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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냐 '황금세대'냐

김성욱 객원논설위원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입력 2011-09-25 07:35 | 수정 2011-09-25 07:40
‘88만원 세대’가 아닌 ‘황금의 세대’를 위하여 
  
 대중을 소수자·약자로 몰면서 분노만 키우면 정작 소수자·약자를 죽인다.
개척자 정신·기업가 정신·승리자 정신을 북돋워 자활의지를 키우는 게 키워드다.
金成昱    
  
 1.
 개인이건 국가건, 前進(전진)하지 않으면 退步(퇴보)해 버린다. 경쟁이 본질인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다.
국가도 밖으로 뻗어가야 번영하고, 회사도 밖으로 수출해야 발전하고, 교회도 밖으로 선교해야 성장한다.
 
 흔히 ‘양극화’를 말한다. 부익부·빈익빈,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양극화 수치로 불리는 지니계수(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큼을 뜻함)는 97년 0.283, 98년 0.316, 2008년 0.314로 최고치에 오른 이후 2009년 0.314, 지난 해 0.310으로 다소 떨어졌다.
 
 지니계수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나 과거 좌파정권 시절이나, 양극화 정도는 유사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8월11일 발표한 ‘금융위기 이후 소득분배 추이’를 통해 “금융위기로 인한 피해가 주로 고소득층에 집중됐고 또 당시 저소득층에 대한 정부의 이전 지출이 증가, 지니계수가 개선됐다”고 설명한다. 오히려 불평등 정도가 나아졌다는 분석이다.
 
 2.
 부동산 부분은 조금 다르다. 2008년 ‘국토해양통계연보’에 따르면, 토지보유 上位(상위) 50만 명인 국민 1%가 전국의 토지 48.1%를 소유한다. 2007년 4월16일 언론보도에 따르면, 2006년 ‘가계현황조사’를 통해 조사된 부동산 지니계수는 0.686, 토지 지니계수 0.848, 주택 지니계수 0.665, 자산 지니계수 0.641로서 상위 20% 국민이 주택의 69%, 토지의 94%를 소유한다. 어느 신문에 실린 칼럼 한 부분을 인용해본다.
 
 《집값이 한 달도 안 돼 월급쟁이 1년 치 급여 이상이 오르고, 권력과 정보를 독식한 이들이 미리 사둔 땅으로 일확천금을 챙기는 극심한 자산불평등 현상이 한국의 본질적 모습이다.》
 
 이른바 좌파이론가로 불리는 이태수 ‘꽃동네사회복지대학’ 교수는 “불평등·양극화는 사회불안을 높이고 구성원 상호간 불신과 적대감을 강화해 사회통합력을 저해하고 성장잠재력을 고갈시켜 지속가능한 성장을 가로 막는다”고 비난한다.
 
 “보편적 복지 개념으로, 중산층에게 사회적 임금 등 다양한 복지급여가 제공돼야 하며 비정규직 고용·임금조건 개선 등 공공부문에 일자리를 창출해 경제시스템 자체를 공정하고 혁신적 시스템으로 전개해야한다”는 것이다(‘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中).
 
 요컨대 양극화가 심각하니 보편적 복지를 적용해 정부가 나서서 공무원 일자리라도 늘리라는 지적이다. 李교수는 양극화 원인을 박정희 정권 시절 수출주도형 정책에서부터 김대중 정권 시절 강화된 이른바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여러 경제정책은 성과를 낸 것도 있지만 그 가운데 극단적인 수출주도형 정책, 내수산업과의 분절적인 구조는 그 문제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대기업 중심, 재벌 중심의 대내경제구조로 그 취약함은 더 분명해졌다. 그래서 한국의 경제구조는 외부의 충격에 크게 흔들리며 그 충격은 약한 고리인 내수기업, 중소기업, 농어업 등에 전가됨으로써 사회·경제 兩極化(양극화)가 심화될 수 있는 불안정한 기반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2000년대 이후 이러한 兩極化 현상의 본격화는 불행히도 DJ정부 때부터 경제 부문에서 과도하게 쓰인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기업의 효율화, 시장에서의 경쟁 등을 위해서는 노동에 대해 유연성을 대단히 과도하고 무책임하게 보장했고 결과적으로 비정규직을 양산했으며 이로부터 노동시장에 있어 상당한 혼란과 왜곡을 가져온 것 등이 직접적으로 최근의 兩極化에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 시절 대통령정책자문위원장을 지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역시 이른바 양극화 원인을 신자유주의에서 찾는다.
 
 《교육이 가장 중요한데, 신자유주의가 들어온 뒤 사회경제적 불평등·소득격차가 교육에 그대로 반영됐다.···옛날엔 시골에 후진 학교라도 사람만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가고 여러 분야 엘리트로 진출했는데 지금은 이 길이 막혔다. 교육이 경쟁적 시장구조랄까, 이런 것들을 따라가고 이것이 사회경제적 분배구조를 반영한 결과가 되면서 사회구조를 교정할 역할이 없어져 버렸다.···사회의 상향이동을 만들었던 사닥다리가 없어졌다. 상향이동을 할 때에 사다리가 있어야 예측이 가능하고 미래를 위한 전망과 공부의 모티베이션(motivation)을 주는데 이게 없어서 혼란에 빠진다. 경쟁을 하긴 하는데 전망을 갖지 못하는 경쟁이다.》
 
 3.
 암담한 말이다. 이런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소위 신분의 상승이 불가능한 절망적 사회다. 그러나 貧困(빈곤)의 본질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2011년 한국은 절대적 가난이 아닌 상대적·심리적 가난으로 고통 받기 때문이다.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옛날”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소득격차가 적었던’ 멋진 신세계로 비춰진다. 그러나 “옛날”엔 보릿고개로 불리는 지긋지긋한 식량난이 남한에도 존재했다. 영양실조로 꺼벙이머리(원형탈모)가 된 아이들이 있었고 겨울이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는 이들이 나왔다. 50~60년대에는 구토를 하면 회충이 튀어나오는 아이들, 복어를 잘못 먹어 중독된 사람들. 상상도 안 되는 일들이 많았다.
 
 40을 갓 넘은 記者도 쏘시지 반찬을 먹은 것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달걀도 귀했고 외식은 아버지 월급날 자장면 한 그릇 사먹는 정도였다. 고시 합격한 공무원 아버지 밑에서 컸어도 이 정도다. 살림이 핀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80년대 들어서였다. 50년대 한국은 찢어지게 어렵고 가난한 시절이었고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거치며 비약적 발전을 이뤄냈다. 모두 다 가난한 시절을 사회경제적 불평등·소득격차가 적었던 꽤 괜찮은 시절로 빗대어 말하는 건 궤변이다. 황당한 소리다.
 
 4.
 지금 우리의 가난은 절대적 빈곤이 아니다. 상대적·심리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이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질병을 푸는 길은 지난 60년 기적의 원인인 自由(자유)를 죽이고 平等(평등)을 키우는 게 아니다.
 
 전진하는 조직이 발전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성장하듯, 파이를 나누는 게 아니라 파이를 키워야 한다.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대중의 상처를 자극하면 亡國(망국)의 길로 간다. “할 수 있다”는 개척자 정신·기업자 정신, 승리자 정신을 키워서 興國(흥국)의 길로 가야 한다. 富者(부자)의 재산을 빼앗아 貧者(빈자)에 나누는 게 아니라 貧者를 도와서 富者로 만드는 게 正道이다.
 
 작금의 유행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에 침을 뱉고 自由 대신 平等을 대안의 모델로 취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세계화는 全지구적 차원에서 약자의 貧困(빈곤)을 없앴다. 산업혁명 직전인 1750년 지구촌 평균소득은 180달러. 2000년 현재 6600달러이다. 1980년 세계 인구 40.1%(14.7억)가 절대빈곤에 처했다면 2004년 그 비율은 18.1%(9.7억 명)로 줄었다.
 
 이는 한반도에서 더욱 명료해진다. 신자유주의·세계화를 거부한 북한은 ‘절대적 빈곤’을 키웠고 여기에 참여한 남한은 ‘절대적 빈곤’을 없앴다.
 
 역사는 분명히 말한다. 1860년에서 1917년 사이 시작된 첫 번째 세계화는 세계적 풍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 2차 대전 사이 反세계화 격랑이 일었고 각국은 자국의 산업 보호 명목으로 관세를 잇달아 높였다. 全세계 교역량은 30% 가량 줄었고 실업률은 25% 가량 늘었다.
 
 自由의 무대인 市場(시장)을 옥죄고, 自由가 흐르는 開放(개방)을 막으며, 自由를 나누는 交易(교역)을 억누른 결과는 심각했다. 1929년 10월24일 세계공황이 일어났고 지구촌은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빨려든다.
 
 파시즘과 볼세비즘, 狂氣(광기)의 역사가 지나고 1980년대 두 번째 세계화 시대를 맞았다. 이러한 흐름이 또 다시 인류에 풍요를 가져다 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최근 신자유주의·세계화가 금융위기·빈부격차·자원고갈·환경파괴 같은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많지만 自由에 기초한 패러다임 자체를 새로 세팅하자는 주장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실제 2010년 세계 GDP의 80%를 차지하는 G20국가들은 서울에서 열린 G20회의를 통해 시장경제 기조를 재확인하고 보호무역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컨센서스에 도달했다.
 
 5.
 분명한 것이 있다. 신자유주의·세계화는 세계의 빈곤을 줄였다. 어찌 보면 양극화는 문명의 발전에 따른 불가피한 현상이다. 기술의 진보는 생산의 기계화·자동화를 통해 일자리를 줄인다. 절대적 빈곤을 없애는 대신 상대적 빈곤을 만든 셈이다. 그렇다고 상대적 빈곤 이전의 절대적 빈곤으로 가자는 주장은 억지이다. 탁상공론이다.
 
 양극화라기보다 ‘新(신)빈곤’의 문제로 봐야 한다. 貧富(빈부)격차로 보게 되면 부자에게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는 잘못된 해답만 나온다. 그래서 양극화가 아닌 新빈곤층 해결의 문제로 접근하는 게 옳다. 정답은 나왔다. ‘보편적 복지’가 아닌 ‘선별적 복지’, 모두 돕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부분만 집중해 돕는 것이다. 新빈곤층에 직업교육·훈련기회를 제공해서 자활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큰 기업은 정부가 도울 필요도 없고 발목 잡을 필요도 없다. 세금을 투명하게 내면 존경해주고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사회에서 칭찬해주면 된다. 대기업의 불공정거래·기술탈취에 대해선 공정거래법과 지적재산권 제도로 철퇴를 가한다. 정부는 시장에서 탈락한 영세 자영민·농민·취약계층 등을 잘 보듬어 다시 시장경제로 가게 한다. 중산층이 서민으로, 빈곤층으로 탈락하는 것을 막고 빈곤층이 다시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한다.
 
 ‘초과이익공유제’ ‘무상급식’ ‘반값등록금’ 같은 소득재분배정책은 정작 중소기업과 서민층과 고학생을 죽인다. ‘작은 복지’가 아니라 ‘큰 복지’를 통해 경제발전 → 고용창출 → 소비증가 → 투자증가 → 경제발전의 선순환이 이뤄지게 해야 한다.
 
 결국 自助(자조)다. 대중을 소수자·약자로 몰면서 분노만 키우면 정작 소수자·약자를 죽인다. 개척자 정신·기업가 정신·승리자 정신을 북돋워 자활의지를 키우는 게 키워드다.
 
 100년 전 아르헨티나는 세계 10대 강국에 들었다. 프랑스보다 잘 살았다. 신대륙을 찾아 나선 유럽인은 미국으로 가야할지 아르헨티나로 가야할지 고민할 정도였다. 그러나 가난의 문제를 成長(성장)이 아닌 分配(분배), 自由의 확산이 아닌 平等의 확대로 접근한 아르헨티나는 몰락해 버린다. 1인당 GDP 7600불, 세계 87위로 떨어졌다.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무상교육·무상의료를 약속하며 노동자·농민의 표를 구걸한 퍼주기式 포퓰리즘은 재정파탄과 국가부도를 불렀다. 그리스도 그렇게 침몰해간다.
 
 포퓰리즘은 전체이익이 아닌 부분이익·집단이익·지역이익과 결합한다. 나라 전체 발전은 관심 없다. 均衡(균형)발전론이니 同伴(동반)성장론이니, 계급을 나누고 못 가진 다수의 인기에 영합한 나눠먹기로 이어진다. 국토는 난개발 된다.
 
 서울을 쪼개서 지방에 보내는 이른바 수도이전·수도분할도 같은 맥락이다. 독일은 본과 베를린으로 수도가 쪼개져 정부부처 6개는 본에, 10개는 베를린에 거처한다. 결국 본에서 베를린으로 1년에 官用(관용) 비행기셔틀이 5500회나 뜨는 비효율을 감수해야 한다. 런던은 서울보다 2.5배 크고 도쿄는 3.5배, 상해는 13배나 크지만 서울을 나누려 한다. 발전해야 균형도 이루고, 나라가 잘 돼야 지방도 잘 돼는 법인데 이런 초보적 원리는 무시당한다.
 
 6.
 국민적 아픔과 고통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려운 처지의 국민을 돕는 ‘선별적 복지’이지 모든 국민을 상대로 한 ‘보편적 복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증오·미움·분노의 적개심을 자극하면, 한 걸음 더 나가 복지의 너울을 뒤집어 쓴 사회주의로 가 버리면 富者(부자)와 貧者(빈자) 모두 죽인다.
 
 平等 우선이 아닌 自由 존중. 그리고 그 自由를 北으로 확산해야 한다. 자유통일 이후 2.2배의 국토, 7200만 인구의 강대국 비전의 길로 국민을 이끄는 것이다. 이를 위한 절박한 과제는 개척과 도전의 승리자 정신을 깨우는 것이고 불확실한 시대에 확고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지도자》를 찾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지도자》 역할을 더욱 커졌다. 대중의 요구, 지역과 집단의 목소리가 커지는 탓이다. 국민을 설득해 表層的(표층적) 이익이 아닌 深層的(심층적) 이익으로 나라를 인도해야 한다. 平等 우선이 아니라 自由 존중의 길로, 개별전략이 아닌 전체전략으로, ‘떼법’이 아니라 法治(법치)로 가는 것이다.
 
 《지도자》최대덕목은 집단·지역·개인 이익을 넘어 국가 전체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이다. 羊(양)을 위해 목숨을 내 놓는 牧者(목자)처럼, 고귀한 가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북한의 2400만 동족노예 해방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이, 7천만 민족의 번영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이. 그런 《지도자》가 나오면 양극화 선동을 넘어설 것이다. 이미 나온 결론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7.
 나는 강대국 진출의 유일한 혈맥이 북한을 여는 데 있다고 주장해왔다. 아무런 자유도 없이 살아가는 2400만 북한 동포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는 선한 행위를 하게 될 때 한국은 더 넓은 영토, 더 많은 국민, 7000조 원에 달하는 지하자원을 얻게 된다.
 
 한 세대는 계속될 재건 기간 동안 남한의 청년은 북한의 管理(관리)인력으로 파견돼 북한의 자유화·민주화를 지원해 줄 것이다. 답답한 이 땅의 청춘은 아시안하이웨이(Asian Highway)를 따라 대륙과 초원을 향해 차를 달리게 될 것이다. 非생산적 갈등이 사라진, 선진통일·통일강국의 거룩한 비전을 성취할 미래다.
 
 대륙과 초원을 향한 血路(혈로)를 뚫자. 김정일 정권의 조속한 해체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의한 평화통일이라는 헌법적 가치의 실현이 북한도 살리고, 남한도 살리는 길이다. 내가 살고 조국도 살 수 있다. 솔루션은 먼 곳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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