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는 국가 아니다…아리랑이 국가”라며 민혁당도 ‘조작’ 주장‘일꾼’ ‘현장말’ 등 입에 달고 “20대 운동권처럼 일할 것”이라 ‘구석기 인물’
  • 지난 주말 인터넷은 ‘이석기 애국가 발언’으로 들끓었다. 이석기 통진당 의원이 “애국가는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 중 하나에 불과할 뿐 국가가 아니다”라는 말 때문이었다.

  • ▲ 지난 주말 이석기 의원의 '애국가는 국가 아니다' 발언으로 주말 내내 시끄러웠다.
    ▲ 지난 주말 이석기 의원의 '애국가는 국가 아니다' 발언으로 주말 내내 시끄러웠다.

    그런데 당시 오고 간 말을 확인해 보니 문제가 한 둘이 아니었다. 그 중 최고는 바로 ‘민혁당은 조작’이라는 주장이었다.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이란?

    1989년 3월 주사파 운동권으로 유명했던 하영옥(서울대 법대 82학번) 씨, 박 모 씨와 이석기는 ‘반제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반제청년동맹’의 지도이념은 ‘김일성 주체사상’이었고, 강령에는 ‘주체형 새 세대 청년 혁명가를 육성․단련한다’고 돼 있다.

    여기서 하 씨는 중앙위원장, 이석기 씨와 박 씨는 중앙위원을 맡았다. 1989년 4월에는 ‘강철서신’ 김영환 씨도 합류해 중앙위원이 됐다.

  • ▲ 환하게 웃고 있는 민혁당의 주인공 하영옥(왼쪽)과 이석기.
    ▲ 환하게 웃고 있는 민혁당의 주인공 하영옥(왼쪽)과 이석기.

    1991년 2월 김영환 씨는 “반제청년동맹으로는 전국적인 조직사업을 일으키기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 받아들인 조직원들은 지하당으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다음달 이들은 서울대 공대 뒤편 관악산 입구에서 ‘민족민주혁명당(이하 민혁당)’ 창당식을 가졌다.

    김영환, 하영옥, 박 모 씨 등이 민혁당 중앙위원을 맡고, 중앙위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를 뒀다. 이 씨는 경기남부위원장을 맡았고 그를 관리하는 지도책이 하영옥 씨였다.

    4.11총선 때 서울 관악을에서 당선된 이상규 통진당 의원은 수도남부지역사업부, 이의엽 전 공동정책위 의장이 부산지역위원회를 맡았다. 이들도 나중에는 경기동부연합으로 분류됐다. 이때 이석기 씨의 ‘당 서열’은 5위 정도였다고 한다. 김영환 씨와 하영옥 씨가 최고 서열이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론가’인 김영환 씨는 당시 북한 공작원을 만나 강화도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평양을 여러 차례 다녀왔다고 한다. 그러나 김영환 씨는 김일성을 만나본 뒤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고.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만들지도 않았고, 그 실상이 말과는 전혀 달랐던 데 실망한 것이다. 결국 김영환 씨는 1997년 7월 ‘민혁당 공식 해체’를 선언하고 떠났다. 김영환 씨가 떠난 이후 공안당국도 ‘민혁당’이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민혁당 관계자들은 ‘해체’를 거부했다. 이후 하영옥, 이석기, 변호사가 된 박 모 씨 등이 ‘민혁당 재건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그들의 존재는 1998년 12월 18일 여수 돌산도 앞바다에서 격침된 북한 반잠수정 속 문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났다.

    우리 해군은 당시 수심 140미터에 침몰한 반잠수정을 인양하기 위해 심해구조대(SSU) 대원들을 동원해 ‘포화잠수’까지 시도하며 인양했다.

  • ▲ 국가정보원은 1999년 9월 9일 민혁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 국가정보원은 1999년 9월 9일 민혁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인양한 반잠수정 속에서는 북한 대외연락부(現225국. 간첩단 '왕재산 사건'도 연루) 소속 간첩이 ‘민혁당’을 지도했던 흔적이 발견됐다. 이때 공안당국은 반잠수정에서 찾은 전화번호 수첩 등을 추적해 사살된 간첩의 이름은 ‘진운방’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공안당국은 이후 자료 검증을 통해 ‘민혁당’ 연루자인 김영환 씨, 조유식 前 ‘말’지 기자, 하영옥 씨, 심재춘 씨 등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김경환 ‘말’지 기자와 달아난 박 모 변호사에 대해서도 수사를 계속했다. 이때 박 변호사와 함께 달아난 사람이 바로 이석기 의원이다.

    북한 공작원과 함께 일해 놓고도 ‘조작’?

    이석기 의원은 2년이 넘게 도주하던 중 2002년 5월 체포됐다. 이후 2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복역하다 2003년 盧정권이 들어서면서 8․15 특사로 풀려났다.

    당시 종북진영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불과 몇 달 갇혀 있던 이석기를 ‘양심수’라 부르며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석기 의원은 지난 주 기자들을 만나 ‘민혁당 사건’은 ‘정치적 탄압’이며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수사 때 한마디도 한 적이 없고 지문 하나 찍은 적 없다. 사실 여부를 떠나 민혁당 자체가 어마어마한 괴물이 아니냐.”

    이 의원의 주장처럼 ‘민혁당’ 사건은 ‘조작’일까.

  • ▲ 국가정보원은 1999년 9월 9일 민혁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1, 2심 판결문을 보면 이석기 의원은 1994년 8월 하영옥 씨에게 ‘1994년 경기남부위 상반기사업총화’ 보고를 이렇게 했다.

    “각급 조직들은 자기 몫을 다하고자 열성을 높였으나 (김일성) 서거 이후 놈들의 탄압으로 자체 역량 보호에 내몰리면서 군중사업을 수세적으로 전개, 상반기 사업의 탄력성을 떨구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김영환 씨나 다른 주사파 운동권 출신들도 그가 철저한 ‘종북주의자’라고 거리낌 없이 증언하고 있다. 1998년 北반잠수정을 격침한 해군 장병들과 이를 꺼낸 SSU 대원들도 확실한 ‘증인’으로 남아 있다. 이 의원은 이런 모든 걸 '조작'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석기 의원, 대체 뭘 원하는 걸까?

    지금까지 알려진 종북세력들은 보통 '입으로는 명분, 몸으로는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석기 의원은 그 중에서 뭘 더 중요하게 여길까.

    이석기 의원은 1962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경기도 성남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1980년 S고교를 졸업한 뒤 1982년 한국외대 용인캠퍼스의 중국어통번역학과에 입학했다. 이 의원은 1985년 6월 학내 시위로 제적된 뒤 ‘6.29선언’ 직후인 1987년 9월 ‘제적학생 구제 조치’에 따라 재입학했다.

    이 의원이 주사파와 만나게 된 건 ‘가면극 연구회’ 등 이념서클에서 활동할 때로 보인다. 이 의원은 이후 반제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하며 ‘주사파’의 ‘이너서클’로 올라선 뒤 경기동부연합의 자금줄 역할까지 맡았다.

  • ▲ 국가정보원은 1999년 9월 9일 민혁당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자금줄’ 역할을 했던 탓인지 이 의원의 재산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가 번 돈이 모두 민노당(또는 통진당)으로 회수되어 정치자금으로 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각에서는 그가 번 돈 대부분은 개인적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실제 “하루 18시간씩 김밥 먹으며 일했다. 진보진영과 거래해서 번 돈이 없다”던 그의 신고재산은 7억 6,128만 원. 이 밖에도 CNP그룹 명의로 여의도 대형빌딩의 한 층을 사용 중이라고 한다.

    이 의원 회사 전체로는 얼마를 번 걸까. 이 의원은 2005년 2월 자본금 4억 원인 ‘CNP전략그룹(現C&커뮤니케이션즈)’을 만들었다. CNP전략그룹은 2011년까지 모두 12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중 40억 원은 민노당 또는 통진당과 관련된 것이었다. 민노총, 전농 등까지 합치면 그 비율은 훨씬 커진다.

    ‘여론조사업체’라는 사회동향연구소도 세웠다. 대표는 물론 이 의원이었다.

    이 의원은 경기동부연합의 ‘기관지’로 알려진 인터넷 매체 <민중의 소리> 대표도 맡았다. <민중의 소리>는 네이버 뉴스캐스트 공급권자가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벌이면서 네이버측에 같은 기사를 수십개씩 올렸다는 사유로 네이버서 퇴출됐다. 최근에는 한 기자가 회사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노동부에 고소했다는 소문도 돈다.

    이런 사업체를 만들어 ‘자칭 진보진영’과의 거래를 통해 막대한 돈을 번 이석기 의원. 그가 왜 ‘좌파 매체’는 뺀 채 조․중․동 기자들을 불러 ‘책임 일꾼’ ‘현장말’ 등 북한말을 쓰고, 엄연히 검증이 된 ‘민혁당 사건’까지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뭐 였을까. 갈수록 그의 '속내'가 궁금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