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건설업체 등쳐 수백억 원 확보일당 중엔 부산저축은행 연루 ‘거물 브로커’ 박 모 씨도...
  • 저축은행 비리에 대한 국정조사가 곧 시작될 예정인 가운데 보해저축은행과 삼화저축은행, 전일저축은행 부실에 대한 수사가 ‘부실’이었다는 점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저축은행 사기사건에 대해 집중적인 보도를 계속해온 본지에는 저축은행 소유주와 경영진의 비리에 대한 제보가 계속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불법대출한 돈을 빼돌려 초호화생활을 했다는 은인표 씨와 그의 주변에서 활동하던 박 모 씨, 정 모 씨 등에 대한 제보가 흥미롭다.

    제보자들에 따르면 전북 정읍 출신인 은인표 씨는 외환위기 전까지는 금융거래에 따르는 ‘구전’이나 챙기고 살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런 은 씨와 어울리던 사람 중에는 부산저축은행 사기사건과 ‘굿모닝시티 사기’에 연루된 브로커 박 모 씨도 있다.

    이들이 처음 노린 먹잇감은 외환위기 전후 분양사업으로 수백억 원을 번 Y건설 A회장이었다. 전남 신안 출신인 A씨는 90년대 이전에는 고향에서 작은 건설업을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 ‘자네는 성실하고 일도 잘 하니 그러지 말고 서울로 올라와 사업을 해보라’고 권유해 서울 서초동의 대형 빌라 건축 사업에 뛰어 들었다.

    순탄하던 사업은 한때 위기를 맞았다. A씨는 사업을 시작했던 친구의 지분까지 인수한 뒤 가까스로 빌라를 완공해 분양했는데 이것이 ‘대박’이 났다. 90년대 말 한 채 당 17억 원에 분양이 모두 완료되면서 큰 돈을 벌었다. 이때 지은 ‘H’빌라는 지금도 서초동 고급빌라의 대명사다. 여기에는 한때 '이용호게이트'의 주인공 이용호 씨,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  DJ정부 시절의 김태정 前법무장관도 거주했었다고 알려졌다.

    외환위기로 다른 사업체들이 픽픽 쓰러지는 가운데 A씨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돌아다녔다. 2001년 1월 A씨에게 은 씨 일당이 접근했다. 은 씨는 A씨에게 ‘서울 중구 중림동에 5,000여㎡(약 1,600평)의 땅이 있다. 대우건설이 기초공사(터파기)를 마친 땅이다. 여기에 주택사업을 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며 유혹했다.

    이 땅은 원래 대왕실업 사옥 터였다. 1994년 대우그룹이 대왕실업 사옥을 헐고 33층 규모의 오피스 빌딩을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사업은 중단되고 경매 물건으로 나와 있던 곳이었다. 당시 이 땅은 담보설정이 겹쳐있고 (주)대우가 유치권을 주장하는 등 권리관계가 복잡해 아무도 손을 못 대고 있었다.

    결국 이 땅은 경매에 붙여졌다. A씨는 원래 이 땅을 낙찰 받아 김우중 회장의 사위가 경영하던 이수건설에 285억 원에 팔려고 했다. 하지만 경매 때 A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뒤 이수건설이 땅을 매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수건설은 여기에 39층 높이의 최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800여 가구를 만들었다. 분양도 성공했다.

    땅 매입 자금 받아 어음으로 융통해버린 일당들

    A씨는 처음에는 이 땅을 매입해 사업을 하려 했다. 하지만 은 씨는 A씨에게 “그러지 말고 지금 유명 종합건설사인 H주택이 매물로 나와 있으니 돈을 조금 더 보태서 H주택을 매입하자”고 부추겼다. A씨는 여기에 솔깃해 350억 원의 자금을 마련해 어음을 발행했다.

    하지만 은 씨 등은 A씨가 건넨 어음을 명동에서 할인받은 뒤 달아났다. 놀란 A씨는 은 씨 등을 횡령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은 씨 등은 얼마 뒤 검거돼 구속됐지만, 어찌된 일인지 곧 풀려났다. A씨는 결국 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A씨에게 사기를 친 은 씨와 박 씨 등은 전일저축은행, 부산저축은행 사기사건에도 등장한다. 광주 출신으로 광주일고를 졸업한 박 씨는 ‘이용호 게이트’, ‘굿모닝시티 사기 분양’ 등에도 등장한다. C실업 등 SPC형태의 건설회사 여러 곳을 운영하고 있다. 한때는 삼화저축은행 이사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박 씨는 지난 2006년 9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상의 알선수재와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부산저축은행 사기사건을 수사 중인 대검 중수부는 박 씨가 ‘거물’을 자처하며 여러 곳의 불법대출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박 씨가 소유주라고 주장하는 C실업만 해도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636억 원을 불법대출 받았다. 또 다른 SPC인 N사도 509억 원을 불법대출 받았다.

    이런 박 씨를 A씨에게 소개해준 사람은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이었다. 박순석 회장이 ‘내기골프’ 때문에 구속된 뒤 갑자기 나타난 박 씨는 박 회장에게 면회를 가는 등 ‘옥살이 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박순석 회장은 풀려난 뒤 박 씨를 A씨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박순석 회장은 이미 박 씨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에 대한 신뢰를 거둔 상태였다고 한다.

    제보에 따르면 은 씨와 박 씨는 모두 조폭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들을 잘 아는 사람들은 ‘사기꾼들이 사업가로 둔갑한 꼴’이라며 실소했다.

    끼리끼리 해먹으며 ‘사업가’ 행세한 저축은행 브로커들

    은 씨와 박 씨는 이후로도 A씨는 물론 주변의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 ‘행정복합중심도시 부지에 폐업한 공장을 매입하면 보상가가 높아진다’ 는 등의 말로 먹잇감을 찾아 나섰던 것으로 밝혀졌다.

  • ▲ 전일저축은행 대주주 은인표 씨가 타고 다녔다는 마이바흐. 가격이 7억 원을 넘는다. ⓒ
    ▲ 전일저축은행 대주주 은인표 씨가 타고 다녔다는 마이바흐. 가격이 7억 원을 넘는다. ⓒ

    이런 과정을 통해 재력을 축적한 은 씨는 2005년 차명으로 전북 전일저축은행 대주주가 됐다. 지난 6월 2일 검찰이 압수수색한 대주주 은 씨의 서울 사무실은 특이하게도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 스위트룸이었다. 은 씨는 이 호텔 스위트룸을 사무실로 쓰며 시가 7억 원이 넘는 마이바흐를 타고 다녔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큰 손’이었다. 단골 일식집 주방장이 횟집을 열고 싶다고 하면 ‘가게를 알아보라’며 돈을 주고, 절에 ‘종’을 시주하고, 제주시장을 위해 4억여 원을 들여 콘서트를 여는 등 누군가 뭐가 필요하다고 말만 하면 거액을 척척 건네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여기에 쓴 돈은 대부분 불법 대출받은 돈이었다. 검찰은 은 씨가 개인적으로 사용한 불법대출액이 400억 원 가량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은 씨의 불법대출 수법은 다양했다. 8억 원에 낙찰 받은 지방의 여관을 전일저축은행에 담보로 맡기고 40억 원이 넘는 돈을 대출받는가 하면 동일한 수법으로 25억 짜리 부동산을 담보로 50억 원을 빌리기도 했다.

    담보로 빌린 돈을 갚지 않아 부동산이 경매에 넘어가자 전일저축은행 직원인 C과장을 보내 채권자가 경매낙찰을 받는 형태로 부실을 떠넘기기도 했다. 이 과정에 개입한 부동산 회사에는 은 씨가 연루돼 있는 제주 호텔 카지노 소유주의 친척이 이사로 등재돼 있다.

    은 씨는  또 사촌인 E 모 씨를 통해 연예계 ‘대부’처럼 활동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은 씨의 사촌인 E씨는 공중파 방송 PD출신으로 유명한 연예 프로그램 제작자다.

    피해자들은 2005년과 2006년 이같은 은 씨와 전일저축은행의 불법대출사실을 증거까지 첨부해 지방검찰청에 제보했지만 모두 묵살되다시피 했다고 전했다. 보해저축은행 피해자들 역시 2009년 경 불법대출 사실 등을 검찰에 제보했지만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제보자와 피해자들은 부정부패의 ‘고리’가 금융감독당국은 물론 사법당국, 정치권, 조폭에까지 퍼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보자와 피해자들이 더욱 분노하는 건 '학연'과 '지연'을 앞세워 '사기'행각을 벌였음에도 사법당국이 늘 '무죄' 또는 '무혐의'라고 풀어주고, '사기꾼'들은 "거봐라. 돈이면 다 된다."고 큰소리치고 다녔던 사실이다.

    현재 대검 중수부와 광주지검 특수부, 경찰 등에서 저축은행 사기사건을 파헤치고 국회가 저축은행 부실사태에 대한 국정감사를 실시하겠다고 나섰지만, 국민들의 시선이 차가운 것은 이런 ‘부정부패’를 '제보'하거나 ‘신고’해도 묵살했던 당국의 과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