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천 만 구원의 밀알이 된 이승만의 한성감옥
    김성욱 /리버티헤럴드 대표
     
고난이 꼭 저주는 아니며 형통이 반드시 축복은 아니다.
역사적 거인의 고난은 오히려 수 천만 구원의 축복이 되기도 한다.
이승만은 1899년 24세 때 고종 폐위(廢位) 사건에 휘말려 사형(死刑) 선고를 받았다.
어릴 때부터 신동과 천재로 불렸던 그였다.
협성회의보, 매일신문. 제국신문을 창간해 차세대 리더로 이름도 날렸다.
2년 전 배재학당 졸업식 땐 조선의 고위직 관료와 서양의 선교사 등 천 여명 청중들 앞에서
역사 상 최초의 영어 연설도 했었다.
촉망 받던 청년 지도자. 그런 그가 말 그대로 패가망신(敗家亡身)한 셈이다.   

이후 종신형을 확정 받은 이승만은 한 세기가 바뀔 무렵
선교사 에디(Sherwood Eddy. 1871-1963)를 통해 받은 성경을 읽으며 예수를 만난다.
그가 했던 최초의 기도는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원해 준 것처럼 이 민족을 구원해 달라(save my soul save my country)’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더니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며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선교사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갖고 있던 증오감, 그들에 대한 불신감도 사라졌다.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자기들 스스로 대단히 값지게 여기는 것을 주기 위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승만의 영문 투옥경위서(Mr. Rhee's Story of His Imprisonment) 중)”
 
양반 출신 최초로 개종한 이승만은 이원긍·이상재·유성준·김정식·홍재기·김린 등
양반 출신 정치범과 한성감옥 간수장 이중진 등 40여 명에게 전도하였다.
감옥을 복당(福堂)으로 부르며 기도와 예배해 힘썼다. 영어사전도 집필했다.
그러기를 5년7개월. 이승만은 극적인 사면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된다.
그의 자서전 초고 중 일부를 인용한다. 
 
“(···) 죄수 한 사람은 간수들이 오는가 살피기 위해 파수를 섰었고
또 한 사람은 성경 책장을 넘겨주었다. 나는 몸이 형틀에 들어가 있었고 손에 수갑이 채워 있어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 그 안위와 평안과 기쁨은 형용할 수 없었다.
나는 그 감옥에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잊을 수 없다. 6년 반 동안 감옥살이에서 얻은 축복에 대해서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1904년 8월7일 나는 사면을 받고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이승만의 영문 자서전 개요(Rough Sketch : Autobiography of Dr. Syngman Rhee) 중)”
 
이승만이 수감됐던 한성감옥은 악명 높은 곳이었다.
팥밥과 콩나물, 소금국에 연명하며 “자주 고문을 당하고 축사에 가둔 소떼처럼 이리저리
죄수들을 몰아 부치는” 곳이었다. “바구니 속 겹쳐 밀치락달치락 거리는 미꾸라지”처럼
버텨야 했었다(당시 수감자 김형섭(1878-1927)의 글 중).
같이 갇힌 최정식·안경수·권형진·장호익·임병길 등은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승만아. 잘 있거라. 너는 살아남아 우리가 함께 시작한 일을 끝맺어다오”라는 최정식의 마지막 말에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가서 편안히 죽으시오’라고 고함을 질러주는 것이었다”고 이승만은 고백한다.  

나라를 위해 확신을 가지고 했었던 활동에 대한 사회적 정죄와 비난, 언제 처형될 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 믿었던 이들에 대한 원망과 아쉬움, 여기에 불결한 위생과 건강상의 문제까지
덮치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에스겔의 마른 뼈 같은 삶이라 느꼈을 수도 있다. 감옥 밖 선교사들의 기도와 위로가 있었다 하지만, 안식은 짧은 찰나. 또 다시 길고 긴 어둠이 마음을 누르는 법이다.
그러나 절대적 고통은 절대적 신앙의 씨앗이 된다. 생명을 만나면 어둠은 빛으로 변한다. 

이승만은 감옥 안 6년의 시간을 “안위와 평안과 기쁨은 형용할 수 없었고” “그 감옥살이에서 얻은 축복(祝福)에 대해서 영원히 감사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육신은 형틀과 수갑에 채워져 있어도
영혼은 생명을 만났던 탓이다. 심령에 천국이 임하니, 변하는 세상을 보지 않고 불변의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출옥 후 기독교 국가가 조선이 가야할 길임을 믿었다.
<옥중전도>, <예수교에 대한 장래의 기초>, <두 가지 편벽됨>, <교회경략>, <대한교우들의 힘쓸 일> 등의 글을 통해 “기독교 입국론(立國論)”을 설파했다.
이 혁명적인 세계관은 1913년 <한국교회핍박>으로 구체화됐다.
3·1운동 직후 1919년 4월7일 노령에서 가진 임시정부 첫 기자회견에서 공언되고 임시정부 헌장과 1948년 5월31일 초대 국회에서 선언됐다.  

이승만은 불운함 속에서 신앙을 갖게 되었고 40여 년 뒤 신앙의 자유가 꽃피는 나라를 세웠다.
김일성이 북한 땅에 유물론 공산주의 유물론 체제를 세워 지상의 지옥을 만들던 같은 시대,
같은 반도 위에서 이뤄진 일이다. 남한 땅에는 휴전선 이북의 흑암을 거둬낼 복음의 기지가 세워져 열방을 향해 뻗어갈 제사장 나라를 꿈꾸게 되었다. 고난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명의 고통이 수 천 만 구원의 밀알이 된 셈이다.

우리의 생각과 역사의 흐름은 다르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억울해 보이는 고난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선 반대일 수 있다. 형통이 축복이 아니며 고난이 저주가 아닌 경우도 많다.
이것은 어두운 시대를 사는 많은 이들의 시대를 보는 창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