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辭典)은 일제 말기 징병을 권유한 글까지 썼던 여운형(呂運亨, 1886~1946)은 親日派 명단에서 빼버렸다.
반면 1905년 11월20일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명문을 남겼고 이후 애국계몽운동을 벌여 온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1916년 일본총독 부임을 환영하는 넉 줄짜리 한시를 썼다는 이유로 親日派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정적 차이는 여운형은 좌익(左翼)계열,
장지연은 민족(民族)계열이라는 점이다.
<『여운형 親日의 활증(活證)을 보라』>
여운형의 親日행적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43년 일제가 출간한 「반도학도출진보」라는 책에는
여운형의 「반도 2500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이 수록돼 있다.
이는 학생들이 일제징병에 자진참여하라는 내용이다.
같은 책에는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의 글도 수록돼 있는데
안재홍의 글에는 『담(談)』, 여운형의 글에는 『수기(手記)』라고 표시돼 있다.
안재홍 같은 이는 마지못해 말로 했지만 여운형은 직접 손으로 썼다는 뜻이다.
해방 후인 1847년 「대동신문」은 『일제 때 여운형의 충성.,.親日의 활증(活證)을 보라』는 제하(題下)의 기사에서 여운형의 親日행적을 규탄했다.
당시 조선공산당 자료집을 보면 『여운형은 학도지원권고문 발표하고, 총독부와 밀접하여 김태준 등을 전향하게 했다』며 『親日분자라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군(日軍) 중위가 親日派면 중령은?>
누구의 親日에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누구의 親日은 무시해 버리는 사례는 이 뿐 아니다.
사전은 박정희 前대통령을 만주 육군훈련학교를 나와 만주군 보병중위로 복무했다는 이유로
親日派에 포함시켰다.
반면 일본 고위 장교 출신인 고종(高宗, 1852~1919)의 손자 「이우」는 親日派에서 배제시켰다. 「이우」는 일본 육사를 나와 육군 중좌(중령)까지 지냈던 인물로 33세 때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을 맞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