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36> 수호천사


    꿈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지독한 악몽이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믿을 수밖에 없는 리얼텍스트(Realtext)였다. 지원은 침대에서 눈을 감은 채로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당겨 온몸을 덮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지원 동무?”
    “예, 보위과장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지난번 동무에게 몹쓸 짓을 한 그 짐승 같은 놈이 누군지 알아냈소?”
    “아니요, 아직.”
    “하긴, 그럴 정신이 어디 있었겠소. 내가 직접 담당보위원에게 물어봐도 경비대의 보안사항이라 입을 열 수 없다더군. 그나마 생각보다 빨리 안정을 되찾아 다행이오.”
    “일없습니다, 보위과장 선생님. 전 벌써 다 잊었습니다.”
    “그게 어디 생각처럼 쉽게 잊을 수 있는 일이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오. 하지만 어쩌겠소. 이게 다 도주가족을 둔 죄인 걸. 아무튼 동무가 이 참혹한 곳에서 하루속히 탈출하는 방법은 당에 충성심을 인정받아 대남공작원이 되는 것뿐인 것 같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보위과장 선생님?”
    “아마 쉽지는 않을 것이오. 하지만 내가 한번 알아봐 줄 수는 있소.”
    “보위과장 선생님,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대남공작원에 뽑혀도 여기 생활과 별반 차이는 없을 것이오. 더구나 대남공작원은 지원한다고 아무나 선발되는 게 아니거든.”
    “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꼭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바지의 명예를…….”
    “정말 기특한 생각이오. 동무의 이런 의연한 모습을 보면 아마 윤 선배도 흐뭇해 할 거요. 그럼 내가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소.”
    “감사합니다, 보위과장 선생님.”


    지원은 은혜의 불행한 가족사에 대해 모든 걸 알았다. 은혜의 아바지와 오마니는 자신들을 하루아침에 돼지우리로 내몬 하내비를 무척 원망하고 증오했다. 그리고 몇날 며칠 음식을 끊어 굶겨 죽였다. 심지어 배고픔을 참지 못해 사체의 일부를 식용으로 먹는 엽기행각까지 벌였다. 그런데 그것이 담당보위원에게 발각됐다. 그래서 아바지와 오마니가 늑대로 사납게 길러진 경비대 군견들에게 산 채로 물려죽는 공개처형을 당했다. 당시 은혜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자신의 불행한 가족사에 대해 끝까지 부정했다. 그리고 아직도 관리소 어딘가에 가족들이 살아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 불안전한 믿음이 은혜를 하루하루 지탱해준 힘이라는 사실을 지원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그때 나는 오로지 하나만 생각했어. 이건 눈 뜨면 사라지는 꿈이라고! 지독한 악몽이라고! 그리고 나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노력했어. 왜냐고? 그래야 내가 본 지옥이 내 가슴속에서 조금이라도 타 재가 될 테니까.”
    이내 지원의 눈이 습자지처럼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의 이미지가 서서히 뒤틀리며 왜곡되기 시작했다. 물론 희뿌옇게 흐려진 이미지들 중엔 은혜와 달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둘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지원과 달리 사막에서 발견하는 화석들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그래도 지원은 반가움에 은혜와 달래를 향해 무작정 달렸다. 그런데 얼마쯤 달려가니 지원 앞에 운명을 가로막는 투명한 창이 하나 나타났다.
    “왜, 문이 안 열려?”
    “!”
    그런데 그때 지원은 주변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느끼고 깜짝 놀랐다. 눈물을 훔치고 자세히 보니 자잘한 주근깨가 콧등을 뒤덮은 아주 귀엽고 예쁜 소녀였다. 아니,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요정이었다. 요정은 밝은 빛에 휩싸인 채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자유로이 날아다니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지원은 또 한 번 놀랐다. 요정이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과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넌 열 수 있어. 너의 순수한 눈물이 바로 그 증거야.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봐.”
    “그런데 넌 누구니?”
    “나? ! 난 너의 수호천사야.”
    “수호천사?”
    “응, 쉽게 설명하면 난 너의 내면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나 할까. 물론 무슨 생각을 하고, 또 무슨 꿈을 꾸는지도 알 수 있어.”
    “그렇구나. 난 지금까지 천사나 요정은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줄 알았거든.”
    “사실 현실과 동화는 실제보다 과장된 허구성의 측면에서 그 경계가 아주 모호하다는 공통점이 있지. 아무튼 난 착한 천사야. 봐봐. 등에 크고 예쁜 나비날개가 있잖아. 지금 내 주위를 날아다니는 호랑나비들 보이지?”
    “그래.”
    “그런데 천사도 두 종류가 있어. 하나는 나처럼 인간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착한 천사고 또 다른 하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유혹해 타락시키는 나쁜 천사야. 한마디로 인간들의 영혼과 마음을 해치는 극악한 존재지.”
    “그렇구나!”
    “행동이 간교하고 생김새부터 아주 섬뜩해. 이마엔 두 개의 커다란 뿔이 있고 털이 무성한 염소 발과 갈라진 뱀의 혀 거기다 박쥐의 얼굴과 핏빛 눈동자도 가졌지. 그리고 어떤 악마는 피에 굶주려 매일 밤 젊은 여자의 심장을 꺼내먹는다는 소리도 들었어. 물론 죽은 시체는 더럽고 불결한 짐승의 구덩이에 버리고.”
    “정말?”
    “응. 또 악마는 수시로 인간들을 시험에 빠트리기도 해.”
    “어떻게?”
    “우선 옆에서 온갖 감언이설로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부추기지. 그러니까 너는 절대 그런 악마의 꾐에 넘어가면 안 돼. 알았지?”
    “응, 알았어.”
    “우리 재미난 놀이할까?”
    “재미난 놀이!”
    “응, 보물찾기 말이야.”
    “뭐를 찾아야 하는데?”
    “내가 요술날개인 상상력을 빌려줄 테니까 지금부터 진실을 찾아봐.”
    “진실?”
    “응, 보이는 진실 말이야. 그 진실이 너에게 ‘운명의 길’이 되어줄 거야.”
    “그런 게 있어?”
    “응, 있어. 그 보이는 진실을 찾으면 넌 아까 그 문도 활짝 열 수 있어.”
    “정말!”
    “아마 너의 손끝이 닿으면 저주가 풀려 얼음처럼 사르르 녹아내릴걸.”
    “알았어, 한번 해볼게.”
    “그럼 난 이만 가봐야겠다.”
    “훗! 고마워.”
    수호천사가 지원의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지원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고독을 치유하는 그림을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분명 침대의 출렁거림이 느껴지는 현실 속 이야기였다. 지원은 이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거기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 한 다발이 채에 거른 듯 유난히 밝고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지원은 커피를 들고 테라스로 나왔다. 그리고 현우가 잠긴 고요한 머그컵을 들여다보았다. 커피 속의 뿌리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카페인이듯 이제 지원에게 있어 현우는 삶 속의 카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