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분단 ⑱
     

    남북으로, 더구나 각각 이념이 정반대인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로 나뉘어 분단된것이 한민족의 또다른 비운의 시작이다.

    한반도가 신라로 통일된지 1300년만에 다시 두쪽으로 갈라졌다. 그것도 강대국의 이념에 따라서, 비통한 노릇이다.

    일제로부터 36년간 식민지 상태로 노예같은 생활을 하다가 국토의 허리가 동강나고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국가로 나눠지다니, 그러나 누구를 원망 할것인가?

    우리 탓이다. 우리는 자력으로 해방을 맞지 못했다. 미국이나 소련을 원망할수만은 없다.
    우리가 그들 입장이 되었다면 더 했을지도 모른다. 한반도는 전리품이었다. 패망한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엄격히 말하면 일본보다 더 열등한 민족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 한반도 안에서의 분열을 자책하고 있다. 한반도 분단은 어쩔 수 없는 외적 요인도 있지만 우리 탓도 있다. 50여년전 개화 운동을 할적에도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지 않은가?

    내부 분열은 외침보다 더 참담한 결과를 몰아온다. 아니, 국가와 민족의 패망은 내부 분열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 성립때부터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했고 결국 그것을 성사시켰다. 공산주의와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통일을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 왕실의 폐혜를 겪어본 사람이다.
    무능하고 이기적인 지도자가 국가를 어떻게 파탄 시켰는지 피가 마르고 가슴이 터지는 심정으로 겪었다. 지도자급 인사들이 분열하고 정권욕으로 집착 하는 것을 보았으며 무지한 민중의 욕망과 한계를 경험했다.

    조선인에게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조선인은 잘 이끌기만 한다면 세계 어느 민족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민족 수천년 역사상 민중이 봉기를 일으켜 성사된 적이 없다. 지도자가 민중의 힘을 모아서 대업(大業)을 이룬 경우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강력한 대통령 지도체제로 신생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결심을 하게된 배경이 그것이다.

    내가 경무대로 국무총리겸 국방장관 이범석을 불렀을때는 1948년 10월 하순쯤 되었다.

    이범석(李範奭)은 1900년 생이니 당시 49세, 21세때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용병을 떨친 무장(武將), 광복군참모장 출신으로 강직한 성품이다.
    응접실에 둘이서 마주보며 앉았을 때 내가 물었다.
    「총리, 남쪽 상황이 어떻소?」

    내 시선을 받은 이범석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각하, 여수 순천에도 계엄을 선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며칠 전인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 순천의 군분대에 침투했던 좌익분자가 부대원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른바 여순 반란사건, 며칠 전인 10월8일에는 제주도에도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대한민국은 전시(戰時)상태나 같은 것이다.

    그 때 이범석이 말을 잇는다.
    「각하, 반란군을 꼭 격멸 시키겠습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대한민국 국군은 남조선경비대에서 정부수립과 함께 국군으로 개편되었지만 장비가 열악했고 병력도 부족했다. 

    북한은 조선인민공화국군이 소련군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미군은 남한의 경비대에게는 항복한 일본군이 남기고간 장비만 제공했다.

    더구나 일본군의 중요 장비는 미군이 다 파괴시켰기 때문에 남한 경비대에게 제공된 무기는 소총과 탄약 뿐이다. 그것이 국군 5만여명의 장비인 것이다.

    내가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의 공산당 세력부터 제거 하는 것이 선결 문제요, 친일파 청산은 그 다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