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압송악법 파동의 현재와 내막⑧- '폭력배 등장'으로 시민 분노 극에 달해
  • ▲ 26일 홍콩 공항에서 열린 항공업계 종사자 시위 (위) 와 시내 병원에서 열린 의료업계 종사자 시위 (아래).ⓒ허동혁
    ▲ 26일 홍콩 공항에서 열린 항공업계 종사자 시위 (위) 와 시내 병원에서 열린 의료업계 종사자 시위 (아래).ⓒ허동혁
    홍콩에서 중국으로 범죄 용의자 송환을 가능하게 하는 ‘도주범조례’(일명 중국압송악법) 파동과 관련, 지난 21일 폭력배의 시민 폭행사건이 벌어진 옌롱(元朗)에서 27일 28만8000명(주최 측 추산)이 참가한 시위가 열렸다. 이는 홍콩 도심 이외 지역에서 역대 최대 참가인원이다. 국내 언론은 옌롱(Yuen Long)을 중국어(북경어) 표기인 ‘위안랑’이라고 보도했는데, 광동어가 공용어인 홍콩에서는 중국어 표기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시위대는 지난 22일 사망한 중국 톈안먼사태 발포명령자 리펑(李鵬) 총리 추도식 또는 불교행사를 연다는 명목으로 시위 개최를 홍보했다. 이는 27일 시위 주최 측이 경찰로부터 ‘시위 불반대 통지서’를 발급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집회를 열지 않았으면 한다’는 의미로 집회 금지를 뜻하지 않으며, 추도식 또는 종교집회는 신고가 필요 없다.

    폭력배와 경찰이 결탁했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나오며 현재 홍콩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26일 홍콩공항에서 열린 항공업계 시위에는 1만5000여 명이 참여해 11시간 동안 진행됐다. 또한 시내 병원에서 열린 의료업계 시위에는 1500여 명이 참가했다. 이는 평소 업계 시위의 수 배 내지 수십 배에 달하는 수치다.

    정부 내부에서도 불협화음이 나온다. 26일 매튜 청(張建宗) 정무사 사장(총리)은 기자회견에서 경찰이 폭력배에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점을 사과했다. 이에 일부 경찰은 익명으로 “매튜 청은 경찰을 대표하지 않으며, 경찰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비난했다. 또한 정부 기관지인 <대공보(大公報)>와 <문회보(文匯報)> 일부 기자들은 익명으로 ‘시위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냈다.

    시위 참가자들과 민주파 의원들은 최근 확산하는 중국군 개입설에 개의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필자는 홍콩 주둔 중국군이 훈련 중이라고 보도된 시간, 부대 주변에서 함성을 들었으며, 중국 선전 거리의 경찰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확실한 정보를 접했다.
  • ▲ 27일 홍콩 옌롱(元朗) 시위 행진장면.ⓒ허동혁
    ▲ 27일 홍콩 옌롱(元朗) 시위 행진장면.ⓒ허동혁
    한 시민은 필자와 인터뷰에서 “중국군이 개입하면 이에 맞서 싸울 것이다. 홍콩은 우리 집인데 어딜 감히 들어오느냐”고 말했다. 또한 본토파(本土派, 민주파와 달리 홍콩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계파)로 분류되는 쳉충타이(鄭松泰) 입법회 의원은 옌롱 시위 현장에서 필자에게 “중국군 개입은 홍콩의 국제도시 위상과 일국양제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옌롱 시위에서 주최 측은 일부 폭력배가 거주하는 마을(村屋)에는 진입하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시위대는 이 마을을 포위했다. 이 마을 광장에는 시위 당일 흰색 티셔츠, 흰 헬멧과 쇠막대기를 든 폭력배 여러 명이 서성거렸지만, 시위가 시작되자 자취를 감췄다. 이후 시위대는 한 폭력배 소유 차량을 급습했는데, 이 차량에서 곤봉과 일본도, 그리고 중국 군모가 발견됐다.

    폭력배가 옌롱 등 마을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데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광동성은 구릉이 많은 지형으로, 구릉 사이에 형성된 마을마다 배타적 문화를 지니며, 사용 언어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북송(北宋)시대에 형성된 옌롱도 이런 마을 중 하나다.

    지금도 홍콩의 오래된 마을에는 방어를 위한 성벽 형태의 주거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옌롱 역시 지역 방어적인 문화가 있다. 1898년 영국에 편입됐을 때 옌롱 주민들은 영국군에 대항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홍콩 점령 때 옌롱은 항일운동 기지가 되어 수많은 주요 인사를 중화민국 지역으로 탈출시켰다.

    시위대는 폭력배들을 응징하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27일 양측의 충돌은 없었다. 옌롱 지하철역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역 주변의 식당에 폭력배들이 모여 있다는 정보만 전해졌을 뿐이다.

    대신 시위대는 오후 3시에 시작된 시위에서 다시 한번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시위대는 폭력배와 싸움에 대비해 방호복, 등산용 스틱과 대나무 곤봉을 들고 나왔으며, 경찰에 벽돌을 던지는 과정에서 폭력배 마을 민가가 일부 파손됐다.
  • ▲ 셩완(上環) 마카오 페리 터미널 주차장 5층에서 시위대를 향해 고무총을 발사하는 경찰ⓒ허동혁
    ▲ 셩완(上環) 마카오 페리 터미널 주차장 5층에서 시위대를 향해 고무총을 발사하는 경찰ⓒ허동혁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총을 쏘며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기자들을 향해 고무총을 발사했으며,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이 양로원 건물로 날아가 노인들이 고통을 겪었다. 이후 시위대는 오후 10시쯤 옌롱역 구내에서 소방 호스와 소화기를 들고 경찰과 대치했다. 이때 기동대(PTU)가 출동해 시위대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곤봉으로 구타했다. 한 중년 남성은 PTU에 구타당해 머리에서 피를 흘렸다. 이후 시위대는 28일 센트럴 시위에 대비하자며 자진해산했다.

    28일 오후 3시에 시작된 센트럴 시위는 당초 중국 정부의 홍콩출장소인 ‘중앙인민정부 홍콩연락판공실(중련판, 中聯辦)이 목표라고 알려졌지만, 시위대는 센트럴에서 동서 양쪽으로 갈려 쇼핑타운인 코즈웨이베이와 중련판으로 향했다. 경찰은 지난 21일 시위에서 중련판 건물이 훼손된 데 대한 중국의 비판이 부담된 듯, 오후 7시부터 4시간에 걸쳐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대 해산을 시도했다. 이 영향으로 시위장소 인근 항구의 홍콩 - 마카오 간 페리 운항이 중지됐다. 이날 시위대 중 49명이 체포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렇게 경찰은 폭력배에게는 관대하지만 시민 시위대에게는 강견진압 방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경찰은 기본업무인 치안에 실패하면서도 “시위 진압하느라 폭력배에 대응을 못했다”는 핑계만 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