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17> 소포

    제목 : 소녀와 금붕어

    소녀의 눈에는 연못이 있고,
    그 풍경 속에 금붕어가 산다.
    세상으로 열린 속눈썹이
    수초처럼 하늘거릴 때마다
    바람처럼 흘러드는 시냇물소리.
    찰랑거리는 물결에 씻긴 눈동자는
    불꽃심을 가둔 쪽지다.
    입을 대고 뻐끔뻐끔 읽다보면
    하얀 배에 새겨지는
    검은 먹물의 뜨거운 문신(文身).
    금붕어의 가슴으로 담기에는 차고 넘치는

    진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람이
    소녀에게서 분다.
    연못의 거울에 비친 세상은
    찌그렁이가 없다.
    이슬로 세상 끝에 매달렸지만,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어
    물의 나라 전설은 아는 이가 없다.
    보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 그림.
    그 위로 황후의 미소가 번진다.
    소녀와 금붕어는
    연못에 떨어진 별빛을 모아
    그렇게 한소끔 꿈을 끓인다.

    ○ 추신 : 지수 씨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느 면에서 사랑은 뇌가 만들어내는 전기신호의 중독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현우는 요즘 너무 행복하다는 것도 때론 두려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현우는 잠시 손가락으로 책상을 긁적거리다가 결국 엔터키를 눌렀다. 동시에 현우의 갈등도 우표처럼 메일에 붙어서 날아갔다.

    그로부터 30분쯤 뒤, 노트북의 모니터에서 강아지가 뛰어다니며 윙크를 날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넉살도 좋았다. 마치 달래 같았다.


    현우 씨에게
    현우 씨, 당신은 누구신가요?
    당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진정 제가 될 수 있는 건가요?
    당신이라는 숲 속에 들어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다른 나를 만나고,
    깊은 밤 바람그네를 탈 수 있는 기쁨을 준 당신의 벤치가 고마워요.
    사실 전 당신의 창가에서 그림자로 남을까봐 두렵습니다.
    가벼운 토카타(즉흥풍의 화려한 악곡)로 당신의 잠을 깨울 수 있나요?
    진실을 말해주세요.
    요즘은 아침마다 제 눈에 여린 햇살이 스며들까봐 무서워요.
    목소리를 잃은 새는 슬프거든요.
    전 당신의 자랑이 되어 푸른 하늘을 자유로이 날고 싶어요.
    제 날개를 당신의 마법으로 만들어주세요.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나요?
    진정 꿈이라면 제 꿈이 아니라, 현우 씨의 꿈에 제가 있고 싶어요.
    이제 제가 현우 씨의 마음에 노크를 할게요.
    들어가도 되나요?


    지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세상에서 가장 착색이 잘되는 천연염료였다. 그래서 답장을 한 번 읽었을 뿐인데도 현우는 이미 정겨움으로 화사하게 물들고 말았다. 메일을 읽고 또 읽은 현우는 마음이 들떠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수 씨, 제에게 만약 불행한 일이 생겨 저의 기억력이 어느 음악가처럼 단 7초뿐이라면 저는 지수 씨를 기억하겠습니다.”

    [정말요? 고마워요. 어디서 제가 들었는데요. 누군가 물었대요. ‘죽음이 무엇이냐고?’ 그러자 질문을 받은 사람이 대답을 했대요.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누가 만약 저한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할 수 있어요. 더 이상 현우 씨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는 그 사람의 영혼이잖아요. 돌아봐도 하나 변함없는 일상이지만, 현우 씨와 함께 하는 일상은 보는 마음부터가 달라요.]

    스크린의 빛이 점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현우는 그 여운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현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손비아가 놓고 간 유럽의 패션잡지였다. 패션잡지는 책상 한쪽 구석에서 다른 보고서들 속에 끼어 간신히 손가락만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현우가 손을 잡아주자 잡지는 단숨에 밖으로 뛰쳐나와 몸을 흔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책상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그런데 여기에 왜 내 이름이…….”

    카드는 여고생들의 손수건처럼 청순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꽃무늬가 프린팅된 하얀 속지가 봉투 밖으로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펼쳐진 속지엔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손비아의 속마음이 빼곡했다. 그러나 몇 줄 읽지도 않아 그늘이 드리웠다. 현우는 혼란스러운 마음에 매듭을 짓 듯 속지를 도로 봉투에 넣었다. 그때 창문 틈으로 한줄기 바람이 불어와 현우의 볼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곤 책상 가장자리로 카드를 밀었다. 결국 손비아의 비밀편지는 낙엽처럼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쓰레기통의 먹이가 됐다.

    “그래, 세상에 지켜야 할 사랑은 오직 하나뿐이야.”

     

    오후 4시경. 정원은 태권도 도복을 입고 체육관의 무도장에 있었다.
    무도장에선 신입요원들의 태권도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신입요원들은 맨 먼저 팔굽혀펴기로 가볍게 몸 풀었다. 정원도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쪽으로 비켜나 몸을 풀었다. 곧이어 새내기들이 겨루기를 했다. 그런데 국정원의 태권도 수업은 일반 태권도 수업과 다른 특징이 있다. 발차기를 할 때 태권도 경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앞돌려차기보다는 실전에서 도움이 되는 주먹과 옆차기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겨루기를 하는 선수들에게 사범은 수시로 옆차기와 뒤후리기를 주문했다. 그리고 선수들끼리 조금이라도 가까 이 붙을라치면 곧바로 목소리를 높여 주먹타격을 요구했다.

    “자넨 왜 국정원에 들어왔나?”
    “의사가 되려고 들어왔습니다.”
    “의사?”
    “예. 저는 인간의 병든 몸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국가의 도덕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국가의 도덕이라, 그 판단은 검찰의 몫이 아닌가? 그렇다면 국정원 시험이 아니라 사법고시를 봤어야지. 지금도 늦지는 않았네, 나가는 문은 저기네.”

    “우리의 몸에서 도덕적인 판단은 뇌의 내측 부분에 있는 대상회 (Cingulated gyrus) 라는 작은 조직덩어리가 합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검찰의 몫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국가의 미래와 안보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은 국정원이 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국정원은 대한민국의 영혼이며, 도덕적인 스위치입니다.”

    “우~아!”
    “짜식, 뭐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워. 쉽게 말해봐?”
    “한마디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남아로 태어나서 폼 나게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는 힘으로 국가와 민족에 손톱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짜식,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이해하기도 쉬웠잖아. 암튼 단순한 게 좋아. 최정원?”
    “예. 사범님.”
    “인생은 단순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거다. 물론 무술에 있어서도 그 단순함이 파괴력을 증가시킨다. 복잡하면 보기에는 화려할지 몰라도 파괴력은 반감되고 더불어 적들에게 빈틈을 많이 노출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내 말 명심해라. 알겠나?”
    “예, 잘 알겠습니다!”

     

    “팀장님?”
    “어, 유진 씨도 왔네. 왜, 몸 풀게?”
    “팀장님, 내일 시간 좀 있으세요?”
    “시간?”
    “예. 사실 제가 한 달 전에 화려하게 독립을 했거든요.”
    “그럼 집들이?”
    “겸사겸사요. 훗!”
    유진은 깔끔하면서도 단정하게 보이도록 검은색 정장 수트를 입고 있었다. 속에는 작은 리본이 달린 흰색 블우스로 여성스러움도 표현했다. 정원은 오늘따라 신기하게도 유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브라질에서 팔랑거린 나비의 날갯짓이 텍사스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나비 효과를 경험하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