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배’에서 태어난 김치1, 김치5...“제대로 된 역사 가르쳐야”
  • 19일 서울 남대문 세브란스빌딩 광장에서 열린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 ⓒ연세의료원
    ▲ 19일 서울 남대문 세브란스빌딩 광장에서 열린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 ⓒ연세의료원

    '현봉학' 

    19일 오후, 서울 남대문 세브란스빌딩 광장에는 '현봉학'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로베르트 헬문드 주한 미해병대사령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머리가 희끗한 노년의 어르신들까지 국적도 나이도 성별도 서로 다른 500여명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현봉학'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주로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렀다. 

    고(故)현봉학 박사는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12월, 중공군에 밀려 퇴각하는 미군을 설득해 '흥남항'에서 민간인 10만여명을 남한으로 피란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일성 정권의 억압을 피해 자유의 땅 한국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안겨준, 세계 전사(戰史) 상 최대 규모의 민간인 구출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주역이다. 

    이날은 '고(故)현봉학(1922~2007)' 박사의 동상 제막식이 열린 날이었다. 

    '현봉학 선생님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모임'과 연세대 의대 졸업생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 '현봉학 박사 동상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윤도흠 연세의료원장) 등이 후원금과 기부금을 모아 높이 2.5m의 청동재질로 된 전신 동상을 건립했다. 

    현 박사는 연세대 의대의 전신인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미국 버지니아주립대 의대에서 유학한 엘리트 의사였다. 동상건립추진위원회는 현 박사의 모교인 세브란스 의전이 있던 자리에 동상을 세워 그를 기념할 수 있도록 했다. 

    거제 출신인 문재인 전 대표는 "부모님이 그날 흥남부두 철수선에 오르지 못했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현봉학 박사님으로 인해 수많은 피난민이 자유를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현봉학 박사가 많은 이들로부터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리게 된 계기를 되돌아보려면, 66년 전 이맘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날은 제막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증언하듯 "기적의 날"이었다.


    ▶흥남철수작전은 왜 ‘기적’이라 불리는가?

  • 현봉학 박사. ⓒ국가보훈처
    ▲ 현봉학 박사. ⓒ국가보훈처


    1950년 후반기 한반도의 전황은 극과 극을 치달았다. 국군과 유엔군은 9월15일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발판삼아 한때 북중 경계선까지 인민군을 몰아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원산을 점령함에 따라 미군은 해상으로 병력을 철수하는 작전을 세운다. 당시 흥남항을 통한 해상철수만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미군이 흥남으로 이동하는 사이, 그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부두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군은 10만여명에 달하는 군 병력과 50만톤의 장비 및 물자를 실어나르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고, 피난민을 태우는 것은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미군 수뇌부가 결정을 바꾸도록 만든 사람이 현봉학 박사였다. 

    현 박사는 6·25전쟁 당시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미국 유학파로 영어에 능통해 미군 통역장교로 참전했다. 

    미 1군단 민사부 고문이자 통역관으로 있던 현 박사는 피난민 구출을 위해 동분서주 하던 중 알몬드 장군의 부참모장인 포니 대령(작고, 이후 준장 진급)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포니 대령은 현 박사를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에게 소개했고, 현 박사와 포니 대령은 알몬드 소장에게 피난민 구출을 애원했다.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가려는 피란민들을 배에 태워주세요. 여기서 떠나버리면 저기 있는 모든 사람은 중공군의 공격에 몰살당하고 말 겁니다."

       - 현봉학 박사 


    알몬드 소장은 현 박사와 포니 대령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돌렸고, 배에 싣고 있던 군수품 대신 피난민 수송을 지시했다.

    1950년 12월 12일, 세계 전쟁사에서 길이 남을 '흥남철수작전'의 서막이 올랐다. 당시 피난민 구출을 위해 동원된 선박은 민간 상선을 합쳐 193척에 달했다.

    가까스로 흥남항을 빠져나온 10만명의 피난민은 현 박사를 '은인(恩人)'으로 불렀다.

  • 1950년 12월 흥남부두를 가득 메운 피난민들. ⓒ 연합뉴스
    ▲ 1950년 12월 흥남부두를 가득 메운 피난민들. ⓒ 연합뉴스


    현 박사가 살린 것은 피난민만이 아니었다. 세상의 빛을 기다리던 5명 태아의 목숨도 구했다.

    1950년 12월25일 거제도를 향해 항해 중이던 흥남철수작전의 마지막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7600t급)'에서는 신생아 다섯 명이 태어났다. 미군은 이들에게 '김치1~5'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60여년이 지난 올해 12월,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해 목숨을 건진 손양영(66)씨와 이경필(66)씨는, 현봉학 박사의 동상 앞에 섰다. 손씨와 이씨는 자신들을 김치1, 김치5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현봉학 박사님은 생명의 은인이죠.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없었을 겁니다"라고 말하며, 현 박사의 동상을 한참 동안 올려다봤다.


    ▶그들이 기억하는 또 다른 '은인(恩人)'

  • 19일 오후 서울 중구 세브란스빌딩에서 열린 고(故)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이경필(왼쪽), 손양영씨가 현 박사의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씨와 손씨는 당시 철수하던 후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신생아 5명 중 두 명이다. ⓒ연합뉴스
    ▲ 19일 오후 서울 중구 세브란스빌딩에서 열린 고(故)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이경필(왼쪽), 손양영씨가 현 박사의 동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씨와 손씨는 당시 철수하던 후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신생아 5명 중 두 명이다. ⓒ연합뉴스


    함경도 북청 출신인 손양영씨 가족은 원래 피란은 생각지도 않았다. 만삭의 몸이었던 손씨 어머니가 배를 타고 피란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손씨 부모는 살을 에는 추위와 부두에 가득 찬 피란민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손씨 부모에게 "흥남부두의 배가 남한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마지막 배"라며 피란을 떠나야 한다고 재촉했고, 부모는 기적적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라탈 수 있었다.

    "어머니 배가 만삭인 대다가, 부두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이 다 갈 수 있을까' 머뭇머뭇 하셨대요.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아버님이게 '이제 곧 공산세력에 다 넘어 올 텐데, 이배 안타면 인민정권이 들어서고 완전히 몰살당할 수 있다'고 했대요. 우리 아버님이 당시 개인사업을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우리가 생활이 그나마 좀 나았으니까. 공산당이 들어오면 사단이 날 수도 있겠다 싶어 (승선하기로) 결정을 하신거죠."

       - 김치1 손양영씨.

    마지막 배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오른 손씨 가족은 거제도에 도착할 수 있었고, 빅토리호에서 손씨를 무사히 낳는 감격도 누렸다.

    "현봉학 박사가 미국 알몬드 장군한테 피란민 태워야 한다고 설득했잖아요. 저한테는 생명의 은인입니다. 현 박사님 아니었으면 배를 탈 수나 있었겠습니까?"

    손씨는 현 박사 외에 또 다른 '은인'이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흥남부두를 떠난 '기적의 배'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이다.

  •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 ⓒ 월간조선 캡처
    ▲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 ⓒ 월간조선 캡처

    현봉학 박사가 알몬드 장군의 마음을 돌리며 철수가 시작됐지만, 여러 고비가 남아 있었다. 수송선은 군함뿐 아니라 민간 선박이 섞여 있어, 수송선이 피란민을 얼마나 태울 것인가는 개별 선박에 타고 있던 선장과 선원들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12월 20일 부산에서 올라온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항으로 들어왔다. 

    라루 선장은 닻을 내렸고, 미 10군단 존 차일즈 대령이 승선했다.

    우리가 당신에게 피난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소, 당신이 자원하여 얼마라도 태우고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싶소. 상급선원과 의논해 결정을 내려 줄 것을 부탁하오. 

    그때 '라루' 선장의 눈에 들어 온 한 흥남항의 모습은, 그가 정원의 4배가 넘는 인원을 태우고 항해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다음은 라루 선장의 증언이다.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 피난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것,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나왔습니다.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들처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하려는 중공군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 월간조선,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 世界史의 결정적 순간 - 흥남철수作戰 


  • 메러디스 빅토리호 실제 모습. ⓒ 연합뉴스
    ▲ 메러디스 빅토리호 실제 모습. ⓒ 연합뉴스


    라루 선장의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2월22일 밤 9시부터 승선을 시작해 다음날 오전 11시까지 정원 3,000명의 7배가 넘는 1만4천명의 피난민을 태웠다.

    손씨는 그가 다니던 성당을 방문한 수녀의 특강을 통해 라루 선장의 이야기를 듣게 됐다고 한다. 

    그 수녀는 자신이 머물렀던 한 성당의 수사(修士)가, 6.25전쟁 때 피난민을 수송했던 이야기를 하며, 1만명이 넘는 사람을 사상자 없이 후송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수녀님은 자신이 머물던 성당에 수사(修士) 한분이 계셨는데, 그분으로부터 6.25전쟁 때 1만6천명이 넘는 사람을 사상자 없이 후송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수녀님은 그분이 ‘배에서 아이 5명이 기적처럼 태어났는데, 그 아이들이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말도 했다고 하셨지요. 그 순간 그 수사님이 바로 나를 배에 태운 분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손씨에 따르면, 라루 선장은 6.25전쟁의 참혹상을 본 뒤 속세를 떠나 '수사(修士)'가 됐다. 반백이 된 '김치 1'은 과거를 잊은 현실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은혜는 어떻게든 갚도록 돼 있나 봅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내가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꼭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전쟁영웅들에게 빚을 진 마음입니다.

    안타까운 건, 요즘 사람들에게 6.25는 잊혀진 전쟁이 됐다는 겁니다. 한국을 돕겠다고 먼 나라에서 유엔군 장병들이 왔잖아요. 도와준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이런 역사를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으니….”  


    ▶ '김치 1' 가슴 아픈 가족사..."6.25는 종전이 아닌 휴전"

    '김치 1'은 기자에게, 가슴 아픈 가족사를 털어놓기도 했다. 흥남철수 당시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그는 빅토리호에서 생명을 얻었지만, 9살 난 형과 5살 위의 누나는 그대로 흥남부두에 남았다고 했다. 

    “당시 국군이, 일주일만 있으면 다시 올 수 있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그런 줄만 알고 삼촌에게 자녀들을 안전한 곳에 맡겨달라고 하고 오셨대요. 배에 아이들을 태우고 가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그게 영영 이별이 됐습니다.” 

    손씨는 젊은 사람들의 안보관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빨리 통일이 돼야 하는데, 6.25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이잖아요. 미완의 평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젊은이들은 벌써 평화가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북한이 선군정치니 뭐니 떠들어대고, 핵과 미사일 개발하고 있는데 이게 평화가 아니란 걸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가 '선물'을 줄 차례

  • 김백일 장군 동상 앞에 선 이경필 원장. 이 원장은 “10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에게 자유의 땅과 생명을 준 김백일 장군의 정신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먼저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뉴데일리 DB
    ▲ 김백일 장군 동상 앞에 선 이경필 원장. 이 원장은 “10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에게 자유의 땅과 생명을 준 김백일 장군의 정신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먼저 고려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뉴데일리 DB
     
  • 2014년 12월25일, 이경필 원장은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현봉학 박사의 딸인 에스더 현(56), 헬렌 현(53)씨, 포니 대령의 손자인 네드 포니(51)씨와 감동적인 상봉을 했다. ⓒ 사진 TV조선 화면 캡처
    ▲ 2014년 12월25일, 이경필 원장은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현봉학 박사의 딸인 에스더 현(56), 헬렌 현(53)씨, 포니 대령의 손자인 네드 포니(51)씨와 감동적인 상봉을 했다. ⓒ 사진 TV조선 화면 캡처

    손씨처럼, 세대가 거듭될수록 대한민국을 지켜준 이들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한명 더 있다.

    손씨와 같이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김치5', 이경필(66)씨이다.

    이경필씨는 어려서 부모로부터 "너는 이북에 있었으면 죽었을 거다. 그때 미국인들이 너를 배에 태워줬으니 살았다. 너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항상 고맙게 생각해라"라는 말을 늘 듣고 살았다고 한다.

    전쟁 영웅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자란 이씨는 ROTC에 지원해 전방 사단에서 나라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4년 전부터 전국의 대학과 군부대 등을 돌며 흥남철수 관련 역사 특강을 하고 있다. 이씨의 아들도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대한민국의 하늘을 지키고 있다.

    자신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들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고, 심지어 그들이 매도당하는 상황을 지켜만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특히 흥남철수작전의 영웅 중 한명인 '김백일 장군'이 친일파로 몰리고 있는 사실에 강한 유감을 나타냈다.

    이경필씨는 '현봉학 박사', '알몬드 소장', '포니 대령'의 공(功)도 있지만, 당시 육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김백일 장군은 미군이 피난민들을 수송하지 않을 경우, 자신이 직접 피난민을 엄호하면서 걸어서 퇴각하겠다고 배수의 진을 쳤다.

  • 김백일 장군.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백일 장군.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일권 전 육군참모총장의 회고록 한 부분을 보면, 1950년 12월19일 김백일 장군이 흥남 1군단 사령부에서 참모들과 함께 피난민 수송대책 회의에서 했던 말이 기록돼 있다.

    "끝까지 미군과 교섭을 벌여야 한다.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정 못하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 앞에서 배라도 갈라야 한다. (중략) 최악의 경우 우리가 피란민들을 직접 데리고 가야 한다. 미국이 영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국군1군단이 피란민을 엄호하면서 육로로 후퇴하자."

       - 1950년 12월19일, 김백일 육군 1군단장

    이경필씨는 "김백일 장군은 생명의 은인이에요. 김백일 장군이 친일파라는 소리를 듣고, 하도 속이 상해서 자료를 찾아 공부를 했어요. 친일이라고 증명할 자료가 하나도 없었어요. 다만 일부 사람들이 김백일 장군을 음해하려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인데, 어떤 날인 줄 아세요? 김백일 장군이 이끈 1군단이 38선을 돌파하며 만들어진 날이거든요. 친일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6.25전쟁을 비롯해 흥남철수작전을 널리 알리기 위해, 몇 년 전부터 '흥남철수 기념 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씨는 지난해 본지와 진행한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꿈을 밝힌 적이 있다. 

    '흥남철수 기념 공원'사업은 거제시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최근 지역재정이 어려워지면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국가보훈처와 거제시의 협업이 이뤄지면서, 곧 공원 설계 용역에 들어갈 예정이다. 계획이 순조롭게 추진된다면 2019년에는 관람객을 맞이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이경필 원장이, 흥남철수 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배에 오르는 피란민들을 표현한 조형물을 가리키며,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피난민들의 절박함과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 뉴데일리
    ▲ 이경필 원장이, 흥남철수 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배에 오르는 피란민들을 표현한 조형물을 가리키며,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피난민들의 절박함과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 뉴데일리


    다만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자매선박인 레인 빅토리호를 구매해 기념공원에 전시하려는 이씨의 오랜 꿈은 실현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씨는 대안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모형을 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치 5’는 현재 추진 중인 기념공원을 “피난민들이 은인들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들뜬 목소리로 현봉학 박사와 은인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한국 현대사를 왜곡 없이,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의 말에는 절실함이 배어 있었다.

    “기념공원이 빨리 조성됐으면 좋겠어요.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현봉학 박사님은 직접 거제에 세브란스병원 건립을 제안하기도 했어요. 직접 와서 피난민들을 무료로 진료해주고 지원도 했다고 하는데. 이런 내용을 다 알려야죠.”

    “다시 전쟁이 없으려면, 역사를 제대로 알려줘야 합니다. 흥남철수작전을 비롯해 6.25의 참혹상, 북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줘야 해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뭘 잘 몰라요. 북침이냐 남침이냐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이 어떤 곳인지도 제대로 몰라요. 국가관과 안보관이 튼튼해야만 두 번 다시 전쟁이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