 '좌우합작' 협상을 진행한 김규식과 여운형(오른쪽).
    ★버치의 선택 ’김규식-여운형 합작‘은 가능할 것인가.
    버치 중위는 한국지도자들 가운데 김규식을 좌우합작에 가장 적합한 지도자로 택한다. [버치 문서]철 속에 김규식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버치가 그만큼 김규식을 중시하였던 것은 그가 임시정부 소속으로 보수 우익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였음에도 ’반탁-반소‘에 참여하지 않았고, 여운형 같은 좌파들과도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군도 용납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이다. (박태균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역사비평사, 2013).
    또 모스크바 3상회의결정에 찬성하면서도 과거 좌익정당(민족혁명당) 활동에도 불구하고 현재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에는 가담하지 않은 점 때문에, 좌우경력을 겸비한 영어 잘하는 학자풍이기에, 30대 젊은 장교 버치는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찍었다고 한다.

    당시 버치와 김규식의 ’야릇한 관계‘에 대하여 미국 신문 [시카고 선 Chicago Sun]의 마크 게인(Mark Gayn) 기자가 한국을 취재하여 쓴 기사가 흥미롭다.
    「점심을 먹으면서 버치는 흥분하여 김규식에게 닥쳐오는 위대한 운명에 대하여 말했다. 김규식에게는 분명히 결여되어있는 박력과 정력을 비치가 만들어내려고 노력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버치는 마치 예언자 김규식의 제자 같았다. 그러면서도 버치 속의 책략가가 머리를 쳐들었고, 그럴 때면 김규식은 정치적 괴뢰가 되었다. 요컨대 두 사람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규식은 빈틈없으며 야심적이다. 그리고 버치가 자신을 한국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을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다. 버치도 신을 가지고 노는 즐거움과는 별도로, 그의 친구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한국정부의 고문이 되는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Mark Gayn [The Japan Diary] 1948)
  • 해방후 남한의 좌우합작을 주도한 미군정 36세 장교 버치 중위(왼쪽)와 버치문서를 소개한 박태균교수의 책 표지.
    ▲ 해방후 남한의 좌우합작을 주도한 미군정 36세 장교 버치 중위(왼쪽)와 버치문서를 소개한 박태균교수의 책 표지.
    ◆스탈린에 ’국공합작‘을 선물한 루즈벨트...트루먼은 이승만을 선물로!!

    1년 전 죽은 루즈벨트가 살아났는가. 얄타회담에서 루즈벨는 소련의 유엔 창설참여와 한반도 신탁통치를 합의하기 위하여 스탈린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심지어 ”중국 국민당 정부에 공산당을 참여시키도록 장세스를 설득해야겠다“는 선심까지 불쑥 내밀었다. 스탈린은 굳이 요구할 필요도 없이 ’자다가 떡 먹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중국 국공합작‘이다. 
    루즈벨트의 유산을 갑자기 떠안은 트루먼은 1946년 1월에 마셜 장군을 중국 장제스에게 보내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좌우합작‘을 시도하였다. 
    같은 무렵 남한의 좌우합작도 같은 발상이었다. 미국이 주도한 신탁통치 문제도 미국의 ’국가 체면‘을 살리려면 무슨 방법을 쓰든지 소련을 달래 미소공위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2월엔 미국무부가 ”한국에서 극우-극좌가 아닌 진보적 인사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맥아더에게 보낸다. 5월24일엔 서울의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과 테이어(Langdon & Thayer)가 ”소련이 남한의 공산세력과 제휴하였으므로 이에 대항하려면 ’온건한 애국자‘ 세력을 내세워 맞서야 한다“고 건의한다. 
    ’온건한 애국자‘들로 소련과 싸우고 남한 공산세력과 반공투쟁이 가능할 것인가?  
    아무튼 미국무부는 루즈벨트가 스탈린에게 남의 국토를 선물로 퍼주었듯이, 미소공위에서 소련이 거부한 ”이승만 은퇴“를 선물로 주기로 하고, 좌우합작을 통하여 ’온건한 정치단체를 구성하라‘는 ’6.6 한국화 대한정책‘을 훈령했던 것을 위에서 보았다. 
    이 문서는 다음해 11월 유엔의 ’남북한 총선’ 결의안이 나올 때까지 줄곧 ’좌우합작의 바이블‘이 되어 한국의 우익만 죽이고 공산당을 키워주는 ’헛 수고‘에 땀을 흘린다. 
    오로지 소련의 합의를 끌어내 남북한 과도정부를 만들어놓고 ”명예롭게 한국을 철수“해야 하는 것이 미국의 시급한 지상과제로 변한 것이다. 더구나 소련이 수용하는 합작정부가 세워지면 ”한반도는 폴란드처럼 공산화 될 것“이라는 예측은 이승만만의 경고가 아니었다. 하지 사령관의 편지도 본국 정부의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스탈린의 친구‘들이 이끄는 미국무부의 눈에 한국인3천만의 운명이 보일 리가 없다.

    ★트루먼 정부가 일개 중위 버치에게 떠맡긴 남한의 좌우합작은 초반부터 삐걱거렸다.
    버치는 ’온건한 우익 대표‘로 지목한 김규식과 ’온건한 좌익 대표‘ 여운형을 한자리에 ’합석‘시키는 일조차 힘들었다. 겨우 겨우 7월10일 좌우합작위원회를 출범시켰지만 갈수록 앞길이 험난하고, 그럴수록 이승만과 김구 등을 비난하는 보고서만 늘어갔다. 
    우익세력은 어처구니없는 미국의 행태에 냉소적이었고, 공산당 등 좌익은 뜻밖에 좌우합작 파괴공작에 나섰다. 박헌영은 ”미국의 반공 놀음에 끼어들어 놀아나지 말라“며 여운형을 궁지로 몰아세운다. 왜? ’좌우합작 반대‘는 모스크바 스탈린의 지령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