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대가리“도올 김용옥” 발언을 KBS에서 듣고
  •   한신대 석좌교수라는 도올 김용옥이란 자가 엊그제 KBS 방송에 나와서 "소련이야말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미국이 분할 점령을 제시한 것에 대해서 소련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한반도를 (한 나라로) 독립시키는 것이 좋다고 했다"는 무식한 소리를 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미국의 '괴뢰'였다며 "국립묘지에서 (유골을) 파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다르다.

    소련군은 1945년 8월26일 평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38선을 봉쇄하고 남북한 철도, 전화, 조선인들의 남북한 왕래를 금지시켰다.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오자마자 38선부터 봉쇄한 것은 소련이 처음부터 38선 이북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 계획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소련군이 38선 이북에 진주한 후에는 러시아에서 데려온 러시아말을 잘하는 조선인들을 요소 요소에 배치하여 주요 행정을 맡겼고 소련군의 배후 조종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북한 전역에 쏘비에트式(식)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나갔다. 이 인민위원회들은 처음에 조만식을 지도자로 하는 민족진영 인사들과 공산당원들이 반반씩 섞여 조직되었으나 9월 19일 소련군 대위 김일성과 그의 동료들이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오자 점령군은 외세에 의한 한반도 5년간 신탁통치를 반대한 조만식 일파를 몰아내고 김일성을 중심으로한 공산주의 정권 창출에 나섰다. 2차 세계대전 후 소련군이 들어갔던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항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은 전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1945년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분할된 경위는 이러하다.

    우선, 1945년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지게 된 경위를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아보자.

    38선이 그어질 당시의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1955년 출판한 회고록 "Memoirs by Harry S. Truman" (트루먼 회고록)의 444∼445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다.

    " ......내가 듣기로는 번즈 국무장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멀리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라고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에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육군은 한반도로부터의 먼 거리와 병력 부족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한반도의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하지 않겠느냐고) 소련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파견하기에는 38도선도 사실은 너무 멀리 잡은 것이었다. 소련이 이의를 제기해서 우리가 실제로 병력을 제때에 보낼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했다면, 그 선은 38도선보다도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부가 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의 옛 수도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38선을 그을) 당시에는 일본의 항복을 받는 일을 양국이 분담한다는 편의성 이외의 다른 생각은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의 이 말을 보충 설명하자면 이렇게 된다.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즉시 일본 본토는 물론, 한반도 내의 일본군으로부터도 항복을 받아야 했는데, 미군은 그때 한반도에서 1000km 남쪽 멀리 오끼나와에 있었고, 또 미군은 주로 일본 본토에 들어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까지 군대를 신속히 보낼 여유가 없었다.

    한편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소련은 신속히 군대를 진입시킬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바로 다음날(8월9일)에는 벌써 함경북도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8월12일에는 청진, 나진, 웅기, 경흥 등을 점령해버렸다. 이런 속도라면 불과 2, 3주 사이에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다 점령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14일(워싱턴 시각) 밤늦게 서둘러 38선을 그어 거기까지만 소련군이 내려오도록 결정하여 소련측에 통고했고, 소련이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왜 하필 38선인가에 대해서는 38선을 그은 당사자인 당시 미국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 소속 딘 러스크(Dean Rusk) 육군중령 (후에 Kennedy와 Johnson 대통령 밑에서 국무장관 역임)의 말을 들어보자. 1990년에 출판한 그의 회고록 "As I Saw It" (내가 본대로) 124 페이지에 이렇게 적혀있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있는 일본군으로부터 언제 어디서 항복을 받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국무부와 국방부는 의견이 달랐다. 국무부는 중국 본토의 가능한 한 북쪽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 만주의 주요 지점들이 우리 점령지역에 들어가도록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육군은 장래를 염려하여 우리 군대가 아주 조금 있거나 거의 없는 지역들은 아예 책임지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은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육군은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시아 대륙에 상징적으로 군대를 좀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한반도에 발판 같은 걸 하나 마련해 두기로 합의했다.

    일본이 항복한 바로 그 날인 (미국 동부시각) 8월14일 늦은 밤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장) 찰스 본스틸 대령과 나는 (국무부, 국방부, 해군이 합동회의를 하고 있던 회의실)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한반도 지도를 자세히 보았다.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이 점령할 지역을 선택해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National Geographic 잡지사가 만든 지도 한 장을 놓고 우리는 서울 바로 북쪽에서 한 편리한 경계선을 찾았으나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북위 38도선을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스윙크(국무부, 국방부, 해군 협의회)는 우리 건의를 별다른 이의 없이 받아들였고, 놀랍게도 소련 역시 이의 없이 동의했다. 당시 미·소 양국 군대가 위치한 지점을 고려한다면 소련이 38도선보다 훨씬 더 남쪽의 선을 요구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러스크의 이 증언을 보면, 일본과의 4년간 전쟁에 지친 미국 군부는 아시아 대륙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싫어했으나 국무부가 우겨서 한반도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한 한반도 북쪽에 선을 그어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으려했다는 것도 알수 있다. 만일 군부의 고집대로 미군이 한반도 진출을 아예 포기했다면 한반도 분단은 없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김정은 독재 밑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38선이 그어지고 소련군보다 한달 늦게 38도선 이남에 병력을 상륙시킨 미국은 한반도에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으나 소련의 비협조 때문에 38선이 서서히 남북한의 정치적 경계선으로 굳어버리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시 국무장관 James Byrnes는 회고록 “Speaking Frankly"("솔직히 말하면") 222∼223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군사적 편의를 위해 그어진 선이 소련과 미국의 점령지역 경계선으로 굳어져버렸다. 그래서 우리 대표단은 (모스크바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의) 통화, 상거래, 교통, 전신, 전력배분, 연안 항해 등의 행정상의 문제를 단일화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하였다. 우리 대표단은 또 조선인들이 효과적인 독립 대의(代議)정부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기간 동안만 존속될 (미국, 영국, 국민당 정부의 중국, 소련) 4개국 신탁통치를 제안했다......

    그러나 "신탁"은 조선인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준 외세의 지배를 연장하는 것이고, 또 오랫동안 갈구해온 독립을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신탁통치안에 대한 (조선인들의) 불만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조선인들의 민주적인 임시정부와 같이 일을 하다보면 신탁통치는 없어도 되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반도가 국제사회에서 자주적인 회원국이 되는 날을 앞당기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불행히도 이러한 우리의 희망은 그 후 일어난 일련의 사태로 인해 깨지고 말았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모스크바 협정을 이행하기 위해 1946년 1월 회의를 열었으나 우리에게는 분명한 의미로 전달되는 것들이 또다시 소련에게는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한반도가 경제적으로나 행정상으로 단일체이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점령군) 사령관은 완전히 분리된 두 점령지역 상호간의 교환과 조정의 문제로 간주하였다. 1년 6개월이 지난 오늘 현재, 남북은 여전히 분리된 지역으로 남아있고, 임시정부 수립 노력은 또한 매우 실망적인 진척을 이루었을 뿐이다.

    소련대표는 신탁통치안을 반대하지 않은 (조선인) 정당들만 임시정부 구성에 관여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조선인들은 신탁통치안을 반대했었다. 언론 자유의 원칙에 따라 (신탁통치안에)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는 이유로 (임정 구성에) 관여를 못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주장했다. (임정 구성을 위한 회의에) 모든 정당 대표들을 참여시키자고 우리가 고집하자 미·소 공동위는 1946년 5월 교착상태에 빠진채 산회되었다.....

    소련 점령지역(북한)에서는 10만 내지 40만명으로 추산되는 조선군대를 소련 군대가 훈련시켰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해체되고, 미·소 양국 군대가 한반도에서 철수하면 소련이 훈련시킨 이 군대가 한반도에 남는 유일한 군대가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떤 정부가 한반도에 들어서든 간에 이 군대가 그 정부를 좌지우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소 공동위원회가 해체되기 전에 먼저 이 군대가 해체되어야 한다. 한반도에는 소련이 훈련시킨 군대도, 미국이 훈련시킨 군대도 필요하지 않다. 한반도에 필요한 것은 경제 원조이다....소련 점령군 사령관은 북한의 비료를 남한으로 수송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므로 남한의 피폐한 농지에 생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남한은 당장 외국에서 비료를 수입해야하는 실정이다. 한반도의 생산 공장들은 재건되어야 한다. 석탄과 원료도 필요하고 기계 부품도 필요하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2, 3년 더 존속하고 우리 미국인들이 경제 원조 행정을 담당한다면, 미국은 한반도의 공장 재가동을 위해 필요한 모든 원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보충 설명을 하자면, 미국은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임시정부를 세우려고 했으나 처음부터 38선 이북을 자기네 위성국으로 만들 생각이었던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키고 북한에 조선민주당(조만식)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김일성)의 연정을 세웠으나 조만식 선생이 강대국 신탁통치를 결사반대하자 그를 호텔에 연금시키고 신탁통치에 찬성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만들어주었다. 소련은 이때 이미 동유럽 여러나라도 자기네 위성국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워싱턴에서
    조화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