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층 서기실의 암호〉 출간, 장성택 고사포 처형한 잔인한 인물… 비핵화 의지 있을까
  • ▲ 태영호 전 주영북한공사. ⓒ도서출판 기파랑 제공
    ▲ 태영호 전 주영북한공사. ⓒ도서출판 기파랑 제공

    4·27 남북정상회담 이후로 우리 사회에 잘 기획된 '김정은 바람'이 불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로 북에 다녀온 우리 정부 인사는 김정은을 향해 "배려, 리더십, 여유, 숙성된 고민, 솔직하고 대담" 등으로 표현했다. 언론은 한 술 더 뜬다. 정상회담 이후 김정은에 대해 "귀엽다" "솔직하고 담백하다" "알고보니 좋은 사람"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 "소탈하게 잘 웃는다" 등 찬양 일색의 평가가 쏟아지고 있다.

    '판문점 생중계'라는 형식으로 꾸며지고 연출된 김정은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 모습은 어떨까.

    이에 대해 우리 사회에 태영호 전 주영북한공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정권교체 이후 오랜 침묵을 깨고 14일 오후 기자간담회에 나선다. 〈3층 서기실의 암호〉(태영호 지음,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544쪽, 2만 원) 출판 기념이다. 책 내용을 통해 그가 기자간담회에서 설명할 북한 김정은의 실체에 대해 접근해본다.

  • ◆자라양식공장 현지지도 마치며 "지배인 처형하라" 한마디에

    태영호 전 공사는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김정은의 현지지도 중 일어난 하나의 일화를 담담히 소개함으로써 그의 실제 모습을 독자에게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2015년 5월, 김정은이 자라양식공장을 현지지도했다. 공장의 현황은 말이 아니었다. 새끼 자라는 거의 죽어 있었다.

    공장 지배인은 전기 공급과 사료 부족을 이유로 들었다. 이를 들은 김정은은 화를 내며 "전기·사료 문제 때문에 생산을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넋두리"라고 심하게 질책했다. 수행하던 고위 간부들도 고개를 떨군 채 지시를 받아쓰기에만 급급했다.

    돌아오는 차에 오르면서 김정은은 "지배인을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자라양식공장 지배인에 대한 총살은 그 즉시 집행됐다(p. 519).

    "소탈"과는 전혀 상반된 이같은 모습은 김정은이 당의 고위 간부들을 다루는 모습에서 보다 여실히 드러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 대선후보를 사실상 확정지었던 2016년 5월 17일, 그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과 대화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시사했다.

    때마침 북한을 방문 중이던 영국 통신사 기자는 이튿날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부위원장과의 인터뷰가 예정돼 있었다.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발언에 대한 평가를 묻자, 양형섭 부위원장은 "우리는 대화 자체는 반대하지 않는다"며 "대화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 '우리는 언제나 대화에 임할 준비가 돼 있다'는 외무성의 사전 원고 취지에 맞춰 대답한 것이다.

    하지만 이 발언이 보도되자, 보도를 접한 김정은이 즉각 김계관 외무성 1부상에게 전화를 걸어 불같이 화를 냈다. 김정은은 "그 늙은이가 어떻게 내 승인도 없이 트럼프와 대화에 임하겠다고 말하느냐"며 "나를 대표해서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줬느냐"고 질책했다.

    나아가 "나는 조선의 지도자이고, 트럼프는 대통령도 안 된 후보인데 급이 같지 않다"며 "외무성이 그 늙은이에게 그리 말하라고 써줬느냐"고 김계관 부상을 추궁했다. 양형섭 부위원장은 1925년생으로 자신의 조부인 김일성의 사촌매부인데도, 시종일관 '늙은이'라고 칭하며 화를 낸 것이다(p. 520).

  • ▲ 태영호 전 주영북한공사가 〈3층 서기실의 암호〉를 펴냈다. ⓒ도서출판 기파랑 제공
    ▲ 태영호 전 주영북한공사가 〈3층 서기실의 암호〉를 펴냈다. ⓒ도서출판 기파랑 제공

    ◆장성택 고사총 처형, 어릴 때 할아버지 못 만나게 해서?

    북한 김정은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자신의 고모부 장성택 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을 고사총으로 처형한 사실이다.

    태영호 전 공사는 '김일성 흉내내기'를 하고 있는 김정은이 막상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는 권력적 컴플렉스의 관점에서 해석해 눈길을 끈다.

    태영호 전 공사에 따르면, 김정은은 어릴 때부터 고모부 장성택 전 부장에게 원한을 가졌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는 김정철~김정은 형제 중 한 명이 권력을 승계하지 않으면, 결국 온 가족이 숙청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 생전에 아이들을 인사시키고 인정을 받으려 했으나, 이걸 가로막은 게 김경희~장성택 부부라는 설명이다.

    추후 권좌에 오른 김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는 손자 신세가 된 것에 분통이 터졌다. 김일성과 나란히 찍힌 사진이 한 장만 있었더라도, 스스로 백두혈통이라고 백 번 외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이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장성택 전 부장을 미워했으며, 장성택 부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을 것이라는 게 태영호 전 공사의 분석이다(p. 327).

  • ◆DJ 비웃은 김정일… 김정은은 지금 누굴 비웃고 있을까

    우리 국민들이 김정은의 실제 모습과 성격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가 4·27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에서 공언한 '비핵화'를 실천할지가 궁금해서일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태영호 전 공사의 생각은 분명하다.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p. 241~242)이라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태영호 전 공사는 북한이 그간 핵과 관련해 '시간끌기'와 기만극으로 일관했던 과거의 실제 사례를 풀어내 설득력을 더했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에서, 우리나라와 미국은 북한에 경제적 보상으로 경수로를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합의문을 접한 북한 전력공업성 간부들은 "외무성이 합의를 잘못했다"며 집단반발했다. 이들은 "합의문에 변전소에 관한 내용이 없다"며 "변전소는 무슨 돈으로 짓느냐"고 성토했다.

    그러자 외무성은 "시간을 벌기 위해 사기를 치고 있을 뿐"이라며 "모르면 가만히나 있으라"고 일축했다(p. 54).

    북한의 외교 사기극은 핵 뿐만 아니라 인권 문제를 둘러싸고서도 번번이 자행됐다. 태영호 전 공사는 서방 국가의 수반 중에서 실제로 방북한 최고위급 인사인 요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와 관련한 일화를 풀어놓았다.

    2001년 5월, 요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는 현직 서방국 수반으로는 최초로 평양을 찾아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담을 가진 직후, 김정일은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김정일은 "페르손 총리에게 EU와의 인권 대화를 약속했다"며 "물론 절대 허용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대화도 하지 않으면 유럽이 기승을 부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럽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미국의 강경보수파를 눌러놓을 수 있다"며 "유럽을 얼려(속여)넘기는 대책을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강석주 부상은 "예비접촉과 인권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몇 년간 시간을 끌어보겠다"고 대답했다(p. 177).

    이 대목에서 김정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웃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고 태영호 전 공사가 펴낸 책에 나온다.

    김정일은 "페르손 총리가 내게 서울 답방 문제를 꺼내더라"며 "김대중 대통령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인 듯 하다"라고 정확히 짚어냈다.

    그러더니 "김대중 대통령은 아직도 내가 서울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라며 "참 어리석다"고 비웃었다는 것이다.

    4·27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판문점 선언'을 이끌어낸 김정은은 지금 후속 지시를 내리면서, 과연 누구를 비웃고 있을 것인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은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