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말씀을 빌려 시절을 탄(嘆)하다‘꼰대’의 넋두리... 비난(?)을 무릅쓰고
  • 李 竹 / 時事論評家

      ‘21대 총선’이 막을 내렸다. 그 결과를 논하는데 다른 때와 달리 유난하게 보수(保守)VS진보(進步)의 구도를 부각시키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과연 이 나라에서 제대로 된 보수와 진보가 정치적 격전을 치렀다고? 그럴까?
      “세상은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대결이 아니다. 단지 ‘나쁜’ 사람과 ‘덜 나쁜’ 사람의 대결일 뿐이다”
      이게 맞는 말씀은 아닐는지. 물론 ‘이긴 무리’가 ‘덜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네 편 내편 할 거 없이 그저 ‘나쁜’과 ‘덜 나쁜’이 서로 엉켜서 ‘순박한’ 국민을 누가 누가 더 잘 속여 먹나 내기한 건 아닌지...

      ‘자유민주 헌정’ 중단·파괴에 동참·부역(附逆)질을 했으면서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반성·사과의 말 한마디 없이 ‘미워도 다시 한 번’을 외치며, 국민의 선택을 요구했다.
      ‘흘러간 X물’ 주제에 역사의 물레방아를 돌리겠다며 뻔뻔한 낯짝들을 들이댔다.
      저들이 이른바 ‘보수’라고?

      그렇다면...

      3대째 세습독재정권에 요모조모 아부하며, ‘협력’이란 미명 하에 ‘퍼주기’에 안달인 군상들이 널려있지 않은가.
      “4父子 금배지 김OO” 본 투표 다음날, 아무개 조간신문 기사의 제목 중 일부였다.
      이런 짓거리들이 속칭 ‘진보적’이라고?

      사정이 이러하니 ‘총선’ 결과를 놓고 보수와 진보의 대결인양, 그리고 진보가 승리했다는 식의 말장난은 집어치우라고 내뱉고 싶다. “작작 좀 속이고 웃겨라!” 대신에...

      일련의 선거 과정과 결과와 그 이후 며칠에서 언뜻언뜻 다가오는 느낌들을 한 번쯤 정리해보고자 했다.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관련한 자료가 크게 부족하니 여기저기 떠도는 소식·소문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전문적인 식견이 많이 모자라는 관계로 그 무슨 분석·평가·진단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 동안 귀동냥과 곁눈질로 적어놓았던 동서고금(東西古今)의 현자(賢者)들 말씀만 추려다 붙이기로 했다.
      별도의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공감(共感)이 가능할 거라고 믿는다. 출처는 일일이 밝히지 않는다.

      이번 ‘총선’의 투표율은 66.2%라고 했다. 예전에 비해 꽤 높았다고. 먼저 선거하면 떠오르는 고전적인 경구(警句)가 있다.

      “정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받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각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이번 선거의 개표(開票)가 마무리될 어간에는 당연히 이런 말씀이 격에 맞을 듯했다.

      “나라가 흥하려면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는데, 군자는 기용되고 소인은 쫓겨난다. 나라가 망하려면 어진 사람은 숨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난신들이 귀하신 몸이 된다.”

      “돈이 최고의 군대다. 절대 패배를 모른다.” 아마도 이후는 이렇게 결론이 날 것 같다.

      “세금은 네 몫. 복지는 내 몫.”

      요즈음 이 나라 젊은 청춘들의 ‘표심’(票心)이란 게 화제라고들 한다. 그래서 ‘테러리즘’을 다룬 양키나라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대사(臺詞)를 문득 떠올려봤다.

      “방종에 흐느적대고 있지... 자신들이 가진 자유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그걸 우리가 무기로 쓸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지... 이들에게는 그 자신들이 가장 무서운 적(敵)인 것을, 그 사실들을 모르고들 있어...”

      이 나라 아무개 문학평론가의 이런 표현도 있었다.

      “경험에 따라 계몽된 적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역사의 현장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이들을 부추겨...”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청춘을 청춘들에게 주기에는 너무도 아깝다.”
     
      이 정도면 아마 ‘꼰대’라는 손가락질과 함께 쌍욕을 듣기에 딱 알맞지 싶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단지 ‘선거’라는 특별한 상황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서 어제도 통했고, 내일도 널리 먹힐 수 있는 말씀도 기억한다. 말씀이라고 하긴 좀 거시기하다. ‘나치’(Nazi)의 입에서 나왔으니...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믿게 된다.”

      아무튼 ‘21대 총선’은 그 성대한(?) 막을 조용하지 않게 내리고 있다.

      “자랑스럽지 않은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 소중히 돌아볼 날이 될 수 있다.”

      이건 매우 낭만적이지만, 현실은 글쎄다. 결코 ‘바르다고 할 수 없는’ 이웃에서 그 나마 양심과 결기를 보였던 젊은이가 있었다. 30여년 전의 ‘천안문 시위’ 주동자[당시 20세]가 그가 쓴 책을 통해 폭로했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의 소행이란다. 왠지 이 시점에서 그 시사하는 바에 씁쓸할 뿐이다.

      “혁명(革命)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인다.”
      “개혁(改革)의 이름으로 장물을 나누어 갖는다.”
      “조화(調和)의 이름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절망을 얘기하다 보면 절망에 빨리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희망을 이야기해야 길이 보인다.”
     
      혹여 낙담(落膽)에 겨워 ‘술 푼’ 날들이 이어지고 있을 속칭 ‘우국지사’(憂國志士) 분들께 권하는 말씀이다. 곁들여서...

      “악(惡)은 선(善)한 사람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승리하는 법이다.”

      그리고 어쭙잖은 넋두리를 마치며...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함께,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싶은 말씀이 뒤통수를 친다. 비록, ‘바르다고 할 수 없는’ 이웃나라의 고전(古典)에 실렸다지만.

      “하늘이 아직 나쁜 자를 놓아두는 것은 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죄악이 짙기를 기다려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
    <이 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