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뿌리깊은 나무'의 존재감… DJ와 인연없고 당 생활 짧은 文에게 부담
  • 더불어민주당 전병헌 전 최고위원의 컷오프 재심 신청이 기각됨에 따라 탈당과 20대 총선 출마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충격의 컷오프의 원인과 국민의당 입당 여부를 놓고 야권에서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친노·친문패권주의 세력에 의한 의도적인 '제거'라면, 국민의당에 입당해서 중도·개혁·민생·실용의 기치를 함께 들지 않겠느냐는 기대감 섞인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더민주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충격의 컷오프를 당한데 이어 재심 신청마저 16일 기각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당내의 대표적인 중도·합리파 의원으로 원내대표·최고위원 등 주요 당직을 두루 거쳤다. 충청 출신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오랫동안 모시며 야권의 핵심 지지 기반인 호남 핵심 정치인들과 깊은 교분을 맺고 있으면서도 서울에서 3선을 했다. 그의 지역구인 서울 동작갑에서는 총선 때마다 정당득표보다 개인득표가 월등히 많이 나올 정도로 지지세도 탄탄하다.

  • ▲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공천 학살에 항의하는 동작갑 지역 지지자들과 포옹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공천 학살에 항의하는 동작갑 지역 지지자들과 포옹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달(Moon)빛 가리는 태양과 같은 밝음… 숙청 계기 됐나

    이런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대체 왜 컷오프됐을까.

    야권 일각에서는 역으로 너무나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4선 고지에 오를 경우, 총선 이후 당무에 복귀할 차기 대권주자가 당을 완전히 장악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아 미리 제거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DJ의 평화민주당(평민당) 시절부터 30년 가까이 당을 지켜왔다. 지난해 치러진 2·8 전당대회에서 '뿌리깊은 나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것은 그가 아니고서는 보일 수 없는 자신감이다.

    1996년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패배하면서 은퇴를 번복하고 정계에 복귀한 DJ에게 일생일대의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을 때, 이를 기회로 바꿔놓은 것도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다.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당시 국민의당 천정배 대표와 박지원 의원, 더민주 정세균 전 대표, 배기선 전 의원 등과 함께 '대선의 판도' 자체를 바꿔놓는 'DJP 연합'을 기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정무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는 점을 높이 산 DJ는 정권교체를 통해 청와대에 입성한 뒤 전병헌 전 최고위원을 정무비서관으로 불러들였다. 이후 국정상황실장을 맡으면서 DJ를 계속해서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DJ와 이렇다할 인연을 찾을 길이 없는, 총선 이후 당무 전면 복귀가 예정된 차기 대권주자, 문재인 전 대표와 대조적인 경력이다.

    ◆30년 당 지켜오며 DJ 지근거리서 보좌… 시기심 유발

    지난해 8월 18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DJ 6주기 추도식에서 더민주 이석현 국회부의장과 국민의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고인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눈이 붉게 충혈될 정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반면 문재인 전 대표는 당시 담담한 표정으로 추도식 일정을 소화했다.

    이를 가리켜 야권 핵심관계자는 "고인과 회고할만한 무슨 추억거리가 있어야 눈물을 흘릴 것 아니겠느냐"고 꼬집은 적이 있다. 이렇듯 문재인 전 대표는 야당의 대권주자인데도 DJ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는 게 치명적 약점이다. '민주당' 생활이 짧다는 것 또한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다보니 반문(反文) 정서에 휩싸여 있는 호남 민심은 달리 마음 둘 인물만 생긴다면, 결코 문재인 전 대표에게는 갈 일이 없게 된다. 결국 "호남이 거부하는 대권주자는 있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국민의당 김한길 전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이 규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이번 총선 공천 과정을 통해 당의 뿌리 자체를 들어내는 'DJ 지우기' 작업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셈이다.

    그 타겟이 하필 '뿌리깊은 나무'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었던 것이다.

  • ▲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공천 학살에 항의하는 동작갑 지역 지지자들과 포옹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공천 학살에 항의하는 동작갑 지역 지지자들과 포옹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親文, 전부터 '전병헌 견제'에 혈안… 전대 때는 '짬짜미'하기도

    실은 당내 친노·친문 핵심의 전병헌 전 최고위원을 향한 집요한 견제는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친노 핵심 세력은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원내대표를 하던 시절부터 그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지난해 2·8 전당대회 과정에서는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최고위원 경선에서 1등을 해 수석최고위원으로 선출될 것이 유력시되자, 경선 레이스 막판에 당내 계파 수장끼리의 '짬짜미'를 통해 다른 최고위원 후보자에게 표를 몰아주기로 담합하기에 이르렀다. 막판에 예상치 못한 치명타를 맞은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빅 쓰리' 중에서 세 번째인 3등으로 주저앉았다. 당대표보다 더 존재감이 큰 수석최고위원이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몸쪽 바짝 위협구를 붙여던졌음에도 당의 위기 때마다 부각되는 전병헌 전 최고위원의 존재감을 보면서, 친노·친문 핵심 세력은 숙청(肅淸)의 칼날을 매만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당의 위기 때마다 자연스레 부각되는 존재감, 신경쓰였나

    지난해 4·29 재·보궐선거를 문재인 전 대표가 말아먹은 뒤 촉발된 당의 내홍은 이른바 '5·8 참사'로 이어졌다. 주승용 최고위원이 사퇴를 선언하고 이를 야기한 정청래 최고위원에게 당직정지의 중징계가 떨어지면서,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자연스레 지도부의 중심을 잡게 됐다.

    정무 감각이면 정무 감각, 메시지 전달이면 메시지 전달. 당대표의 바로 오른 측면에 앉아 있으면서 그 어떤 면에서도 당대표를 월등히 능가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전병헌 전 최고위원을 보면서 친노·친문 핵심 세력의 위기감과 경계심은 더욱 커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전병헌 전 최고위원의 존재감은 연말연초에 있었던 야권의 분당 과정에서 더욱 빛났다. 이것이 역으로 친노·친문 핵심 세력이 전병헌 전 최고위원의 '찍어내기 사천'을 결심하게 된 최종 원인이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탈당 행렬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문재인 전 대표와는 달리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동교동계·구민주계를 비롯한 당내 제세력과의 폭넓은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광폭 행보를 펼쳤다.

    일례로 권노갑 전 상임고문의 탈당을 저지하기 위한 최종 설득의 임무는 전병헌 전 최고위원에게 주어졌다. 문재인 전 대표도 전병헌 전 최고위원에게 부탁하는 것 외에는 달리 쓸 수 있는 수가 없었다. 본인은 권노갑 전 고문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반면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 ▲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국회에서 공천 학살에 항의하는 동작갑 지지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국회에서 공천 학살에 항의하는 동작갑 지지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총선 후 야권 재편 위한 비대위원장 적임… 살생부 오른 원인

    이 무렵 야권 일각에서는 더민주의 총선 대패(大敗)와 '문재인 체제' 붕괴를 가정한 시나리오가 나돌았다. 당시는 '문재인 체제'의 인기가 바닥을 기고 호남 민심의 이반 현상이 심화되면서, 총선에서 더민주가 80석도 획득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올 때였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총선 이후에는 더민주에 비상대책위원회가 들어서면서 야권 재편이 모색될텐데, 그 과정에서 전병헌 전 최고위원의 역할이 매우 커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비대위원장을 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까닭은 간단하다.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국민의당 김한길 전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이 민주당 대표를 맡던 시절 원내대표로 '투톱'이 돼 호흡을 맞췄다. DJ 청와대에서도 정책기획수석비서관과 정책기획비서관으로 한솥밥을 먹은 바 있다.

    국민의당 천정배 대표와도 1996년 무렵을 전후해 이른바 '동북아연구모임' 위원으로 DJP 연합을 함께 추진했던 전략기획팀 멤버였다. 박지원 의원이라든지 권노갑 전 고문 등 동교동계와의 친분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분열돼 있는 야권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이다보니, 더민주 당 하나를 장악하기에도 역량이 모자라는 문재인 전 대표의 입장에서는 냉정히 말해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다. 더민주 김종인 대표가 문재인 전 대표 내지 친노·친문 핵심 세력과의 교감을 거쳐 전병헌 전 최고위원을 '제거'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야권 관계자는 "당내에 유일하게 실력으로 보수를 압도할 수 있는 인물인 전병헌 전 최고위원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친노 핵심 계파에 의해 자행돼 왔다"며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지도부 인사들에 대한 의리나, 당에 대한 충정에서 조금의 흠결이 없음에도 숙청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은 능력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전병헌 "권위와 독선의 퇴행적 문화" 친문패권주의 비판

    이날 재심 기각 사실이 알려진 직후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입장을 발표했다.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잘못된 결정이 바로잡히기를 바라며 한 가닥 희망을 걸었으나, 이제 마지막 기대마저 물거품이 돼버렸다"며 "분노를 넘어 참담한 심정"이라고, 30년간 충정을 다해온 당이 재심마저 기각한 것에 극도의 실망감을 내비쳤다.

    이어 "지도부가 재심 과정에까지 부당한 개입을 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며 "30년 평생을 지켜온 당에 어느 날부터 권위와 독선의 퇴행적 문화가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프다"고 토로했다.

    나아가 "지난 30년간 민주당을 키워오고 지켜왔다"면서도 "당을 지켜온 선배·동지들 그리고 지역구 주민들과 깊이 의논해 담대한 결정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컷오프 불복을 시사한 것으로, 당연한 일이라는 지적이다. 이제 20대 총선 출마는 당연한 수순으로, 다만 당적을 국민의당에 두느냐 아니면 무소속으로 출마하느냐만 관건으로 남게 됐다.

  • ▲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국회에서 공천 학살에 항의하는 동작갑 지지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국회에서 공천 학살에 항의하는 동작갑 지지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국민의당도 전병헌 컷오프는 상상도 못했다

    전병헌 전 최고위원은 이날 국민의당에 입당한 정호준 의원과는 달리 국민의당에 몸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사전 조율이 필요한 형편이다. 정호준 의원의 지역구인 서울 중·성동을은 국민의당이 비워놓고 있었던 반면, 전병헌 전 최고위원의 지역구인 서울 동작갑은 국민의당이 일찌감치 지난 9일 1차 공천 발표 과정에서 경선 지역구로 지정을 했다.

    정호준 의원은 개인적인 능력과 별개로 '인질 정치'의 결과 보복 낙천당할 것임이 어느 정도 예견됐기에 국민의당이 서울 중·성동을을 비워놓을 수 있었다. 반면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낙천당할 것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예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친노·친문 핵심 세력의 속이 이다지도 좁고, 그들에게 밉보이는 게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걸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국민의당도 전병헌 전 최고위원의 더민주 공천은 당연한 것으로 보고, 강력한 현역 의원이 존재하느니만큼 후보라도 일찍 세워서 미리 준비시키기 위해 일찌감치 서울 동작갑을 경선 지역으로 지정·발표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정치적 실책이지만, 어차피 친노·친문 핵심 세력은 국민의당의 동작갑 경선 지역 지정까지 모두 계산해 전병헌 전 최고위원의 뒤통수를 칠 타이밍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므로 손쓸 방법이 달리 없었을 수도 있다.

     

  •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 ⓒ뉴데일리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 ⓒ뉴데일리

     

    ◆전병헌 영입으로 관악·동작 벨트에 '드림팀' 띄우나

    국민의당 일각에서는 관악·동작 벨트가 서울 49개 선거구 중 국민의당의 핵심 전략 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해, 서울 동작갑에서 더 이상 경선 절차가 진행되는 것을 중단하고 전병헌 전 최고위원을 서둘러 영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의당은 서울 관악을에 김희철 전 의원과 이행자 전 서울시의원이라는, 강력한 지역 경쟁력을 가진 예비후보를 보유하고 있다. 또, 인접 지역구인 서울 관악갑에는 18대 국회에서 김희철 전 의원과 함께 의정활동을 했던 김성식 최고위원이 출마할 예정이다.

    관악갑에서 봉천고개를 넘으면 나오는 서울 동작을에는 TV출연과 소비자주권운동으로 인지도가 높은 장진영 변호사가 출사표를 던졌다. 여기에 동작갑의 전병헌 전 최고위원까지 더한다면, 1980년 분구(分區) 이전까지 '관악구'라는 같은 구(區)로 묶여 있던 관악·동작 벨트에 진정한 드림팀이 형성된다는 지적이다.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과 문병호 의원도 전병헌 전 최고위원 영입에 긍정적인 의사를 나타냈다.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은 14일 YTN라디오 〈출발 새아침〉에 출연해 "만약에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국민의당에 오고 싶다고 한다면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날 저녁 YTN라디오 〈뉴스 정면승부〉에 출연한 문병호 의원도 "전병헌 의원은 중도합리적인 분으로 원내대표도 맡았는데, 어떤 기준으로 컷오프가 됐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며 "우리로서는 전병헌 의원이 국민의당에 입당할 용의가 있다면 검토할 수 있다"고 문호를 활짝 열었다.

    국민의당 핵심관계자는 "중도·개혁·민생·실용이라는 신당의 가치를 비춰보더라도 전병헌 전 최고위원을 국민의당에 영입하는 게 맞다고 본다"면서도 "이미 서울 동작갑을 경선 지역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예비후보자들의 반발을 피해야 하는 입장을 고려해서라도 전병헌 전 최고위원이 삼고초려만을 기다리기보다는 본인 쪽에서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명해 명분을 만들어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