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형'도 모르는 광기의 민낯들… 40년 경력의 기록관리 전문가가 고발'NLL 기록 삭제' 사건부터 '태블릿PC' '탈원전 기록 삭제' '부정선거 논란'까지
  • 촛불이 광화문광장을 점거하던 2016년 세밑을 앞둔 어느 날,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광장 인근 청사에 있던 저자는 '광장의 외침과 소란'을 내려다보며 혼자 물었다.

    "200여 년 전 프랑스 혁명 시대의 모습을, 21세기 자유민주공화국이며 법치국가를 자부하는 대한민국의 광장에서?"

    베이비붐 세대로서 광장의 함성과 함께 60년을 살아온 어공은 본업이 기록관리인지라, 직업의식의 발로로 또 자문했다.

    "광장의 외침과 소란들이 과연 온 사회를 뒤집어 놓을 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는지? 온 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그 문제들이 그 뒤 어떻게 마무리되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지?"

    투명하지 않으니 책임도 없다

    '광기의 시대(도서출판 기파랑 刊)'는 21세기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광기(狂氣)'들을 '기록'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분석한 보기 드문 책이다. 저자는 40년 경력의 기록관리 전문가. 커리어 말년에 개방직 고위공무원과 공공기관장을 지냈다. 노무현 'NLL 기록 삭제' 사건부터 '최순실 태블릿'과 '안종범 수첩', 가까이는 산자부 탈원전 기록 삭제와 2020년 총선 부정 논란까지, 굵직한 사회정치적 이슈들을 기록의 관점에서 차분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파헤친다.

    저자에게 기록이란 '역사를 위한 기초자료'이고, 특히 공공분야 기록물은 공무원의 '책임성'을 담보할 보루다. NLL 기록 삭제, 노무현 청와대 자료 이관, 탈원전 기록 삭제, 개별 대통령기록관 설립 등은 바로 공무원의 '책임성'을 공무원 스스로 배반한 사례라고 책은 지적한다.

    기록이 제몫을 다하려면 기록과 기록을 이루는 문건들에 담긴 정보의 '투명성'과 '무결성'이 확보돼야 하는데, 최순실과 박근혜 전 대통령 재판에서 최순실 태블릿PC와 안종범 업무수첩은 보도부터 법정 증거 채택까지 투명성과 무결성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고 설명한다. 정파적으로 이편이냐 저편이냐를 넘어, 성숙한 사회라면 기록과 문건들을 어떻게 취급하고 활용해야 하는지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아날로그 머리로는 이해 못 할 디지털 세상

    4.15 총선 부정 논란과 관련해서 책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걸 문제삼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

    '공무원으로 일해 본 기록관리 전문가'로서 함직한 얘기만 하는데도 논점마다 정곡을 찌른다. 사전투표용지에 법이 정한 막대형 바코드 대신 QR코드를 인쇄한 데 대한 분석이 좋은 보기다.

    부정선거 논란에 대한 가장 순박하고 감성적인 반발은 "디지털 세상에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묻는 것일 것이다. 책은 여기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요즘 세상이기 때문에 부정선거가 가능하고, 디지털 세상이기에 수백 명이 아니라 수십만 명의 눈을 속이는 건 일도 아니라는 논리다.

    논의는 자연스럽게, '낡은 아날로그 감성으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디지털 문맹(digital illiteracy) 문제로 흐른다.

    크게는 공공기록물부터 작게는 일상의 인터넷 정보 편향과 피싱(보이스피싱, 피싱메일)까지, 디지털 사회에서는 단순히 읽고 쓰는 능력을 넘어 '정보의 거짓과 진실을 판단하는 능력'까지 갖춰야 '디지털로 쌓은 바벨탑'의 시대에 디지털 문맹을 면하게 됨을 역설한다.

    자신이 지체장애인인 저자가 국립장애인도서관장을 지내며 겪은 '개안(開眼)의 순간'도 눈길을 끈다. 일례로 장애인도서관 소장 자료의 90퍼센트가 시각장애인용이고, 상대적으로 청각장애인용 도서가 적은 것은 "책은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청각장애인이 "글을 '읽을' 수는 있어도 텍스틀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

    이는 '드러난 수요'에만 맞추어 예산을 배정했기 때문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민간의 수요-공급 메커니즘과 차별화되는, '스스로 수요를 창출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고려하는' 공공의 역할의 중요성을 저자는 강조한다.

    기록이 없으면 진실도 없다

    "책임이 없으면 기록도 없다(No accountability, no record)."

    책임은 진실에서 나오고, 기록이란 결국 진실을 위한 것이다. 권력과 어용 미디어가 진실을 "쳐다보지 마(Don’t look up)"라고 강요할 때 "쳐다봐(Look up)"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흔히 '극우' '보수꼴통' '미친 사람'으로 치부되기 일쑤인 이 사람들에 대해 책은 "자유와 진실을 찾아 기꺼이 자기 삶을 던지는 용기 있는 소수"라며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자유와 진실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치이고 세상을 이끌어 가는 기준이다. 그리고 기록은 '진실'을 증명할 수 있을 때 이러한 가치와 기준을 보존할 수 있다.

    저자는 기록관리 분야 전문가로서 진실이 왜곡된 우리 사회의 현상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제도와 절차를 갖추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의 미래와 시대정신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 저자 소개

    정기애: 창덕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에서 도서관학을 전공했다. 1982년 공채 2기로 우리나라 원자력발전 설계 기술 자립을 위해 세워진 한국전력기술(주)에 입사해 회사가 세계 원자력 발전 분야 톱 5로 성장하는 동안 정보관리와 기록관리 분야 전문가로 33년간 재직하면서 회사 최초의 여성 관리자, 최초의 여성 임원으로 정보자료관리실 부장과 인재개발교육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회사 자체 프로그램인 전산학 석사과정과 한국외국어대학교의 경영자 연수과정을 수료했고, 주경야독으로 중앙대학교에서 기록관리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국가기록관리위원회 전문위원과 한국기술표준원의 표준화 전문위원(ISO/TC46 SC11) 활동 등을 통해 국가 기록관리 발전과 표준화 확산을 위해 노력했고, 2015년에는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기록정책부장(개방직 고위공무원)으로 부임해 국가 공공기록물 관리 정책 개발 및 정부 기록관리 시스템 고도화를 추진했다. 소아마비 장애인으로서 2018년 국립장애인도서관장으로 임용돼 우리 사회의 '장애인 정보복지' 체계를 정립하기 위해 예산 확보 및 관련법 개정을 추진해 국립장애인도서관을 문화체육관광부 직속 기관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