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72> 금고

     
    “동무, 그게 확실합니까?”
    “홍화 동무, 무슨 내용의 전화인데 그렇게 흥분하시오?”
    “말레이시아에 주재하는 우리 정찰총국 공작원 동무로부터 걸려온 긴급 전화예요.”
    “…….”
    “그러니까 얼마 전 무역기관의 창고에 쌓아둔 짐정리를 하다 우연히 리재경의 생활수첩을 발견했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말레이시아 주재 정찰총국에서 그 숫자들을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하지만 동무 생각에는 아무래도 리재경이 담당하던 비밀자금의 계좌번호 중 하나 같다는 그 말이죠?”
    “뭐, 계좌번호!”
    “하지만 말레이시아 은행의 계좌번호가 아니고 동남아 지역 은행들의 계좌번호도 아니라는 게 맞습니까?”
    “그렇다면 혹시?”
    “제 느낌도 그래요, 부조장 동무. 더구나 그 숫자 바로 밑에 알 수 없는 글귀가 있었답니다.”
    “글귀의 내용이 뭐요?”
    “너도 천사를 믿어라.”
    “그렇다면 그 번호가 바로…….”
    “맞아요, 동무. 불러주세요. 저희가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국민은행 B2645. 알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오늘밤 안으로 남조선의 금융전산망을 공격해 필요한 정보를 빼내도록 하시오.”
    “그럴 필요가 과연 있을까요?”
    “지금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러니까 제 말은 지난번 주요 포털업체와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한 동시다발적인 디도스공격으로 이미 그 정도의 정보는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군! 그게 있었지. 그러고 보니 지난번 은혁 동무가 해커조직을 동원해서 수행한 사전정지작업이 아주 적절한 순간에, 절묘한 판단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드는군.”
    “저 역시 그래요.”
    홍화는 종일 굶다가 첫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처럼 한껏 상기됐다. 피오기도 어둠의 감옥에서 마침내 탈출구를 찾아낸 것처럼 안도했다. 두 사람은 다시 꿈과 욕망을 좇을 수 있는 수단을 움켜쥐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운이 따른다면 몸통을 열고 부드러운 내장과 살점을 뜯어먹을 수 있기를 원했다.
    “흠, 내일은 오늘과 다른 하늘을 봤으면 좋겠소.”
    “꼭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혼합주 한 잔 어때요?”
    “홍화 동무, 축하는 너무 성급한 것 아니오?”
    “샴페인은 절대 일찍 터트리는 게 아니다, 뭐 그 말인가요?
    “그렇소.”
    “하지만 상황이 다르죠. 오늘은 자축이 아니라 조원들끼리 한데 뭉치자는 단합의 의미를 담은 담력주니까.”
    “짐작대로 상황을 읽는 눈이 탁월하군. 하지만 그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이 있소.”
    “은혁 동무의 콤피터(컴퓨터) 실력 말인가요?”
    “그렇소. 아, 물론 나도 알고 있소. 평양 제1중학교 4학년 때 이미 자신이 만든 바이러스의 전파력과 파괴력을 시험하기 위해 국가콤피터망에 유포시킨 전력이 있다는 거. 거기다 비밀에 속하는 중요 정보를 파손시켜 처벌까지 받았고. 아무튼 혼합주는 그 다음에 마시도록 합시다.”
    “부조장 동무, 그래도 준비는 필요하겠죠?”
    “좋을 대로. 난 보드카에 맥주를 섞는 혼합주를 좋아하오.”
    “그건 북조선에서 가장 보편적인 혼합주잖아요.”
    “그럼 홍화 동무는 어떤 혼합주를 좋아하오?”
    “전 맥주가 아닌 와인을 섞어요. 꼬냑(코냑)에 맥주를 섞은 것도 좋고요.”
    “역시 술에 있어선 내가 배울 것이 더 많소. 아참! 앞으로 벌어질 모든 돌발 상황에 대비한 작전도 철저히 세워두시오.”
    “물론이죠. 최악의 상황을 가상한 예상시나리오까지 완벽하게 수립해놓을게요.”
    “좋소.”

  • 그 시각 정원은 커피를 마시려다 말고 황급히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팽팽한 시선으로 휴대전화를 쏘아보았다. 심장을 빠져나온 피가 온몸을 도는 데 1분이 걸리는 게 아니라 그 절반쯤 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메시지를 본 정원의 얼굴이 이내 밝게 펴졌다.
    “팀장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유진 씨, 그렇게 보여?”
    “예,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잖아요.”
    “재국 씨도 궁금해?”
    “당근이죠.”
    “후후후, 탱고 다운(Tango Down·목표물을 제거하다)!”
    “정말 탱고 다운입니까?”
    “응.”
    “앗싸!”
    “그럼 마에다 유주루의 제거작전이 상황종료된 것이네요.”
    “그렇지. 이제 우리의 뇌혈관을 막고 있던 피떡(혈전)이 완전히 사라진 거야.”
    “그런데 팀장님.”
    “재국 씨, 왜?”
    “키돈(Kidon)의 비밀요원들이 사용하는 제거방법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전 그게 너무 궁금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비밀작전의 성격상 확인이 불가능해. 진실의 범위는 그들이 결정했으니까. 하지만 지난번 메시지에서 롯사나 시아피노의 부하와 마에다 유주루의 만남을 사전에 알아챈 눈치였거든. 따라서 부하를 추적해 마에다 유주루의 차량에 폭탄을 설치하는 것도 비밀요원들의 선택옵션 중 하나였겠지. 아니면 그들만의 방식으로 찾아낸 약점을 갖고 부하와 직접 커넥션을 했던가.”
    “그럼 이제 집중력 강화제라도 먹고 리재경의 마지막 수수께끼만 풀면 되는 건가요?”
    “거기가 바로 비밀자금 추적의 터닝포인트가 될 거야.”
    “히~유! 하지만 직물처럼 얽힌 마지막 수수께끼의 해답이 좀처럼…….”
    “그래서 말인데요, 팀장님.”
    “재국 씨. 왜?”
    “혹시 우리가 난이도 조정을 잘못한 건 아닐까요?”
    “난이도 조정?”
    “예.”
    “난이도 조정이라, 그래 맞아! 숫자가 아니라 영어자판이었어.”
    “영어자판이라고요?”
    “리재경은 휴대전화 키패드의 문자와 기능을 최대한 활용한 거야.”
    “가만! 그러면 ‘비-이-밀의 방’을 영어로.”
    “아니지.”
    “그럼요?”
    “방은 단순히 일정한 공간이라는 의미 이외엔 없어. 그러니까 비밀장소라는 것을 암시하는 수단일 뿐이란 소리야. 따라서 리재경이 말하고 싶었던 진짜 의미는 ‘비-이-밀’에 담겨 있는 거야. 물론 그 중요성 때문에 붙임표까지 사용해 길게 늘였고.”
    “팀장님 말씀대로 영어자판으로 변환을 시켰더니 ‘J*W-TW-JWG.’라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걸 다시 숫자로 변화시키면 ‘5*9-89-594.’입니다.”
    “하지만 팀장님, 이 번호는 지난번 유진이가 말했듯이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계좌번호 구성체계와 맞지 않습니다.”
    “비-이-밀. 비밀. ‘Secret’, ‘Not the wheat’, ‘B-MIL’. ‘B-2-MIL’. B-2-MIL!”
    “왜요, 팀장님?”
    “‘B-2-MIL’을, 그러니까 ‘비-투-밀’을 숫자를 활용해 여러 가지 경우의 수로 다시 변환시켜 봐.”
    “알겠습니다. 우선 숫자로만 구성된 ‘22645’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문자 B를 사용할 경우는 ‘B2645’가 됩니다. 물론 ‘22MIL’과 ‘2BMIL’·‘2B645’ 등도 있습니다만 현실적으로 은행에서 거래용도로 사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됐어! 유진 씨. 은행에 그 숫자구성과 비슷한 상품이 있나 모두 확인해. 특정계좌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어.”
    “알겠습니다.”

  • “그래, 알고리즘(Algorism·문제해결방법) 분석은 끝났소?”
    “문제해결방법과 고속화의 테크닉에 있어선 거의 완벽했습니다.”
    “그럼 동무의 실력으로도 불가능하단 소리요?”
    “알고리즘은 여러 단계의 유한한 집합으로 구성되는데 각 단계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연산을 필요로 합니다. 이때 각 연산이 명확한 의미를 가지는 명확성과 계산이 실행 가능한 효율성에선 오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소스코드에는 시스템의 착오 또는 오작동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오류가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부분을 수정했습니다.”
    “수고했소.”
    “감사합니다, 부조장 동무.”
    “당과 공화국은 앞으로 동무에게 더 큰 과업을 맡길 것이요. 그런데 지금 수행하는 작업은 무엇이오?”
    “마지막 단계로 제가 고안한 알고리즘이 합당한 입력값에 대해 올바른 결과를 도출해 내는지 그걸 밝히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알겠소, 동무만 믿겠소. 그러니 최선을 다해주시오.”
    “물론입니다.”
    “그럼 분석이 끝나는 대로 작업실로 나오시오.”
    도시는 아주 작은 사적인 공간들이 모여 거대한 하나의 공적인 공간(公的)을 구성한다. 그 사적인 공간에서 밤을 지새운 눈들이 껌벅거리고 있었다. 그들 중 은혁은 숙소에 남아 최적의 경우와 최악의 경우를 분석했다. 그리고 오류를 찾아내 바로잡는 과정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이번 작전의 경우는 최적의 값이 가장 잘 끝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결과의 도출을 의미했다. 그리고 최악의 값은 당과 조국에 배신자로 기록되지 않기 위한 영웅적인 자폭이었다.
    “은혁 동무, 어케 됐소?”
    “완벽합니다.”
    “훌륭해요! 결국 은혁 동무가 또 해냈군.”
    “홍화 동무, 고맙습니다.”
    “정말 수고가 많았소.”
    그로부터 두 시간쯤 뒤. 은혁이 작업실에 나타났다. 그리고 곧바로 결과가 매우 긍정적이었음을 표시했다. 그러자 피오기가 몇 발자국 걸어와 암사슴을 통째로 삼키는 비단구렁이처럼 죽음의 포옹을 했다. 일순간 작업실의 분위기는 은혁의 성공적인 과업완수로 인해 긍정적으로 변했다. 은혁은 분석결과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흥분이 빠르게 식고 무거운 결의가 심장에서 불덩어리로 변했다.
    “됐소! 동무들. 현장상황을 제외한 기본적인 전투준비가 모두 끝났소. 따라서 더 이상의 생각은 필요 없소. 이제부터는 오직 행동만 남았소. 그리고 이번 공격전투의 총지휘는 조장 동무가 아닌 내가 맡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부조장 동무.”
    “또한 이번 공격전투는 정찰총국 요원들만 아는 절대비밀로 해야 하오.”
    “명심하겠습니다.”
    “좋소! 오늘 목표물에 대한 공격전투는 나와 홍화 동무가 전담할 것이오. 그리고 은혁 동무는 외부에서 상황을 통제하시오. 또한 도주로도 최대한 안전하게 확보하고. 마지막은 정해둔 약속장소에 먼저 가서 대기하는 것이오.”
    “잘 알겠습니다.”
    “자, 그럼 준비한 차량에 무기부터 탑재하시오.”
    “쾅!”
    “헉! 조장 동무.”
    지원의 표정이 심드렁했다. 지원은 수평선에 걸린 가시철사 같은 눈을 하고 조원들의 한가운데로 곧장 걸어 들어왔다. 그리곤 비밀무기고를 개방해 이미 작업대 위에 진열해놓은 개인화기들을 내려다보며 그 옆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연막탄 옆에 놓여 있던 돌격소총 하나를 집어 들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혁명과 저항, 반란과 테러의 상징인 AK-47과 흡사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을 개량한 AK-74였다. 거기다 테러활동에 적합하도록 총기의 총열부분에 총성과 광원을 감쇄시키는 소음기까지 부착해 완전무소음 자동 돌격소총으로 개조된 상태였다.
    “이건, AK-74 자동보총이군.”
    “…….”
    “부조장 동무, 무기를 진열해놓은 것을 보니 파괴공작을 하러가는 것 같은데. 아니오?”
    “맞소.”
    “무슨 전투인데 조장인 나에게 한마디 보고도 없이 무기고를 멋대로 개방한 것이오. 더구나 조장의 고유권한인 전투명령까지……. 이건 분명히 월권이오. 따라서 지금 당장 동무를 즉결사살시켜도 내겐 책임을 물을 수 없소.”
    “…….”
    “그러니 지금 상황을 설명하시오.”
    지원은 피오기의 심장을 정조준한 채 위협적인 사격자세를 취했다. 동시에 비누가 손에서 미끄러지듯 손가락이 방아쇠울로 빨려 들어갔다. 지원의 눈빛은 매섭고 사나웠다. 하지만 피오기 역시 공포를 즐기듯 최악의 선택을 했다. 더 나아가 할로윈의 호박귀신처럼 적대적이고 냉소적인 눈빛으로 지원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조장 동무, 이번 공격전투는 전적으로 내 고유임무요.”
    “아, 그러니까 나에겐 보고할 의무조차 없다.”
    “맞소. 더구나 동무는 내게 이미 약속하지 않았소?”
    “약속!”
    “그렇소. 내 비밀임무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내가 그랬소?”
    “똑똑히 기억하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내가 재생시켜줄 수도 있소.”
    피오기는 무한한 절대권력자처럼 오만하고 당당했다. 아니, 총에 겨눠진 상태인데도 부정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공격적이었다. 거기다 잔인하고 소름끼치는 입가의 씰룩거림으로 심리적 우월감까지 드러냈다. 무기 없는 선제공격의 시작이었다. 지원은 자신의 협박이 피오기에게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소. 하지만 이번 공격전투에 대한 후과는 전적으로 동무 개인의 것이오.”
    “물론이오. 또한 성공도 오로지 내 것이오.”
    “그건 신이 정말 죽었다는 걸 의미하겠지. 아니 그렇소?”
    “그런가? 아참, 조장 동무. 정찰총국 요원들과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뭔 줄 아시오?”
    “동무가 나를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트릴 심산이오?”
    “우린 생명에 미련이 없소. 오직 당과 인민을 위해 동정심 없이 광신적으로 죽을 때까지 혁명투쟁을 계속할 뿐이오. 하지만 국가안전보위부의 요원들은 생명에 미련이 많은 것 같소. 당장 방아쇠 당기는 걸 주저하는 조장 동무만 봐도 그렇고. 크크크.”
    “동무의 말을 듣고 보니 갑자기 내 손가락이 미워지기 시작하는군.”
    “거기다 용기까지 부족하고, 아니 그렇소?”
    “동무가 전설적인 영웅주의자라는 건 나도 이미 알고 있는 바요. 거기다 동무는 악마 같은 교활함으로 증오와 폭력의 씨앗을 철저히 미화시키지.”
    “이거야, 원. 인터넷 댓글만큼 가혹하군.”
    “전~혀, 동무는 위험한 광인(狂人)이오. 그래서 동무의 말을 듣다보면 내장을 꺼내먹는 것처럼 역겹소.”
    “아무리 역겨워도 이미 남조선에 동화된 부르주아보다는 아닐 것이오.”
    “남조선에 동화된 부르주아라. 그동안 동무에 대한 내 믿음이 부끄럽소. 혹시라도 동무가 북조선의 인민들을 절망에서 구원하고 공화국을 재건할 적임자로 판단한다면 일찌감치 포기하시오. 동무야말로 오류에 가득 찬 미치광이이며 양의 가면으로 위장한 늑대니까.”
    “공포와 직면할 때마다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인간이 운명처럼 빠져드는 게 궤변인 줄은 나도 미처 몰랐소.”
    “동무의 운명을 확인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하시오. 그때는 절대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이거 오늘은 시간이 없어 아쉽군. 하지만 선택의 폭을 좁혀주어 고맙소.”
    “천만에.”
    “부조장 동무, 벌써 먼동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홍화 동무, 무기의 차량 탑재를 서두르시오.”
    “알겠습니다.”
    “조장 동무, 나를 바라보는 편협한 시각에 대한 고마움으로 양을 잡을 때 고통을 가장 짧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겠소.”
    “!”
    “가죽을 조금 찢고 손을 집어넣어 펄떡거리는 심장을 있는 힘껏 움켜잡는 것이오. 크크크. 그럼 나는 우리의 미래를 훔쳐간 양의 우리나 덮치러 나가겠소. 푸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