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포스트모더니즘과 종북이 결합한 복합체’가 떴다!'나꼼수 현상'은 '샹큘롯뜨와 자코뱅이 결합한 괴물'의 유사체
  • 주범은 석방, 종범은 감방

    화성인 판결로 곽노현이 교육감에 복귀했습니다. 돈을 건넨 주범인 곽노현은 석방되고 돈을 받은 종범인 박명기는 실형을 사는, 웃기지도 않는 판결이지요. 그러고 보면 곽노현은 참으로 깊은 통찰을 가진 사람인 셈입니다. “내가 주면 선의, 내가 준 것을 받으면 범죄”라는 진실을 일찌감치 꿰뚫어 본 셈이니까요.

    그러나 이 웃기지도 않은 화성인 판결을 곰곰이 뜯어보면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화성인 판사 김형두 본인입니다. 왜냐? 석방해 주면 곽노현이 알아서 사퇴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곽노현은 사퇴는커녕, 130만 어린이 및 청소년의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감 자리에 눌러앉아 버티고 있습니다. 어린이 및 청소년들은 확실한 교훈을 매일매일 체득하고 있는 셈입니다.
    “안면에 철판 깔고 무조건 권력을 잡아라. 범법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 내가 하는 범죄는 정당한 행위이다”
    이런 교훈을 배우고 있는 것이지요.

     

    화성인 판사가 최대의 피해자

    김형두 판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곽노현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7년 이후에 운동을 시작한 늦깍이 운동권 인사입니다. 좋은 시절되니까 민주화운동이라는 열차에 올라 탄 것이지요.

    제일 먼저 한 일이 ‘인민민주주의 법학회’를 만든 것이었죠. 스탈린은 인민민주주의라는 ‘획기적’인 개념을 내놓았습니다. 막무가내로 사회주의 혁명을 하지 말고 집요하게 몇 년에 걸쳐서, 최상위, 차상위, 차차상위…이런 식으로 사회 상류층을 차례로 제거해 가는 전술입니다. 곽노현은 인민민주주의 전술을 적용하여 먼저, 감옥에 갇힌 전두환, 노태우를 때렸습니다.

    그는 전, 노를 일종의 혁명재판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싸움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명세를 탄 다음에는 삼성 이재용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오프라인 시민판의 싸움은 참여연대가 주도했고 법정 싸움은 곽노현이 주도했습니다.  ‘인민민주주의 법학회’ 및 전-노-이재용에 대한 싸움을 통해 곽노현은 서울 법대 후배들을 확실하게 장악했습니다. 곽노현은 이미 법조계 최대의 실세인 셈입니다.

    김형두 판사는 곽노현을 석방시켜 주면 알아서 사퇴하고 처신하기를 기대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당당히 교육감 직에 복귀해서 “쫄지 않고 계속 싸우겠다”고 떠벌이고 있지요. 김형두 판사는 아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일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가장 우스꽝스럽고 타락한 판결을 한 데 대한 책임 전체가 본인에게 밀려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불쌍하지요.

     

    곽노현, 학교파괴자의 본색을 드러내다

    곽노현이 석방되자 마자 한 일은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고교선택제 거부, 다른 하나는 학생타락조례(이는 ‘학생인권조례’로 불리웁니다) 밀어붙이기입니다. 둘다 이미 빈사상태에 이른 학교라는 제도를 최종적으로 박살내는 조치입니다.

    중-고등 학교교육 즉 공교육이 박살난 가장 큰 이유는 하나의 학급 안에 학력차이가 너무 커서 수업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문에 보면, “학교가 학원보다 못 하다”라는 비판이 가끔 나옵니다. 학교선생님은 학원선생님보다 훨씬 더 훌륭한데, 왜 학교가 학원보다 못한 세상이 되었을까요? 한 학급 안에 너무 큰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수영 강습을 예로 들어 보지요. 청소년 국가대표급 소년과, 물에 뜨지도 못 하는 소년이 한 클래스 안에 있을 경우 강습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두 소년 모두에게 그 수영 클래스는 아무 의미가 없는 ‘시간때우기’가 될 뿐입니다.

     

    공교육이 망가져도 학교는 신성하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왜 고쳐지지 않을까요? 철밥통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학교—공교육이 마비되어 붕괴하기 시작한지 이미 이십여년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굴러가는 것은 네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국가는 거두어들인 세금을 써야 합니다. 둘째, 교사는 봉급을 받아가야 합니다. 셋째, 아이는 졸업장을 받아가야 합니다. 넷째, 부모는 어딘가에 아이를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와 둘째는 철밥통의 문제이고 셋째와 넷째는 두려움의 문제입니다.

    10여년전에 교육부 장관 이해찬은 이 같은 끔직한 사정을 합리화하는 명언을 남겼지요. 이해찬은 “학교는 목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칸트의 “인간은 목적이다. 수단이 아니다”란 말을 표절한 말입니다. 이 유식한 듯 들리는 자못 철학적인 명제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소리입니다. 세상에! 그 자체로서 목적인 존재가 몇 개나 되겠습니까? 구원, 해탈, 깨달음, ‘생명의 번영’ 뿐 아닐까요?
    학교는 목적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길러내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 멋있는, 그러나 매우 사악한 명제에 숨겨진 뜻이 무엇일까요? 다름 아닙니다. 이런 소리입니다.
    “학교 공교육이 망가지든 말든 학교라는 제도 자체가 중요하다. 학교는 신성한 철밥통이 되어야 한다.”
    이해찬은 이 사악한 사고방식에 바탕해서 전교조를 합법화시키고 학교 선생님을 ‘최상급 귀족 조직노동자’로 만들었지요. 학교 공교육이 까마득한 심연 속으로 추락할 수 있는 막강한 추락엔진을 달아준 교육부 장관이 바로 이해찬입니다. 그가 교육부 장관을 지낸 시절에 배출된 고교 졸업생들은 특별히 학력이 낮았습니다. 그래서‘이해찬 세대’라고 불리지요. 생년으로 치면 대략 84년 생 이쪽 저쪽입니다.

    공교육을 되살려보려는 시도가 고교 선택제, 수준별 수업, 학점제, 자율고 확대 같은 노력입니다. 전교조 선생님들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이 같은 조치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분들 역시 ‘최상층 귀족 조직노동자’이기 이전에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곽노현이 석방되자 마자 고교선택제를 전면 백지화한 것은 “학교는 목적이다”라는 사악한 사고방식을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명은 서울 130만 아이들의 교육과 미래를 망치는 것에 다름아닙니다. 걸어다니는 교육파괴자—이것이 바로 곽노현이라 불리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교장선생님, 일진짱 앞에 무릎 꿇다—“쫄지마 씨바! 모여! 꼰대랑 한판 뜨자!”

    그의 사악한 업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학생타락조례'(이른바 ‘학생인권조례’)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학생타락조례'에는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 중 ‘교내에서 휴대폰을 사용할 권리’ 같은 것들은 사소합니다. 치명적인 두 개의 독소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는 교내 집회 방조, 다른 하나는 동성애 방조입니다. 둘 다 ‘인권’과 ‘자유’란 이름으로 행해집니다.

    지금 학생들은 얼마든지 집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교내집회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이 시도 때도 없이 교내집회를 가질 때 교사가 이를 말리거나 지도할 자격이 박탈됩니다. 이 경우 일진짱이 학교를 지배하게 되겠죠.
    “쫄지마 씨바. 모여! 꼰대랑 한판 뜨자!”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부르짖으면 수백명의 학생이 모이겠죠. 일진짱이 소집한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가는 왕따당하고 셔틀빵을 하게 되겠죠. 일진짱이 소집한 집회 앞에 선생님과 교장이 부들부들 떨겠지요.

    지금 학부모들은 얼마든지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닦달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 문제가 있을 경우 이에 항의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중고등학생들의 교내집회에 관한 교사의 지도 권한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학교를 박살내자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성애를 찬양하는 소년, 소녀들

    '학생타락조례'에는 또한 “동성애 소년, 소녀를 보호하고 그 비밀을 지켜줘야 한다”는 독소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동성애자들을 잡아 죽이거나 혹은 감옥에 보낸 적이 없는, 관용적 문화를 유지해 왔습니다.
    서양에서는 불과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자들을 잡아 죽이거나 감옥에 보냈습니다. 나치는 수 만 명의 동성애자들을 죽였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은 동성애자들을 감옥에 보내거나 혹은 린치했습니다.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리는 앨런 투린(영국)은 동성애로 처벌받게 되자 청산가리를 묻힌 사과를 한 입 베어물고 죽었습니다. 한 입 베어낸 사과—애플의 로고는 투린의 ‘동성애 사과’를 은유한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미국에서는,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경찰이나 깡패들이 동성애자들이 모여사는 동네에 난입해서 사람을 때려 죽이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야 말로 수천년 동안, 전세계에서 동성애에 대해 가장 관대한 문화를 유지해 온 셈입니다.

    지금 동성애자 운동의 핵심은 ‘동성애자에 대한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성애자 사이의 법률적 결혼, 동성애자 ‘부부’의 자녀 입양권, 군대 안에서의 ‘사랑행위’에 대한 허락 등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동성애를 전면적으로 제도화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역설적으로, 수천년 동안 동성애를 하나의 ‘서브 컬쳐’로서 용인해 왔기 때문에 새삼 동성애를 전면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 더 반발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동성애자를 잔인하게 탄압한 적 없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원초적 죄의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성애자들이 전면적 제도화를 요구하면, 이에 대해 정말 무지막지한 반발이 생겨날 확률이 99.9999%입니다.

    호모 부부? 레즈 부부? 호모 부부 밑에 입양된 소녀? 레즈 부부 밑에 입양된 소년? 군대의 고참 병장과 쫄다구 사이의 동성애 성교?—이런 것에 대한 전면적 ‘인권과 자유’를 요구하면 사회가 빠개져서 원초적 폭력이 튀어나오게 될 것입니다. 

    각설하고, '학생타락조례'의 동성애 ‘비밀유지 및 보호’조항은 무슨 결과를 가져 올까요? 10대 중반의 소년, 소녀들이 동성애를 ‘쿠울(cool)하고 세련된 것’으로 숭상하는 풍조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미 이런 풍조가 상당히 존재합니다.

    청소년기는 자아 의식이 생겨날 때입니다. 이 때의 자아는 세계에 대한 반항을 간절히 원할 때가 있지요. 무엇이 가장 강력한 반항일까요? 도덕적 금기에 대한 반항이 가장 셉니다. 동성애, 근친상간과 같이, ‘생물학적 이유에서 생겨난 금기’(moral inhibition based on biological reasons) 를 어기는 것—이를 짜릿한 것, 자아다운 것으로 느낄 수 있는 나이가 청소년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반항은 참된 자아, 참된 ‘나다움’(becoming oneself)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청소년기의 동성애 충동이나 근친상간 충동은, “무엇이 참된 자아, 참된 나다움에 이르는 길인가?”—이 숭고한 화두를 은폐하고 감추는 타락일 뿐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한마디로, 청소년기에 동성애 충동이 발견될 때에는 부모, 담임, 일반 교사, 상담교사, 친구들이 힘을 모아 이 충동을 걸러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 실험’에 의한 일시적 충동인지 혹은 호르몬 분비와 같은 생리적 특이성에 따른 '특수 사정'인지가 구분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다시 용감하게, 정말 용감하게 “무엇이 참된 자아, 참된 나다움에 이르는 길인가?”라는 화두를 직시하는 태도를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학생타락조례'의 ‘동성애 보호 및 비밀유지’ 의무는 교사와 학부모, 교사와 교사 사이에 동성애 케이스를 상의할 수 있는 통로를 원천적으로 막습니다.

    왜냐고요? ‘학생 본인의 동의 없이는’ 동료 교사와 상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학 전공인 담임 선생님이 동성애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을 발견했을 경우, 이를‘상담지도교사’와 상의할 수 없습니다. 상의하려면 먼저 학생 본인의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학생은 당근 잡아떼겠지요. 그리고 선생님을 헐뜯겠지요.
    “꼰대가 나를 동성애자래! 그 소문을 교무실에 좍 퍼뜨렸어!”학생은 이를 자랑스럽게 떠벌이겠지요.
    동성애를 숭배하는 풍조가 일부에서라도 존재할 테니까요. 선생님은 졸지에 ‘인권사범’이 되어 징계 혹은 해고당하게 됩니다.

    하기야 학생의 아빠, 엄마의 허락을 구하면 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당신 아이가 동성애자인 것 같소”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합리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요? 선생님이 남자라면 “이런 개xx, 남의 집 아이 생사람 잡지말고 니 수업이나 잘 가르쳐!”라고 화를 내거나, 선생님이 여자라면 “야, 이 썅x아! 너 레즈지? 니가 레즈니까 내 아이도 동성애로 보이는 거지?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구!”라고 그악스럽게 닦아세울 부모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곽노현씨! 어여쁜 우리 십대 아이들을 상스럽게 타락한 ‘동성애 숭배자’로 만드지 마십시오. 동성애에 관한 도덕적 실험을 그토록 하시고 싶으시면 본인, 본인의 부인, 본인의 자제부터 실험하십시오. 그게 ‘교육감’으로서의 도리입니다.

     

    분노하라!—세상을 부수는 것이 인생의 의미!

    도대체 곽노현씨는 세상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 같이 살벌한 교육파괴자가 된 것일까요? 여기에는 자못 철학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현대 철학 중에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상을 '감옥 혹은 억압시스템'으로 봅니다. 모범수로 살래? 반항인으로 살래? –이런 질문을 던지지요. 세상의 모든 기존 가치와 도덕을 부정하고, 세상의 의미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우리 사회의 좌파 지식층은 미친 듯이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에 탐닉했습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가지고는 안 되게 생겼으니까요. ‘파리’란 이름의 빵집이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퍼진 나라가 한국이듯(파리바케뜨, 파리크로아상), 파리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전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성공을 거둔 나라 역시 바로 한국입니다. 1990년대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름이 제목, 혹은 부제목으로 들어간 책만 해도 1,000 종 이상 출간되었습니다.
    이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지요. 조국 교수가 지은 책의 서문에 보면 “학문의 즐거움은 쥬이쌍스와 같다”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라깡의 말이 신성하게 인용되어 있지요. 쥬이쌍스는 섹스를 뜻합니다. 조국은 이 유식한 문구를 적음으로써, 스스로 “음…나는 말이지…, 좌파 포스트모더니즘을 깊게 이해하는 사람이거든?”이라고 한자락 까는 것입니다.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상을 감옥, 억압으로 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항을 해방이라고 주장합니다. 세상의 근본 가치, 근본 질서를 뒤흔드는 것을 황홀이라고 봅니다. 푸코는 이를 ‘한계체험’(limit experience)이라고 불렀지요. 그래서 프랑스 ‘예술 영화’ 중에는 근친상간을 다룬 게 상당히 많습니다. 근친상간이야말로 정말 화끈한 한계체험이지요.
    하기야 이를 넘어서는 것도 나왔습니다. 물론 프랑스 사람들이 발명했지요. 근친식인입니다. 서래마을에서 프랑스 부부가 자기가 낳은 아이를 냉동고에 얼려 놓고 요리해 먹으려다 붙잡힌 일이 있었지요. 근친상간을 넘어 근친식인, 자녀식인에 이른 것이지요. 이 정도가 되야 ‘한계체험 종결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사회 기본 질서를 조롱하고 해체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1977년에 푸코, 라깡, 데리다, 들뢰즈 등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13세 이상 청소년이 어른과 자유롭게 섹스할 권리”를 주장하는 사회운동을 펼쳤습니다. 특별히 어린 소녀들을 좋아하는 섹스 취향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무튼 그런 운동을 펼쳤지요. 그래서 69명의 ‘철학자, 지식인’의 공동 성명을 르몽드에 발표했지요. 아, 참, 숫자 ‘69’는 아마도 오랄 섹스 체위를 상징한다고 보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짜 진보 진영의 사고방식에는 바로 프랑스제 포스트모더니즘이 깔려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입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존재한다고 해도 알 도리가 없어. 떼를 이루어 촛불을 들고, 사회 시스템 전체를 뒤흔드는 것! 이것이 바로 황홀이야. 이것이 바로 인생의 의미야!”

    어디서 많이 본 듯 하지요? 곽노현의 뇌물을 ‘선의로 준 돈’이라고 태연히 말할 수 있고, 천안함을 ‘미국과 MB의 조작’이라고 주장할 수 있고, 광우병 패닉을 불러일으켜 촛불 파티를 벌인 일에 대해 ‘시민주권의식의 발현이며 정의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쾌거’라고 정강서문(민주통합당)에 써 갈길 수 있는 배짱—이것이 바로 프랑스제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세상에 대한 앙심(ressentiment)이 승화되어 순수 파괴의지로 발전한 게지요. 이 사람들은 학교 제도도 우습게 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 라깡의 딸 쥬디스 역시 못 말리는 여자였습니다. 자기 아버지 라깡의 친구인 푸코 덕에, 파리 제8대학 철학과 교수가 된 이 여자는 버스에서 만난 부랑자에게 학점을 주었습니다. (이 부랑자랑 섹스를 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습니다) 나중에 이 일이 들통나자 이 여자는 태연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목적은, 학교라는 제도를 최대한 개판으로 만드는 것이다.”—그렇습니다. 곽노현 같은 사람은 바로 쥬디스의 한국판 짝퉁 복제인간입니다.

     

    정신차려! 이 배부른 사람들아! 

    이곳은 ‘짝퉁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푸코는 자기 철학을 몸소 실천하다 에이즈로 죽었고, 들뢰즈는 자살했고, 라깡은 반쯤 미쳤습니다. 아, 그런데 이곳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을 사용하여 군중을 선동하고 군중으로부터 권력을 빨아내는 빨대들만 보일 뿐,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한계체험’ 실천 철학은 없습니다. ‘철학적 실천 없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치 테크닉’만 기승을 부릴 뿐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풍을 흉내 낸 정치 투기꾼’들만 설칠 뿐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냄새 나는 입을 벌리고 세상에 대해 이렇게 부르짖는 것입니다.
    “쫄지마 씨바!”
    그래서 곽노현은 석방되자마자 나꼼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쫄지 않고 잘 싸우겠습니다”라고 엄숙히 맹세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짝퉁 포스트모더니즘 정치가들은 뒷구멍으로 강력한 종북 세력과 내통하지요. 곽노현 같은 교육감들을 당선시킨 ‘유권자희망연대2010’이라는 선거조직을 보십시오. 강력한 종북단체들이 주도했습니다.
    아, 그 선거조직을 누가 꾸렸나구요? 무려 1년의 준비를 통해 만들어진 이 조직은 바로 박원순의 작품이었습니다.
    곽노현이나 박원순, 두 사람 모두 포스트모더니즘 정치 테크닉의 달인들이지요. 겉으로는 세상을 조롱하고 비웃고 해체하는 세련된 소통 기법을 사용하고, 뒷구멍으로는 강력한 종북세력과 거래하고, 본인은 권력을 누리고…. 정말 앞으로 남고, 뒤로 더 남고, 속으로 크게 더 남는 장사를 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너무너무 부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무엇보다도 제도권 주류(establishment mainstream)가 각성해야 합니다. 진실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제도권 주류에 대해 “탐욕스럽고 부도덕하며 책임의식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느낍니다. 안 그런 사람도 많다고요? 성실한 사람도 많다고요? 아, 네.

    그러나 무엇에 관한 ‘성실’이지요? 전쟁터에 나가는 말처럼 옆을 못 보게 눈을 가려놓은 상태 아닌가요? 자기 기업, 자기 교회, 자기 사찰, 자기 파벌, 자기 부처, 자기 가정에 대한 ‘성실’ 아닌가요?
    공동체를 위한 책임과 실천은 어디로 증발했지요? 언론에서 두들겨 맞거나 기분이 내키면 자선과 기부를 한다구요? 아, 네. 좋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장학금과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행동이 중요합니다. 사회 통합을 위한 가치, 이념, 사상, 문화, 소통을 위한 직접적 실천과 기여가 중요합니다.

    자기 기업, 교회, 사찰, 파벌, 부처, 가정에 관한 성실만으로는 사회적 증오심과 분노의 타겟으로 전락한 신세를 벗어날 길 없습니다. 장학금과 이웃사랑만으로는 이 사나운 ‘포스트모더니즘과 종북이 결합한 복합체’의 먹이가 될 뿐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종북 복합체'는 일반 국민의 좌절감과 분노에서 에너지를 뽑아 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일반 국민의 좌절감과 분노를 창조적으로 승화시켜 줄 수 있는 사상, 문화, 정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좌절감과 분노는 차곡차곡 쌓인 채 억제되고 있을 뿐입니다. 강력한 압력솥에 의해.
    아, 이 압력솥이 무엇이냐고요? 쿠쿠밥솥이 아닙니다. ‘세계시장과의 합일체’라는 독특한 경제구조입니다. 사람들은 매일매일 사실상, 세계시장과 승부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뼈 속 깊이 세상 이치를 느끼고 있습니다.  땀 흘려 먹고 사는 체제이기 때문이지요.
    이 특이한 경제구조(압력솥)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입니다. 대다수 시민의 존재 조건과 존재의미를 조명하는 사상, 문화, 가치, 원칙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대다수 시민의 좌절, 분노, 갈망을 승화시킬 정당도, 정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잘 나가는 제도권 주류 인사분들! 주류(mainstream)는 주류(술)가 아닙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폭도화된 민중  ‘상큘로뜨’ (귀족이 신는 긴 양말을 신지 못한 사람들, 즉 민중)과 그들을 선동한 자코뱅에 의해 피의 축제로 타락한 사정을 두고 역사가 카알라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샹큘롯뜨와 자코뱅이 결합한 괴물이 느닷없이 등장해서 사회 전체에 대해 이렇게 외쳤다. ‘씨바. 니들은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What do you think of me?’”

    정말 비슷한 점이 있지 않나요?
    나꼼수가 이끄는 엄청난 군중이 느닷없이 등장해서 이렇게 외치고 있는 모습과 유사하지 않나요?

    “쫄지마 씨바!”

     

  • 박성현 저술가.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현재는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이메일 : bangmo@gmail.com
    페이스북 : www.facebook.com/bangmo77

     

    [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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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격수다 제 16 화] 화성인 판사, 학교파괴자 곽노현 부활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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