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은 김일성의 업적”이라는 북한...김상률 교문수석부터 잘라야!
  • 광복 70년史가 [남북 쇼] 거리인 줄 아는가?


  • 광복 70주년 기념을 남북이 함께 하자고 한 게 과연 말 되는 소리일까?
    그걸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애시 당초 좌우분단도 없었고 6. 25 동란도 없었을 것이다.

    철학과 사관(史觀)이 같은데 왜 피 흘리고 싸웠겠나?
    이승만 박사와 박헌영이 싸울 일도,
    [대한민국 건국노선][좌파 통일전선]이 다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좌익은 남산공원에서,
    제 각기 따로 8. 15 광복절과 3. 1절 행사를 치렀다.
    그리곤 양쪽 시위대가 남대문 로터리에서 부딪혀 육탄전을 벌였다.
    피차 목숨을 바칠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 ▲ 김일성과 함께 한 박헌영(왼쪽).ⓒ 사진 뉴데일리DB
    ▲ 김일성과 함께 한 박헌영(왼쪽).ⓒ 사진 뉴데일리DB
     
  • ▲ 모스크바레닌학교 시절의 박헌영(맨 아래 오른쪽에서 세번째). 동기 중에는 베트남을 적화시킨 호지명도 있었다.ⓒ 사진 뉴데일리DB
    ▲ 모스크바레닌학교 시절의 박헌영(맨 아래 오른쪽에서 세번째). 동기 중에는 베트남을 적화시킨 호지명도 있었다.ⓒ 사진 뉴데일리DB

    [편집자 주]

    해방정국의 혼란과 ‘남로당’의 출현
    - 북한 노동당의 ‘모태’가 된 박헌영의 ‘남로당’


    1945년 8월 15일 해방공간에서 제일 먼저 정치활동을 재개하며 대처한 세력이 바로 조선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일제 하에 투옥되었던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석방됐고,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지하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이 즉각 활동을 재개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는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함께 ‘공산주의 실현’을 위한 ‘인민정권 수립’ 투쟁으로 집약된다.

    남한 내 공산당의 공식적인 재건은 박헌영 등이 주도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결성을 계기로 본격화된다.

    특히 박헌영은 1945년 9월11일 ‘8월 테제’(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당 강령으로 삼고, 공식적으로 <조선공산당>을 출범시킨다.

    <조선공산당>은 강령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한 ‘공산주의사회 건설’]을 최종 목표로 한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힌다.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의 총 집결체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출범을 주도한 사람도 박헌영이다.

    박헌영은 북한의 공산주의세력이 소련의 지시를 따라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을 결성하자, 이에 호응해 기존 3당 세력을 흡수, 1946년 11월 23일 ‘남로당’을 결성한다.

    1949년 6월 30일, ‘남로당’과 ‘북로당’이 통합한 <조선로동당>이 만들어지면서 남북한 공산세력은 표면상 총결집된다.

    이 시기 좌익세력들은 대다수 국민들의 열망이었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 소련의 지령에 따라 찬탁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북한 공산세력의 사주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방해했다.

    나아가 공산인민정권 수립을 위해 각종 테러, 방화, 총파업, 유격전, 무장폭동 등을 자행하면서 사회혼란을 조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런데,
    "나는 그 때 안 살았기 때문에 그 싸움과 무관하다.그러니 나와는 월츠를 춥시다."
    한 셈인데,
    이게 과연,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말이 되는 말이냔 말이다.

    김일성 일당은 8. 15 광복을 그의 <조선인민혁명군>이 이룩한 것이라고 조작했다.
    그들 혁명의 타깃으로 지목된 상대방은,
    일본제국주의-자본주의-미제국주의-서구문명-남조선 괴뢰(이승만-보수우익) 등이다.

    해방 70년이 지난 오늘도,
    북한의 이런 8. 15해방 관(觀)은 더 심화되면 되었지, 조금도 엷어지지 않았다.

  • ▲ 광복 2주년 기념행사를 따로따로 연 좌익과 우익. 소련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김일성과,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남한의 공산화를 꾀한 좌익진영은 해방직후부터, 우익인사들을 친일로 매도하면서 남한 사회내 갈등을 조장했다.ⓒ 허정도와 함께 하는 도시이야기 블로그 캡처
    ▲ 광복 2주년 기념행사를 따로따로 연 좌익과 우익. 소련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김일성과,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남한의 공산화를 꾀한 좌익진영은 해방직후부터, 우익인사들을 친일로 매도하면서 남한 사회내 갈등을 조장했다.ⓒ 허정도와 함께 하는 도시이야기 블로그 캡처

    [대한민국 건국노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자유민주 진영은 반면에,
    북한의 그런 8. 15사관(史觀)을 전면적으로 배척한다.
    이 진영은,
    8. 15 해방이 2차 대전의 전승국인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점령으로 초래된 사태임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면서 우리 내부적으로는 물론,
    8. 15 광복이 한말(韓末) 이래의 우리의 자생적인 독립운동과 문명개화 운동의 귀결이었다고 자긍(自矜)한다.

    북한은 이 민족운동을 오로지 김일성 일파가 배타적으로 대표하고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자기들이 폄하하는 [우익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일제와 적당한 선(線)에서 타협하려 한 배신자들이며,
    오직 김일성 일파만이 [100% 반일 독립]을 추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순전한 조작-날조-왜곡이라는 것은 더 이상 길게 논할 가치조차 없다.

  • ▲ 스탈린과 김일성, 마오쩌둥.ⓒ 사진 뉴데일리DB
    ▲ 스탈린과 김일성, 마오쩌둥.ⓒ 사진 뉴데일리DB

    8.15 해방 5년만에,
    김일성스탈린마오쩌둥의 결재를 받아 6. 25 남침전쟁이라는 희대의 반민족적-반인도적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 후로도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은,
    1. 21 청와대 기습-KAL기 폭파-천안함 폭침-연평도 포격 등,
    끊임없는 전범행위를 자행해 왔다.
    지금은 핵을 거머쥐고 전체 문명세계를 상대로 행패를 부리고 있다.

    이에 맞서 유엔은 북한의 반인도 범죄 행위자들을 국제형사법정에 세울 것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 ▲ 유엔에서 사상 처음으로 북한 인권 상황과 반(反) 인권 최고책임자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는 결의안이 채택된 것을 환영하는 포스터가 22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 나붙었다.ⓒ 사진 연합뉴스
    ▲ 유엔에서 사상 처음으로 북한 인권 상황과 반(反) 인권 최고책임자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는 결의안이 채택된 것을 환영하는 포스터가 22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 나붙었다.ⓒ 사진 연합뉴스

    자,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묻겠다.

    박 대통령은,
    이런 자초지종을 가진 남북의 상이한 8. 15 사관, 현대사 70년 관(觀)을 [초월]해서,
    양쪽이 한반도기(旗)를 내걸고 함께 웃고 껴안으며,
    “우리 하늘로 붕 떠올라 까짓 땅위의 일일랑 잠시 접은 채 그저 공동기념 축제나 열고 폭죽이나 터뜨리고 춤이나 춥시다.”
    한다고 해서...
    북쪽이,
    “그럽시다. 우리라고 해서 날이면 날마다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타령만 하고 있을 생각은 없소. 잊고 놀자고요? 그럽시다.”
    하고 나서 줄 것 같은가?

    박근혜 대통령 곁에는,
    아마도 대한민국의 8. 15사관과 ‘인민공화국’의 8. 15 사관을 초월할 그 어떤 마법사(sorcerer)라도 있나 본데...,
    어유, 그렇다면,
    그 이전에 북한과는 고사하고 국내의 역사교과서 싸움부터 먼저 [초월]해 보시지?

    그게 [초월]하겠다고 해서 [초월]될 성질의 문제인가?

    <민족문제 연구소>의 동영상 <백년전쟁>과 그 반대쪽(뉴데일리 등)이 만든 동영상 <생명의 길>이 함께 모여 공동행사를 한다?

  • ▲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건국유공자들을 친일부역자로 날조·왜곡한 민족문제연구소의 동영상 ‘백년전쟁’ 포스터(오른쪽). 백년전쟁의 역사왜곡에 맞서 이승만 박사와 대한민국 국부들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담아낸 反백년전쟁 동영상 ‘생명의 길’.ⓒ 사진 뉴데일리DB
    ▲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건국유공자들을 친일부역자로 날조·왜곡한 민족문제연구소의 동영상 ‘백년전쟁’ 포스터(오른쪽). 백년전쟁의 역사왜곡에 맞서 이승만 박사와 대한민국 국부들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담아낸 反백년전쟁 동영상 ‘생명의 길’.ⓒ 사진 뉴데일리DB

    지나가던 소가 헤벌렁 웃을 코미디다.

    야당은 한 때 8. 15 경축식을 따로 한 적이 있었다.
    야당 안의 그런 이질적 분파(faction)는 통진당과 야권연대를 한 후, 지금도 여전히 건재한다.
    이런 국내의 불은 그대로 놓아둔 채 뭐,
    북한과 광복 70주년 기념을 함께 할 수 있겠다고? 

    얼씨구~ 어디 한 번 자알~들 해봐...

    박근혜 대통령에겐 도대체 역사인식-역사문제와 관련해선 누가 주로,
    “전하~ 이리이리 하심이 옳은 줄로 아뢰오~”
    하고 주청(奏請)하는가?

    통일준비위원회 강단(講壇)파인가,
    통일부 관료들인가,
    황우여 교육부총리인가,
    김상률 교문수석인가?

    정말 젖비린내 진동 하는구만...

    박근혜 정권은 [광복 70년-건국 67년의 현대사]를 함부로 가지고 놀지 말라!

    편집자 주 :
    최근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가 보여준 치열한 삶의 족적이 바로 [생명의 길]이다.
    영화에서 덕수가 타고 내려온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새 새명 <김치5>(거제 평화가축병원 이경필 원장)는 거제에 터를 잡고 수의사로 소-돼지 등 가축들의 생명을 보살피고 있다. 그 아들은 공군 헬리콥터 편대장으로 추락 조종사들 생명을 구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경필 원장의 할머니가 혼자 집을 지키겠다며 만삭의 며느리와 아들 부부를 흥남부두에서 배에 태워 자유가 살아 있는 남으로 보낸 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다.
    [떼]가 아닌 주체로서의 [개인]이 대를 이어 벋어나가는 길, 그게 바로 [생명의 길]이다.

    한반도에 한민족이 터를 잡고 살아온 수만년 가운데 한반도 남단의 지난 70년의 역사야 말로 가장 눈부신 [생명의 길]이다.
    반면, [떼]가 판친 한반도 북단에선 [죽음의 길]이 70년 지속됐다.
    지난 70년간 최소한의 추산으로도 3백여만명 가량의 [개인]들이 [떼의 천국]이란 거짓 아래 굶어죽었다.

  • ▲ 미군, 북한군,한국군(좌로부터)ⓒ뉴데일리
    ▲ 미군, 북한군,한국군(좌로부터)ⓒ뉴데일리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을까?
    임진왜란이야 전쟁
    중이었다고 치지만, 전쟁도 아닌 상황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굶어죽은게 지옥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
    리카 어느 나라만도 못한 처참한 살륙현장이 한반도에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죽음의 길]이 아니라면, 이 지구상에 [죽음의 길]은 더이상 없다.

    [생명의 길] [죽음의 길]이 이처럼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전선은 이 지구상에 바로 이곳 한반도뿐이다.

    그 치열한 70년.
    생명과 죽음의 갈림길의 결과는 이렇다.
    [생명의 길]을 택한 남한 남자의 평균 키는 174cm,
    [죽음의 길]을 걸은 북한 남자의 평균키는 160cm.
    1945년 해방 당시 평균은 165cm였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wm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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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박헌영은 누구인가?

    충남 예산(禮山) 지주의 첩의 자식, 머리가 좋아 제1고보(경기고)를 졸업하고, 한 때 미국 유학을 꿈꾸기도 했던 박헌영의 파란만장 56년 생애를 담아낸 책은, [박헌영-그 일대기를 통한 현대사의 재조명](사진, 1983년 발간)이다. 이 책의 저자는 남노당(남조선노동당) 핵심으로 박헌영 월북 후 지하당 책임자였던 박갑동(朴甲東:1957년 북한 탈출)이다.

    ◆박헌영의 첫 위장취업!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

    20세 청년 박헌영은 중국 상해로 건너가 공산당에 입당, 공산주의자로 국내에 잠입한 것은 1924년 봄, 4월에 동아일보 입사, 9월엔 조선일보 기자로 옮긴다.
    이때 공산주의자들이 양대 [민족지]에 기자로 대거 취업하면서, 크고 작은 필화사건이 빈발한다.

    ◆[언론인 대회] 위장, [조선공산당] 창당 성공!

    조선일보 기자 25세의 박헌영은 1925년 4월17일 언론계에 잠입한 공산주의 기자들을 동원해, [조선 기자대회]를 연다고 경찰에 거짓 신고하고, 중국음식점 ‘아서원’(현 롯데호텔 자리)에서  연회를 여는 양 위장해, [조선공산당] 결성식에 성공한다. 일제경찰도 깜깜 몰랐다.[국제공산주의 중앙] 소련 스탈린한테 창당 승인을 받기 위해 박헌영보다 2살 많은 공산당 조봉암(曺奉岩)을 모스크바로 보낸다.

    ◆재판정과 감옥에서 ‘광인 행세’ 자살 연극!

    [신의주 공산당 사건]으로 복역중, 1927년 법정에 나온 박헌영은, 재판장에게 욕설을 퍼붓고 달려드는 등 난동을 계속했다. 감방에선 자살하겠다며 두 차례나 목을 매었다.
    간수가 들여보내는 밥그릇을 차버리고 자신의 대변을 주워 먹고 벽에 똥칠을 하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
    면회 온 아내도 '모른다' 부모에게도 '누구냐, 무섭다' 몰라보는 척 도망치고, 혼자서 횡설수설 식사를 거부하는가 하면, 의사 검진도 박차며 땅바닥에 뒹굴고 몸부림치는 등 정신병자 행세를 했다.
    박헌영은 정신병자 행세 4개월 만에 ‘불치병’ 진단을 받고 법원의 보석결정을 받아, 교도소를 나온다.
    이후 안변 석왕사와 함흥 등지를 요양하는 척 오락가락 하다가, 공산당 아내 주세죽(朱世竹)과 함께 압록강을 몰래 건너 만주로 도망친다.

    ◆전남 광주 [벽돌공장 인부] 위장, 해방되자 [건준] 탈취!

    중국과 소련을 넘나들던 박헌영은 상해에서 잡혀 와 6년간 옥살이에서 풀려나자, 전남 광주 벽돌공장에 인부로 변장하여 숨었다. 가명은 김성삼(金成三),
    그가 박헌영인 줄 안 사람은 공장주인 뿐, 지하조직과 암약 3년 만에 해방을 맞았다.
    8월16일 여운형(呂運亨)이 “공산혁명으로 일로매진하겠다”고 선언하자 전국이 경악!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찾아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은, 조선일보 영업국장이던 [공산당의 조조] 홍증식(洪璔植) 등 20여명을 만나, 낙원동 뒷골목에서 조선 공산당을 재건한다. 즉시 ‘건준’에 파고든 박헌영은 자기세력을 투입한다.
    "상대방을 잘 이용하는 게 공산주의 승리의 길"이 박헌영의 좌우명!
    출범 1주일도 안된 건준을 8월22일 전면 개편, 한손에 장악해버린다.

    ◆[인민공화국]선포, 이승만을 주석으로 위장!

    박헌영이 [환골탈태 전술]로 건준을 삼키자 안재홍(安在鴻)등 우파도 떨어져나갔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단계가 왔다"고 선동, 분파들을 집결시킨 박헌영은, 여운형을 내세워 경기여고 강당에서 인민위원회를 결성, [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자신은 뒤로 숨고,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여운형, 내무부장 김구 등, "조선 내 유일한 정부" 벽보를 전국에 붙이니 사람들은 [벽상(壁上)정부]라고 웃었다.귀국도 안한 독립투사들을 멋대로 망라한 것은 박헌영의 [통일 전선] 전략!
    구한말부터 반소-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이 귀국해 [주석] 요구를 웃음에 부치자,
    박헌영은 "이승만은 미제국주의 앞잡이, 반동분자, 민족배신자"로 죽을 때까지 욕했다.

    ◆이석기의 RO, 박헌영의 ORG!

    어느 나라 공산주의 조직과 마찬가지로 조선공산당의 중심도 지하조직이다.
    중앙당사 간판을 건 [근택빌딩(미도파 옆)]은 인쇄소 [정판사]와 [해방일보]를 두었다.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유명한 그 당사에 박헌영 등 당 간부들은 나오지 않았고, 행정구역별 ORG(조직자)들과 지하활동에 집중했다. 당사 건물은 [지상 선전용]일 뿐.
    당시 ORG 접선장소나 아지트는 대개 서점들, 안국동 행림(杏林:은행나무)서원, 경운동의 [우리서원]등등. 5공때 운동권 서점들도 같은 역할을 했다.
    박헌영은 "노동자는 사상적이고 계급적이며 혁명을 위해 희생(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레닌의 혁명원칙을 정판사에서 인쇄, 각종 산별노조들을 교육시켜 [전국노조 평의회]를 앞세워 혁명투쟁의 프락치 전위대로 동원하곤 했다.
    박헌영의 ORG와 이석기의 RO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여간첩 김수임의 도움 받아 관(棺)속에 숨어 월북!

    해방 다섯 달 만에 1946년 2월 [북조선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구성을 마친 소련은, [조선인민공화국] 선포만 남긴 상태로 미국과 [남북좌우합작] 협상을 벌여, [남북통일 공산국] 구축공작에 나섰다.
    이때 본격적인 남조선 파괴활동 개시 지령!
    폭력적인 남노당의 위력이 기승을 부리자 미군정은 지도부 체포를 준비했다. 이 때 미군 고위 장교와 동거하던 여간첩 김수임(金壽任)이 [박헌영 체포령] 정보를 입수, 박헌영은 부랴부랴 서울을 탈출한다.
    1946년 9월5일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는 영구차에 실린 관속에는 박헌영이 누워있었다. 따르는 상주들은 무장 청년당원들.
    다음 날 체포령이 내렸지만 38선을 넘어 간 박헌영은 평양에서 소련 군정이 시키는 대로, [박헌영 선생의 서한]으로 불리던 지령문을 서울로 내려 보내며, 온갖 파업과 투쟁, 대구 폭동, 제주 4.3폭동, 여수-순천 반란 등을 지휘, 유엔 관리하의 [대한민국 건국 선거]를 원천봉쇄하는 전국 작전을 독려한다.
    정부수립 후 미군철수 결의, [보안법] 제정 반대, [국회프락치사건]을 비롯, 6.25남침 전후 남한의 [인민 무장봉기]를 준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 뉴데일리 2013년 9월13일, <이석기와 박헌영 [변장-위장]의 역사는?>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