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세운동에는 참여할 마음이 없다. 자네들이나 부르게"

    서울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들불처럼 급속히 번져갈 때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는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지요? 잠깐 들여다 봅시다. 

    43세 김구가 3.1운동을 맞은 것은 그의 고향 황해도 안악군 동산평 농장에서였다. 서당 같은 학교에서 농촌 청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하던 때다. 
    우선 김구가 썼다는 [백범일지]에 나오는 그때의 일을 요약해보자.

    「...청천벽력과 같이 경성 탑골공원에서는 만세소리가 일었고, 독립선언서가 각 지방에 배포되자 평양·진남포·선천·안악·온정·문화 각지에서 벌써 인민이 궐기하여 만세를 부르고, 안악에서도 계획하고 준비하던 때였다. 
    장덕준(張德俊) 군은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뜯어 읽어보니 ‘국가대사가 일어났으니 같이 재령에서 토의 진행하자’는 것이다. 나는 ‘기회를 보아 움직이마.’라고 답신을 보내고, 밀행하여 진남포를 건너 평양으로 가려하니, 그곳 친구들이 “평양에 무사히 도달하기 불가능하니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므로 그날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안악에서는 
    “이미 준비가 완성되었으니 함께 나가서 만세를 부릅시다” 하는 청년들이 있었다.
    “만세운동에는 참여할 마음이 없다”고 하였다.
    “선생이 참여하지 않으면 누가 선창합니까?”
    “독립은 만세만 불러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장래 일을 계획 진행하여야 한 터인 즉, 나의 참·불참이 문제가 아니니, 자네들은 어서 만세를 부르라”하고 돌려보냈다.
    그날 안악읍에서도 만세를 불렀다.
    나는 그 다음날 아침에 평내 소작인들을 지휘하여 농기구를 가지고 모이라하여 제방 수리에 몰두하였다. 나를 감시하던 헌병들이 내 동정을 보아야 농사준비만 하기 때문인지, 정오가 되어 유천(柳川)으로 올라가버렸다. (중략)
    지체할 수 없는 형편을 보고 즉시 출발하여 사리원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신의주 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 안에는 물 끓듯 하는 말소리가 만세 부르는 이야기뿐이다. (중략)
    나는 중국인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 큰 다리를 지나서 안동현(安東縣)의 어떤 여관에서 변성명하고 좁쌀장수라 하고서 7일을 경과한 뒤, 이륭양행(怡隆洋行)의 배를 타고 상해로 출발하였다.(하략)...」

    이상의 기록은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1997년 발행)의 ‘상해 망명’ 부분에 나온다. 김구가 ‘만세운동’ 참여를 거부하는 이유와 중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이 간단히 정리되어있다.
    즉, 만세는 젊은이들이 부르면 되고, 김구 자신은 ‘장래 계획’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당시 3.1운동에 대한 김구의 기술 전부이다. 

    4월초 상해에 도착한 김구는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거기에 참여하고 싶어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었다. 5월 안창호가 미국에서 왔다.
    김구는 "나는 배운게 없으니 임시정부 문지기라도 시켜달라"고 간청하였다고 한다. 안창호가 '경무국장' 임명장을 주어 사양하다가 받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 ▲ 1919년4월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된 김구. 오늘의 경찰국장격이지만 임정대통령과 임정요인들의 경호를 비롯, 청사 경비와 간첩잡기등 치안 총책.(자료사진)
    ▲ 1919년4월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 된 김구. 오늘의 경찰국장격이지만 임정대통령과 임정요인들의 경호를 비롯, 청사 경비와 간첩잡기등 치안 총책.(자료사진)
    중국 망명을 결심하게 된 과정

    ★[이승만과 김구] 전7권(조선뉴스프레스, 2015년 발행)을 저술한 손세일(孫世一: 3선 국회의원, 동아일보 논설위원 출신)은 김구 연구의 선두주자로서 백범관련 연구서를 내고 ‘김구 국부’ 취지의 글도 많이 쓴 언론인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상기 저서(제2권)에서 김구의 망명과정에 관한 보다 상세한 자료를 구해 소개하고 있다. 즉, 105인사건 중 ‘신민회 사건’ 관련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김구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고 둘이서 중국으로 망명했던 최명식(崔明植)의 회고 기록이다. 
    「....유천시장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어보니 감격과 흥분을 금할 수 없게 했다. 그곳 친구들과 술을 나누면서 무작정 흥분하기만 했다. 안악에 가서 좀더 자세한 소식을 들을까 하던 차에 김용진(金庸震)이 사람을 보내서 김구와 함께 오라 했다. 동산평으로 김구를 찾아가 함께 안악으로 들어가니 김용진 형제는 우리에게 ‘이번 서울의 만세사건이란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의하여 우리도 이 기회에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인데...(중략)...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세계에 선포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할 양으로 많은 대표가 참가하기를 희망한다 하니, 김구와 나더러 상해로 나가라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최명식 [안악사건과 3.1운동과 나])

    그때 최명식과 김구는 “매우 수동적”이었다고 고백한다. 가족 생활문제 때문이었다. 그러자 김용진이 “가족들 생계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고 적극 설득하였다, 이에 두 사람이 고민하다가 망명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써놓았다.
  • ▲ 백범일지 1979년 교문사 발행 표지, 1997년 돌베개 발행 표지ⓒ뉴데일리DB
    ▲ 백범일지 1979년 교문사 발행 표지, 1997년 돌베개 발행 표지ⓒ뉴데일리DB
    연구자들이 제기하는 몇가지 의문들

    여기에서 손세일은 [백범일지]의 3.ㅣ운동 부분에 대하여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들을 열거하고, 특히 김구가 3.1운동 참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며 강한 의구심을 나타낸다.
    김구가 [백범일지]에 중국행 배를 같이 탔던 인물들이 15명이라 적어놓았는데, 이들은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인 김병조(金秉祚)를 비롯하여 안승원(安承源), 장덕로(張德櫓), 이원익(李元益), 조상섭(趙尙燮), 양준명(梁濬明), 이유필(李裕弼), 고일청(高一淸), 김인서(金引敍), 이규서(李奎瑞) 등이다. 대부분 자신들의 고장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목사나 교인들로서 일본경찰에 쫓기다가 망명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원익, 이유필, 고일청은 김병조와 함께 평북 의주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김병조 [독립운동사략], [독립운동사] 중 ’3.1운동사‘ 상권,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제2권). 
    이와 같이 만세운동을 이끌고서도 망명할 수 있었는데 왜 김구는 만세운동을 거부한 것일까.
    그리하여 손세일은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의문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 일찍부터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외치며 계몽운동을 해왔던 김구가 고향에서 시위운동을 벌이는 일이 극히 자연스러움에도 불구, 자신을 따르는 청년들이 시위 준비를 끝내고 ’만세 선창‘을 요청하는데도 “즉석에서 거절”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더구나 황해도의 만세시위는 서울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고 다른 지역보다 한층 격렬하고 꾸준했다는 당시 기록을 손세일은 제시하고 있다. 
    즉, 김구가 망명하던 3월 한 달 동안만도 김구의 고향 안악은 물론, 곳곳에서 거의 매일 수백명씩, 때로는 천명 넘게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일본경찰의 공격에 사망자가 속출하고 잡혀간 사람들이 수천 명에 달했다.(조선헌병사령부 편 [대정8년 조선소요사건 상황],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앞의 책). 이 거센 독립만세의 물결을 등지고 중국행을 선택한 김구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세계의 약소국들을 고무시킨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나 파리 강화회의 같은 국제 정세에 대해서 1928년에 쓴 [백범일지]에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는 점이다. 10여년이 지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 1941년경 김구가 쓴 [백범인지] 하권 서두에서야 비로소 민족자결주의를 언급하고 지나간다.

    셋째, 3.1운동 준비과정에서 김구에겐 왜 아무도 연락을 안했을까하는 점이다. 동학에 동참했던 김구인데도 천도교쪽에서 연락이 왔다는 기록이 없을 뿐더러, 105인사건때 함께 붙잡혀 옥살이도 같이 했던 개신교 33인대표 이승훈 장로까지 김구를 빼 놓은 점이 의아스럽다.

    넷째, 장덕준(장덕수 형)이 재령으로 와서 국사를 논하자고 요청하는데 이를 거부한 김구가 평양으로 달려가다가 친구들이 만세운동 때문에 못 간다고 말리자 진남포에서 되돌아선다. 왜 장덕준의 요청을 외면하고 왜 평양부터 가려했는지 [백범일지]에는 설명이 없으니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다섯째, 그토록 원하던 첫 아들(김인 金仁)을 낳은 지 석달 밖에 안되었을 때, 가족과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중대 결단을 내린 중국망명에 대한 설명이 하나도 없다. 더구나 가족걱정에 망설이다가 설득을 받고 결심한 망명이라면 독립운동가로서의 심정변화 동기와 망명 목적 등을 설명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다. 독립을 입에 달고 살던 김구 아니던가.
    게다가 [백범일지]에는 김구가 두 차례 옥살이 이야기를 지나칠 정도로 상세히 써 놓았고, 특히 감옥의 열악한 급식에 대한 불만 등 소소한 일들은 불필요할 만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심지어 이런 표현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런 때에 다른 사람들이 문전에서 사식을 먹으면 고깃국과 김치 냄새가 코에 들어와서 미칠 듯이 먹고 싶어진다....(중략)....나도 남에게 해가 될 말이라도 하고서 가져오는 밥이나 다 먹을까. 또한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이라도 팔아서 좋은 음식이나 늘 해다 주면 좋겠다 하는 더러운 생각이 난다...” ([백범일지] 돌베개 1997)
    이런 막말을 인용해놓은 손세일은 ’김구의 정직성을 말해준다‘고 감싸면서도, 그러나 평생을 바칠 중국망명 독립운동 문제와 관련된 진술이 여기에 안 보이는 것은 “매우 이상하다”고 물을 수 밖에 없다 하고 있다. 
  • ▲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판(왼쪽)과 중국어 판 표지.(손세일 [이승만과 김구]제2권에서 전재)
    ▲ 백범일지 일본어 번역판(왼쪽)과 중국어 판 표지.(손세일 [이승만과 김구]제2권에서 전재)
    20대 '치하포 사건'에서 70대 '김일성과 협상'까지

    ★[백범일지]를 둘러싼 ’김구의 미스터리‘는 연구자들이 여러 가지를 내놓는다.
    유명한 ’치하포 사건‘이 대표적이다. 칼 찬 왜인을 보자 ’국모를 살해한 일본 미우라 공사이거나 공범‘으로 단정하고 살해한다든지, “난도질한 왜놈의 피를 마시고 얼굴에 바르는” 그 잔인한 살인행위의 상세한 묘사라든지, “국모보수(國母報讐: 민왕후 피살의 복수)”라고 김구가 주장하고 뒷날 지지자들이 ’복수 의거‘라 찬양하고 있지만, 당시 대한제국정부 수사당국의 기록에는 도피중인 ‘살인강도’를 붙잡아 처벌한 것이라 적혀있다. 
    또한 김구가 일방적으로 왜놈장교라 지목한 피살자는 일본 민간인 약장수로 판명이 났는데도 김구는 뒷날까지 ‘왜놈 소위...중위“ 등으로 때에 따라 계급을 올려 말하기도 했다는 증언들이 전해진다고 한다. 모든 인간의 본능적인 ’자기과시욕‘이겠지만 세칭 ’민족지도자‘의 품격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또한 당시 인천 감옥에서 사형 직전에 고종의 ’석방 전화‘로 풀려났다는 주장 역시 전화개통 시차가 드러나 맞지 않음이 판명되기도 했다.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에서 ”소련 공산주의가 세계 최악의 독재체제’라 써놓고서도 소련 스탈린의 꼭두각시 김일성과 통일논의를 벌였다는 사실을 두고서 김구의 정치적 정체성까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 '나의 소원'을 이광수가 썼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김구는 [백범일지]의 분실을 염려하여 필사본을 몇 개 만든다. 
    해방직전엔 미주 동포에게 보내 출간 되었고, 1945년 귀국후 만든 필사본이 있으며, 당대의 소설가 이광수(李光洙)가 한글로 풀어 ‘유려한 문장’으로 윤색한 번역본이 잘 알려진 자서전이다. 여기에다 90년대에 여러 판본 자료를 총망라하였다는 ‘돌베게 판’이 나와 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붙어있는 「나의 소원」 부분이 사실은 이광수가 써서 붙인 것이란 주장이 나온지도 오래 되었다. ‘돌베게 판’ 주석에서도 “「나의 소원」은 1947년 12월 ‘국사원본’이 간행될 때 처음 수록된 것으로 당시 백범의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백범일지]와는 달리 매우 다듬어진 글이다.”라는 해석을 붙여 놓았다.
    이와 별도로 특히 ‘문화국가’론은 소설가 이광수의 언론인시절 주장과 판박이라는 증거까지 내놓는 연구자도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성역화된 백범’ 레드라인에 막혀있는 게 현실이다. 
    그럴수록 [백범일지]를 추측과 오해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우리 현대사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 정리해야 할 때가 지나도 너무 지나지 않았는가. 북과 남에서 선전선동에 악용하려고 ‘만들어낸 신화의 가면’을 늦게라도 벗겨내야, 자기역사도 모르게 되어버린 국민들이 ‘역사문맹’의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