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칼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 다시 일어설 준비, 격려와 힘을 보태야
  • ▲ 김기현 전 울산광역시장.ⓒ뉴데일리DB
    ▲ 김기현 전 울산광역시장.ⓒ뉴데일리DB
    며칠 새 가을이 더 깊어졌습니다. 저도 형처럼 가을이면 김현승 시인의 시를 떠올립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시인의 일갈처럼 가을은 겸허해져야 하는 계절입니다. 세상과 이웃, 자신 앞에서 더 겸허해질 때 더 깊어지고 성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가을을 기도와 편지로 채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일전에 손님이 뜸한 선술집에서 만났을 때, 형은 말했습니다. 진보라는 허울 속에 숨겨져 있던 위선을 목격하면서, 수십 년 쌓아올린 공든 탑들이 무너져 내릴까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평화 속에 숨은 친북의 민낯을 보면서 나라가 걱정이라고도 했습니다. 술병이 반쯤 비어갈 무렵 형은 막내의 취직 걱정, 동네 단골식당의 장사 걱정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방향을 자유한국당으로 틀었습니다.

    조국이라는 작자를 내세울 만큼 국민을 깔보고, 김정은에게 조롱당하고, 경제까지 파탄을 내고 있는 이 정권을 두고 한국당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좌파가 경제·안보·외교·국민통합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조국이라는 자살골까지 연달아 넣고 있는데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한국당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영입인사들은 왜 그 모양이고, 이 판국에 표창장은 또 무엇인가? 자칭 타칭 보수라는 세력들, 나라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왜 하나로 통합해서 힘을 합치지 못하는 건가?

    이대로 가면 내년 총선은 불 보듯 뻔하고, 선거 이후의 세상도 뻔한 것 아니냐고 하는 대목에서 저는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보수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국회의원과 광역시장을 했던 사람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형이 토해내던, 정말 말이 아니라 속마음을 토해내듯 한 말들이 칼날처럼 느껴졌습니다. 아프고, 쓰렸습니다. 그날 저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습니다. 이 편지는 그날 형에게 드렸어야 하는 답이라 여겨주십시오.

    K형!

    물론 압니다. 한국당을 향한 그 지적에는 애정과 기대와 희망이 담겨있다는 것을요. 왜 좀 더 잘하지 못하는가 하는 간절함이 그 출발점이라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그러기에 한국당에 몸담고 있는 저는 더 죄송하고 그 지적이 더 많이 아픕니다. 사실 어떤 때에는 좌파정권에 과도하게 기울어진 대부분의 언론이 쏟아내는 무조건적 공격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 같아 억울하다고 여길 때도 솔직히 있지만, 한국당이 욕을 먹는 이 현실은 기본적으로 한국당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습니다.

    국민들께서 맡겨주신 권한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엄한 꾸지람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국회의원 총선에서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어지는 지방선거에서도 연이어 국민들의 가혹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성찰하고 노력하고 분투해야 할 한국당이 아직도 영 미덥지 못하다는 지적에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탕자의 귀향'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으로 봐주셨으면

    그렇지만 오늘 저는 야단 맞을 각오를 하고 ‘한국당은 왜 이 모양이냐’ 하던 형의 질문 아닌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지금 한국당은 탄핵이라는 거센 폭풍을 만나 난파당한 후에 겨우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는 중입니다. 이제 겨우, 정말 겨우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 앞가림도 못하던 못난 자식이 그 많던 가산을 탕진하고 나서 커다란 후회를 하면서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 용서를 구하는 탕자가 문득 생각납니다. 성경을 펴 ‘탕자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비유를 그림으로 표현해 유명한 작품 <탕자의 귀향>을 남겼지요. 집을 나가 방탕한 삶을 살다가 부모님께 돌아와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눈길과 손길에 렘브란트는 용서와 따뜻한 사랑을 담았습니다. 그림을 모르는 저 같은 사람의 눈에도 아버지의 사랑이 보일 정도이니 렘브란트는 정말 대가입니다.

    "자유우파, 서로에게 상처내는 배신자 프레임 벗어나야"

    K형!

    형의 질문에 저는 이 그림을 머릿속으로 감히 떠올려 보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렸지만 다시 일어서려는 자식은 용서와 사랑이 얼마나 그립고 간절하겠습니까.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고, 못난 자식이 효도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직 한심하고 답답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제대로 해보려 힘껏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임 대통령에 대한 탄핵 때 무엇을 했느냐를 따질 때가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배신자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라가 지금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함께 해야 한다는 자유우파 국민들의 시대적 명령에 부응해, 황교안 대표가 야권 대통합을 외치면서 한국당과 자신의 기득권도 내려놓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통합과정에서 부딪힐 수많은 위험을 모두 감수하겠다는 굳센 각오가 없이는 결코 선언하기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고 봅니다.

    저는 자유우파가 대통합을 이루고 과감한 인적 혁신을 단행해 국민 눈높이에 맞춘 인재등용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적극 응원하려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형이 격려하고 힘을 보태주면 어떨까 하고,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올 것입니다.

    저는 그런 간절한 기도로 이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 김기현 전 울산광역시장(17·18·19대 국회의원, 전 새누리당 정책위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