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제의 신간 [언론인 춘원 이광수] 
    정진석 지음, 기파랑 발행 (2017, 값 20,000원)

    계몽주의 논객의 반역적 선언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2.28.~1950.10.25)는 사랑과 비판을 동시에 받는 인물이다.
    근대문학의 텃밭에 첫 씨앗을 뿌린 개척자 이광수는 1930년대 중반까지 민족개조를 주장하고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한편으로 수양동우회 운동을 벌였던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가난과 불우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평생 중병을 앓으면서 수많은 글을 쓰다가
    일제 경찰에 구속되어 재판 받는 과정에서 변절하여 친일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광수는 문인 가운데 가장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100년 전에 근대문학의 효시 ‘무정’을 발표한 이후 춘원연구학회가 창립되던 2007년 9월까지 단행본 50여권, 학위논문 270여 편, 각종 학술논문과 단평 800여 편이 나왔다. 2002년에는 '이광수 문학사전'(한승옥, 고려대학교 출판부)도 출간되었다. 그 후에도 국내와 일본 미국에서 많은 연구가 축적되고 있다. 연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 자신의 그림자에 가린 이광수의 언론활동

    문인 이광수와 문학적 업적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언론인이자 논객으로 활동했던 사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무정’을 발표하던 1917년에 이광수는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일어)
    특파원 자격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현지 취재하면서 르포기사 「오도답파여행기(五道踏破旅行記)」를 두 신문에 2개월 넘게 연재하였다. 그보다 먼저 1914년에는 러시아 치타에서 교민들이 창간한 ‘대한인정교보(大韓人正敎報)’의 주필을 맡았던 적도 있었다.
     이광수는 일찍부터 언론의 계몽적 기능과 정치적 영향력에 주목했다.

    그는 문인보다는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를 바랐다.
    “문장을 한 무기로 하려고는 (생각)하였지만 시나 소설을 지으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는 것이다. “원체 소설을 쓰는 것으로 일생의 업(業)을 삼으려는 생각은 없는데다가 글을 쓰려면 사상평론이나 쓰랴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내게도 정치적 관심이 도리어 주(主)가 되었던 것이다.”
    이광수에게 소설은 부기(副技)이자 여기(餘技)였다.

    본격적인 언론활동은 상하이에서 ‘독립신문’ 사장을 맡은 때부터였다.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두 차례, 조선일보 부사장 겸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언론과 문학의 경계를 가르지 않고 활동했다. 역사소설 「이순신」은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직 시에
    아산 현충사 유적보존운동을 벌이면서 연재했고, 「흙」은 전국적인 농촌계몽, 문자보급운동의
    신문 캠페인 소설이었다.

    그는 언론과 문학활동을 동시에 수행했지만 문학적 업적에 가려서 언론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광수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던 최남선, 홍명희도 언론인으로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문인으로만 알려져 있는 것도 비슷하다.

    독립신문 사장, 동아 조선 두 민족지 편집국장

    언론사 연구의 권위자인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언론인 이광수’의 언론활동을 실증적으로 깊이 있게 추적한다. 이광수라는 인물을 통해서 일제 강점기 한국 언론사에 의외로 알려지지 않았던 모습을 밝혀낸다.

    당대 최고의 행동하는 지성인 이광수는 시골의 가난한 환경에서 양친을 여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역경을 헤치고 일본 유학이라는 가장 높은 교육환경을 경험했으며 만주, 중국 베이징, 상하이,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치타까지 가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직접 만났다.
     1919년에 도쿄 유학생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뒤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였던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수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소설과 신문 고정칼럼 집필자였던 이광수는 남다른 경륜과 문장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다. 우리말과 한글의 우수성을 예찬하고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광수는 보고 느낀 현실을 글로 써서 남긴 역사가였고, 천재적인 문인이자 선구적인 언론인이었다. '춘원연구'를 쓴 김동인은 말한다. “조선의 소설가 가운데서 그 지식의 풍부함과 그 경험의 광범함과 교양의 많음과 정력의 절륜함과 필재의 원만함이 춘원을 따를 자 없다.”

    저자 정진석 교수는 일본 경찰의 비밀 기록과 신문 잡지를 조사하고 이광수의 글을 빈틈없이 찾아내어 언론활동을 추적했다. 이광수는 기행문과 회고록으로 자신의 행적을 기록하거나 스스로를 소설의 모델로 삼기도 하고, 잡지의 설문과 인터뷰에 응하면서 밝힌 경우도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반 대중에게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었고, 소설 보다 더 흥미로운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 이광수 전집(삼중당, 우신사) 20권이 나와 있지만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라도 가능한대로 발표 당시의 지면을 찾아보고 인용했다. 전집에는 누락되거나 첫 게재 지면의 내용과 달라진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풍부한 사진과 관련 신문 지면

    특히 이 책의 특이한 점은 풍부한 사진과 그림, 신문 지면 등을 수록하여 이해를 돕는 편집이다. 젊은 시절부터 광복 이후까지 이광수의 사진을 연대순으로 배치하여 화보의 역할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진을 통해서 그의 일생을 살펴보도록 하는 동시에, 그의 소설 연재와 관련된 ‘사고’와 기사 지면을 많이 실어서 그 시대의 언론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문학사와 언론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이광수의 언론활동은 1937년 6월 7일 동우회의 주동인물로 경찰에 구속된 이후에 완전히 단절되었다. 문학 활동은 제한된 상태로나마 가능했지만, 이때부터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론활동을 할 수 없었다. 언론인 이광수를 살펴본 이 책도 거기서 끝이 난다.

    이광수는 1940년 2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창씨와 나」를 실어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라는
    일본 이름으로 창씨 개명한 이유를 공개하고 친일의 길로 들어섰다.

    함석헌의 이광수 평가

    함석헌은 말한다. 이광수는 우리 민족을 위해 울고 이 나라를 위해 슬프게 힘 있게, 우렁차게 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광수는 울기만 했던 인물은 아니다. 조선을 문명의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장기적인 경륜을 품은 경세가(經世家)였다. 그는 몸으로 실천했다. 상하이로 가서 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붓을 들어 ‘언전(言戰)’의 선두에서 싸웠고, 흥사단-수양동우회를 통해 민중의 역량을 기르는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문자보급, 농촌계몽운동을 설계하고 진두지휘했다. 그러면서 글을 써서 운동의 취지를 선전하고 실천을 독려했다.

    그랬던 이광수였지만 친일로 돌아선 이후의 행적은 비판받지 않을 수 없다.
    함석헌은 이광수와 최남선을 비판하고 통탄하면서도, 비난만 하지 말고 민족 전체가 반성할 것을 촉구한다.

    “육당•춘원의 생애는 하나님의 이 민족에 대한 심판이다. 너희 성의와 너희 지혜와 너희 용기가
    요것뿐임을 알아라, 하는 판결문이다. 그러므로 민중은 자기 가운데 서는 인물에서 자기상(自己像)을 읽어내어 반성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칭찬만 하면 그것은 우상숭배요, 개인적으로 비평만 하면 그것은 자기를 속임이며 자기를 낮추는 일이다. 민중은 인물을 떠받들 뿐만 아니라 비판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요, 엄정하게 비평할 줄만 알 뿐 아니라 용서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예로부터 인물 대접할 줄을 모른다. 그것이 우리의 국민적 성격의 큰 결함이다.
    나라가 쇠한 큰 원인의 하나는 인물 빈곤이다. 비판을 하되 가혹하고 도량 좁은 제재를 가하지 말아야한다. 그래서는 사회가 건전한 발달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