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년 전 4·19 주도한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 이영일 전 국회의원 인터뷰"이승만정부 부정선거 항의 시위… 우남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불가능""제2공화국, 이승만이 하야 요구 수렴해 탄생… 독재자 프레임, 정적들이 만든 거짓""4·19세대가 모여 63년 만에 이승만과 화해… 80대 노인들도 無用之用 아닌가, 허허"
  • ▲ 이영일 전 국회의원이 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 이영일 전 국회의원이 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올해는 1960년 4월19일 학생과 시민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주의 시민혁명인 '4·19혁명'이 63주년을 맞이한 해다.

    이승만정부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던 당시 20대 학생들은 이후 50년이 지난 2010년 그의 공(功)과 과(過)를 재평가했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북한에 위성국가를 세우려는 소련을 경계하고, 유엔 감시 아래 자유총선거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을 꾀했던 이승만에게는 소련과 내부 정적자들에 의해 '민족 분열의 책임자' '독재자'라는 거짓 프레임이 씌워졌다. 그리고 이 허구의 주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8일 뉴데일리는 4·19혁명을 주도했던 이영일(85) 전 국회의원을 만나 63년 전 당시 상황을 생생히 듣고 이 대통령을 향한 거짓 프레임을 파헤쳐봤다. 이 전 의원을 비롯한 4·19 주역들은 지난달 26일 처음으로 우남(雩南)의 묘역을 찾아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4·19혁명에 앞장서게 된 계기는?

    "이승만정부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부정선거는 민주주의 국가, 즉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에서 발생하는 최고의 범죄다. 당시 자유당 소속이던 이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였던 조병옥 씨가 병으로 죽는 바람에 대통령에 무투표 당선됐다. 그는 85세의 노인이었고 후계자가 필요했다. 그때 초대 비서실장이던 이기붕이 후계자가 돼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자유당 강경파, 소위 4.19혁명의 원흉들이 있었다. 이들이 이기붕을 억지로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 했고, 노인이었던 이 대통령은 그저 따를 뿐이었다. 그는 부정선거를 통해 이기붕을 당선시켜야겠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한 적이 없다. 또 국무회의 속기록을 보면 실제로 부정선거가 있지도 않았다. 국민의 선택에 맡겼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바깥에서만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고 떠들어댔다. 이에 내가 친구들을 불러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데모에 합의해 서울대 정치학과 학생이 중심이 된 시위가 시작된 것이다."
  • ▲ 이영일 전 국회의원이 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 이영일 전 국회의원이 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4월19일, 당시 현장을 떠올린다면?

    "시위 전날인 18일, 정치학과 동기이자 문리과대학학생회 신문 '새세대' 주간을 하던 이수정이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선언문을 작성했다.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그 유명한 4·19선언문이다. 그러고는 글씨를 잘 썼던 황선필이 사학과에서 가리방(60년대 프린터)을 찍어 선언문을 제작했고, 미리 만든 플래카드와 합쳐 정치학과 연구실에 보관했다. 데모 시작도 전, 경찰이 문안을 가져가는 일을 막기 위해 나는 그날 연구실에서 잤다. 19일 아침이 밝자마자 강의실마다 뛰어들어가 학생들에게 플래카드를 나눠 줬다. '선생님, 미안합니다' 한마디 하고 들어가면, 교수들도 '이 친구가 데모 선동하러 왔구나' 생각하고 '나는 오늘 수업 안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모든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뛰쳐나와 운동장으로 몰려갔다. 법대 캠퍼스에도 가서 '동기들이 전부 데모를 나갔는데 법대생들은 뭐 하고 있느냐'고 외쳤고, 그곳 교수들 역시 '오늘 수업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다 같이 행진을 하고 있는데 경찰들이 막아섰다. 대학생들로서는 곤봉을 든 무술경찰을 뚫을 수 없더라. 곤봉에 맞아 쓰고 있던 안경 유리가 깨져 눈에서 피가 흘렀다. 서울대 의대 병원까지 같이 가 준 김치호라는 친구는 도서관에 둔 가방을 찾으러 가겠다고 말하고는 데모에 뛰어들어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경찰 총에 맞아 죽었다. 미술대 학생들도 데모에 참여했는데, 그 중 고순자라는 여학생도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총에 맞아 죽었다. 당시 경찰이 총을 들었을 것이라고, 또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시위에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려 했던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183명이 죽었다. 그러자 오후부터 시민들까지 합세해 시위를 벌였고, 경찰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더라. 20일이 되니 서울 경찰서가 싹 비워져, 우리 학생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각 경찰서로 이동해 민원 신고를 받고 사회 질서를 회복해 갔다.

    정부에서도 질서를 유지한다며 계엄을 선포했고 군대가 서울 시내로 몰려들어왔다. 그런데 학생들이 전부 일어나 시민들과 함께 탱크 위로 올라가서는 '군인은 우리 편이다'를 외치면서 박수를 막 쳤다. 그러니 어떻게 군인이 총을 쏘겠나. 사령관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사병들이 데모꾼들 편에 가세해버리니, 대한민국 육군의 자유당정권에 대한 충성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한민국 군의 로열티가 자유당정권에서 떠난 것이다. 구경만 하던 교수들도 가두에 나가 시위를 벌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키 150㎝ 조금 넘는 국어학자 이희승 교수가 '이승만 물러가라'를 목놓아 외치던 장면이다.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문장 외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플래카드를 든 채 각 대학 교수 100여 명이 대학가에서부터 행진했고, 중간에 다른 대학 교수들도 참여하면서 규모는 점차 커졌다."
  • ▲ 이영일 전 국회의원이 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 이영일 전 국회의원이 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위치한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사무실에서 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50년이 지난 2010년,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했는데? 

    "이 대통령은 대학교수들의 시위 직후 학생 부상자 위문을 다니며 '자네들이 있어 든든하다. 불의를 보고 싸울 수 있는 청년들이 있어야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지금도 기억나는데, 그는 방송에 나와 '나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선언하고 사임했다. 그때는 우리가 강해서 이 대통령이 물러났다고 생각했는데, 50년이 지나고보니 그게 아니더라. 2010년, 시위에 참가했던 선후배가 모여 4·19혁명 50주년 세미나를 열었다. 기독교에서 50년은 '희년(禧年)', 즉 빚진 자를 탕감하고 갇힌 자를 풀어주고 새로 시작하는 날이다. 4·19세대가 본 '이승만 대통령의 공(功)과 과(過)'를 평가해보기로 했고 내가 주제발표를 맡았다. 그런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직후 건국 대통령이었다는 세 가지뿐이더라. 4월15일 논문 발표까지 3개월간 국회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며 조사했고, 결국 '이 대통령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성립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소련의 공산주의가 지닌 폐해를 깨닫고 유엔을 한국 통일문제에 개입시키려 한 인물이 바로 이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일본을 장악하면 된다는 생각뿐, 한반도에 대한 관심이 전무했다. 반면 소련은 시베리아 개발과  태평양 진출을 위해 얼지 않는 항구인 부동항이 필요했고, 그래서 북한 땅에 위성국가를 만들려는 상황이었다. 이 대통령은 미국으로 들어온 많은 동구라파(동유럽) 이민자들에게 소련이 어떤 국가인지 물어봤다. 공산주의는 불평등이 없는 대신 소유권과 종교를 부정하고 국가 소멸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는 공산주의가 틀렸다고 생각했다. 북한이 그런 소련의 위성국가가 될 것을 경계했던 그는 1945년, 모스크바 3상회의가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들여와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동구라파 모델을 채택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유엔 모델을 선택했고, 미국 조야를 돌아다니며 '유엔 감시 아래 총선을 진행하고 통일 독립을 이루겠다'고 역설했다. 

    남한에서 이 대통령의 인기는 대단했다. 1945년 10월16일, 그는 해방 후 두 달이 지나서야 미국 국무성의 도움으로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는 '대통령을 맡아 달라'는 일각의 부탁에 '당신들이 나를 좋게 평가해 준 것은 고맙지만, 그건 국민이 선택할 일이기에 절대 일방적일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 해외 독립운동가 환영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해외파는 '국내파는 친일파'라고 주장했고, 국내파는 '우리가 훨씬 더 고생했다'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때 이 대통령이 벌떡 일어나서는 '2000만 국민이 친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없는 나라를 만든 이는 조선 국왕이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일본에 나라를 바쳐 한일합병을 해버렸다. 책임을 물을 것이라면 조선 국왕에게 해야 한다. 또 일제시대에 일본 황실과 똑같은 대접을 받았던 이왕직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 우리가 임금 잘못 만나 일본으로부터 노예생활을 하는 멍에를 더이상 쓰지 않으려면 친일, 반일 따지는 것이 아니고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자 민심이 모두 이 대통령에게 쏠렸다. 당시 그만큼 우수한 경력·관록·학력을 가진 이는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존재하지 않았다. 단언컨대, 최고의 엘리트였다."
  • ▲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8주년 기념식이 개최됐다. ⓒ손혜정 기자
    ▲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8주년 기념식이 개최됐다. ⓒ손혜정 기자
    -하지만 여전히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이 대통령에게 씌워진 프레임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소련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민족 분열의 책임자' 프레임이다. 소련은 북한에 위성국가를 세웠는데, 이 대통령이 유엔 감시하에서 자유총선거를 통한 통일국가 수립안을 내놓으니 '전 국민이 원하는 통일을 반대하고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했다'는 심리전을 펼쳤다. 그런데 이것을 북한 공산당 김일성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국내외 좌파들이 동조하는 바람에, 그는 민족 분열을 이끈 원흉으로 몰렸다. 나중에 소련이 붕괴되고 허위사실임이 밝혀졌지만 이 허구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두 번째는 이 대통령을 독재자로 몰아야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국내 정적들이 만든 '독재자' 프레임이다. 당시 학력·경력·경륜·리더십에서 그를 능가할 수 없었던 정치인들은 3선개헌과 부정선거 실패를 명분으로 이 대통령을 '노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라고 칭했다. 

    하지만 독재자 중 이 대통령처럼 국민의 하야 요구를 받아들인 사람은 없다. 전부 정권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을 일치시켰고, 그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거나 도망쳐버렸다. 반면 이 대통령은 국민의 하야 요구에 응해 다시금 공정선거를 치렀고 제2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또 그의 자유민주주의 헌정과 한미방위동맹조약 때문에 우리나라는 지금껏 70년간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시위 당시 나 역시 이 대통령을 노욕에 사로잡힌 독재자로 봤는데, 50년이 지나서야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 ▲ 4.19 세대 각계 원로들이 지난달 2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했다. 왼쪽부터 한화갑 전 의원, 이인호 전 KBS 이사장, 이영일 전 의원. ⓒ서성진 기자
    ▲ 4.19 세대 각계 원로들이 지난달 26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했다. 왼쪽부터 한화갑 전 의원, 이인호 전 KBS 이사장, 이영일 전 의원. ⓒ서성진 기자
    -지난 3월26일,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찾아 참배했는데?

    "이 대통령의 공로에 합당한 평가와 예우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참배행사를 단행했다. 과거 시위 직후 대책회의를 열면서 알게 된 각 대학 리더들에게 전화를 돌려 '올해로 4·19혁명은 63주년, 이승만 대통령 서거는 54주년을 맞았다. 금년 148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어떤 성명이나 선언 없이 묘소 참배 하나만으로 이 대통령과 우리 사이 화해의 역사를 이루자'는 제안을 했다. 여기에 응한 50~60명의 80대 노인들이 그 자리에 모였다. 노자 사상에서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도 쓸모가 생길 때가 있다는 의미다. 우리 노인들이 이 대통령 묘소 앞에서 참배를 하니 없던 쓸모가 생기더라. 허허. 이제 4·19혁명을 시작으로 이 대통령을 몰아냈고, 또 63년 만에 참배를 함으로써 화해를 이뤄냈는데 미션을 클리어했다고 본다."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떠한가?

    "민주주의는 모순도 많고 약점도 많다. 그러나 야당이 있기 때문에 여당의 부패와 오만을 막을 수 있다. 견제세력이 없으면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고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위기에 놓여 있다. 보수와 진보가 견제와 균형을 이뤄야 하지만, 친북·종북세력이 판을 치고 있다. 이들은 일반적 사고인 '적이 아니면 동지'에서 벗어나, '동지가 아니면 적'이라 생각하고 적을 만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견제와 균형이 '없는' 정권을 견제와 균형이 '있는' 정권으로 변모시킨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독립된 정치개혁위원회를 만들어 바람직한 선거제도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