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승려 2명 소속 실불회는 좌파 성향..간첩 빨치산 보고 열사-의사 호칭
  • 밤샘 도박 승려 연루 '실불회(實佛會)의 정체'  
      
    2005년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 '간첩-빨치산 묘역' 조성

    김필재    
     
    전남 장성 백양사 인근 호텔방에서 승려들이 밤샘 도박을 벌인 사건과 관련, 좌파(左派) 성향 승려 모임인 ‘실천불교전국승가회’(실불회)와 조계종 중앙종회의 종책(宗策) 모임인 ‘무차회’(모태는 ‘실불회’로 알려져 있음)가 도마에 올랐다.

    이번 도박 동영상에 등장한 승려 8명 가운데 승려 토진과 의연 등 2명이 ‘실불회’ 집행위원이자 ‘무차회’ 소속 종회 의원이다. ‘무차회’는 14일 “사태의 준엄함을 통감한다”면서 종책 모임 해체를 선언했다. ‘실불회’는 1994년 승려 서의현의 총무원장 3선 시도를 저지하며, 소위 ‘종단 정화 개혁’을 주도했던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그동안 광우병 촛불시위, 4대 강 반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등 여러 사회 현안에 대해 좌파적 입장을 고수해왔다.

    2005년에는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 비전향 장기수 6명의 묘역을 조성해 ‘통일애국열사’, ‘의사(義士)’ 등의 표현을 쓰기도했다. 무차회는 ‘실불회’ 소속 승려들이 중앙종회에 진출하면서 만들어진 종책 모임으로 현재 총 81명인 중앙종회의원 중 12명이 속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사]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조성: 간첩-빨치산 묘역(墓域)에 묻힌 인사들의 面面

    HID, 파주 보광사 '간첩-빨치산 묘비' 해체!
    '유해 옮기지않으면 또 다시 올 것'
    2005년 12월5일자 보도

  •  파주 보광사 ‘간첩-빨치산 묘역’에 묻힌 인사들의 정체

    ▲류락진(2005년 4월 사망): 죽는 날까지 大韓民國 파괴활동 주력

    류락진은 6.25사변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57년 가석방된 후 63년 ‘혁신정당’사건으로 구속돼 67년 석방됐고, 71년 다시‘호남통혁당재건委’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88년 가석방됐다.

    출소 후 운동권을 상대로 빨치산 강연을 벌여 온 류낙진은 94년‘구국전위’ 사건으로 구속돼 8년형을 선고받고 99년 광복절특사로 석방됐다.

    93년 1월 조직된 구국전위는 ‘조선노동당’의 남한 내 지하조직으로서 창립선언문과 강령 및 규약에서 북한의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조직의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규약 중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구국전위는 위대한 金日成 동지께서 창시하시고 친애하는 지도자 金正日 동지께서 발전 풍부화시켜 오신 새로운 노동계급의 혁명적 세계관이며 남반부에서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완수의 가장 정확한 학설인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유일한 지도이념으로 삼는 주체(主體)형의 金日成주의 지하조직이다”

    류낙진의 反국가활동은 99년 석방 이후에도 죽는 날까지 계속됐다. 그는 2002년 백운산지구 빨치산위령비 비문(碑文)작성 사건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류낙진은 이적단체(利敵團體)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하다 2005년 사망하는데, 그의 가족들은 부의금 5천만 원을 통일운동에 써달라며 범민련 남측본부에 기탁했다.

    류낙진은‘어린 신부’로 인기를 끈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조부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조선일보를 포함한 대부분의 미디어들은 ‘문근영 외조부 통일운동가 류낙진 氏 사망’등의 제목으로 연예면(面)에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최남규(1999년 사망): “백두산 장군에 대한 충성”으로 전향 거부

    스스로 “백두산 장군(김정일)에 대한 충성” 때문에 전향하지 않았다고 밝혔던 최남규는 1912년 함경북도 명천 태생으로 청진대학 지리학 교수로 재직 중 57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남파 후 서울서 간첩활동을 벌이다 1957년 9월12일 동료 공작원의 밀고로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고 1973년 만기출소했다. 최남규는 출소 후 3년 간 엿장수 생활을 하다 1975년 7월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되어 1989년 풀려났다. 출소 직전인 1989년 5월11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 ‘그날 그때가 올 때까지’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가고픈 내 고향에 가고파도 내 못가네. 광복된 이 조국에 38선 웬 말인가 이 땅 뉘 땅인데 주인행세 누가하고 아름다운 금수강산 짓밟질랑 말고서 돌아가라, 사라져라, 어서 꺼져버려라. 고-홈 고-홈 양키 고 홈”

    ▲정순덕(2004년 사망): 1963년 체포된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1933년 경남 산청 출신으로 6.25사변 발발 후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남편을 따라 1951년 스스로 빨치산이 됐다. 정순덕은 국군의 대대적 토벌작전으로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쫓겨 가 빨치산 활동을 지속하다 1963년 11월 체포됐다.

    이후 정순덕은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 간 복역하다 1985년 8월 가석방됐다. 정순덕은 2003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왜 북한에 가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전향서를 썼다고 하지만, 강제로 한 거니까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었다.

    ▲금재성(1998년 사망): 인민군 제대 후 간첩으로 남파

    1924년 충남 대전 출생인 금재성은 보통학교 졸업 후 원산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1944년 금촌 소년 형무소에 투옥됐다. 금재성은 출소 후 45년 공산당에 입당해 독찰대(헌병) 원산지구 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6.25사변 발발과 함께 인민군으로 참전했다.

    정전(停戰) 후 제대해 원산 주을전기전문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던 중 1956년 정치공작원으로 남파되어 고향인 대전에서 간첩활동을 벌였다. 이듬해 공안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고 1972년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다.

    ▲손윤규(1976년 사망): 빨치산 활동하다 사형받아

    전북 부안 태생의 손윤규는 해방 후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6.25사변 당시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이후 1955년 경찰특무대에 구속되어 육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76년 옥사(獄死)했다.

    金泌材(김필재) spooner1@hanmail.net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