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배우 줄줄이, 문화권력의 추악한 민낯 "곪은 게 터졌다"
  • ▲ 왼쪽부터 이윤택 연출가, 배우 조재현, 윤호진 에이콤 대표.
    ▲ 왼쪽부터 이윤택 연출가, 배우 조재현, 윤호진 에이콤 대표.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따로 없다. 고은, 이명행, 이윤택, 오태석, 조민기, 조재현, 윤호진, 한명구, 배병우 등 최근 성폭력으로 큰 충격을 안겨준 이들을 생각하면 '사람 얼굴을 하고 있으나 마음은 짐승이다'라는 이 사자성어가 절로 떠오른다.

    지난해 10월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의 잇따른 성추행에 대한 폭로가 터지자 배우 알리사 밀라노는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당한 적 있는 여성들은 '미투(me too)'를 써주시기 바란다. 많은 사람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에서 사회 성범죄를 고발하는 '미투'(MeToo, 나도 말한다) 운동은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폭로 이후 사회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고은 시인, 이윤택·오태석 연출가에 이어 배우 조민기·오달수·조재현과 뮤지컬계 대부 윤호진까지 논란의 선상에 오르며 문화예술계에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최영미(57) 시인은 계간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발표한 시 '괴물'에서 고은(85) 시인을 'En'으로 지칭하며 후배 작가와 편집자 등을 성추행했다고 털어놨다. 배우 이명행은 최근 성추행 논란으로 출연 중인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중도 하차했다. 그가 과거 공연에서 스태프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연극 관련 커뮤니티 등을 중심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국내 연극계를 이끌어온 이윤택(66)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저지른 성폭력은 대한민국을 들끓게 만들었다. 극단 미인의 김수희 대표가 지난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연출가에게 성추행 피해 경험을 밝힌 것을 시작으로 연희단거리패 옛 단원들의 미투 고백이 쏟아졌다. 이 연출은 19일 공개사과에 나섰지만 기자회견에 앞서 불쌍한 표정 연습 등 리허설까지 했다고 내부 단원이 폭로해 거센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연극계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리는 원로 연출가 겸 극작가 오태석(78)은 성추행 논란을 무마하기 위해 자신이 대표로 있는 극단 목화 단원과 대책회의를 하고 피해자와 접촉했다. 그는 15일과 18일 성추행 피해 폭로가 이어진 뒤, 극단과 입장 발표를 하겠다고 했지만 극단과도 연락을 끊고 잠적한 상태다. 오태석은 1984년 극단 목화를 설립하고 다수의 작품을 선보였으며, 2014년에는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 오태석 극단 목화 대표.ⓒ연합뉴스
    ▲ 오태석 극단 목화 대표.ⓒ연합뉴스
    조민기는 과거 청주대학교 교수 재직 시절 제자들을 상대로 성추행을 했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청주대 연극학과 졸업생들의 폭로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 졸업생이 밝힌 조민기의 매뉴얼에서 첫 번째 여학생 혼자 오피스텔에 두지 말 것, 두 번째 여학생 호출시 남학생을 꼭 대동해서 갈 것, 세 번째는 남학생은 그곳에서 술에 취하지 말 것이다.

    23일에는 배우 조재현에 대한 성추행 의혹이 불거졌다. 앞서 한 매체는 2013년 방송 스태프로 일했던 20대 초반 여성 A씨가 "유명 배우이자 연극 제작자인 J씨가 방송 현장에서 몸을 더듬었다"며 "J씨가 강제로 입을 맞추고 가슴과 다리를 만졌다"고 폭로한 사실을 알렸다. 조재현은 24일 입장문을 통해 "저는 죄인이다. 이제 모든 걸 내려놓겠다"며 뒤늦은 사과를 하고 출연 중인 tvN 드라마 '크로스'에서 중도 하차하기로 했다.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 '영웅' 등을 제작한 윤호진 에이콤 대표(71)가 성추행 의혹을 모두 인정했다. 윤 대표는 24일 사과문을 통해 "피해자분의 입장에서, 피해자분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과드리겠다. 저의 거취를 포함하여 현재 상황을 엄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무겁게 고민하고 반성하겠다"고 전했다. 또, 오는 28일 예정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담은 뮤지컬 '웬즈데이'의 신작 제작 발표회를 무기한 연기했다. 

    '성폭력'은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행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성을 매개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이뤄지는 모든 가해행위'를 뜻한다. 대검찰청의 2016 범죄분석에 따르면 2015년 성폭력 범죄는 3만1063건 발생했다.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2016 성폭력 실태조사(이하)에서 2.2%의 피해자만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나타났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피해자가 '피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서'(50.1%)이다. 다음으로 '피해자가 신고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20.9%), '증거가 없다는 점(10.5%)'이 뒤를 이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통계조사에 의하면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아는 사람인 경우는 87%다. 많은 경우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어 때로는 역으로 명예훼손, 무고로 가해자의 입장에 놓인다.

    문화예술계에서 성폭력 문제가 빈번한데도 묵인돼 온 이유는 평등한 수평적 관계보다는 수직적인 상하 권력구조와 연관이 깊다. 이런 상하관계 속에서 발생되는 성폭력 문제는 피해자에게는 거대한 골리앗과의 싸움으로 힘겹게 다가올 수 있다. '피해 이후의 삶'을 두려워하며 신고를 망설이게 된다. 무엇보다 성폭력 피해 예방과 함께 피해자의 신고가 당연히 행사돼야 할 떳떳한 권리가 될 수 있도록 사회적 공감대가 이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