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親日-親北으로 점철(點綴)된 '여운형의 생애'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분석/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을 기술하면서 그의 친일(親日)행적과 대한민국 건국에 악(惡)영향을 미친 좌우합작(左右合作)문제에 대해 아무런 비판 하지 않아
    金泌材   
     
     올해 새로 발간된 고교 역사 교과서는 해방기 좌익(左翼)의 간판인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을 기술하면서 그의 친일(親日)행적을 지적하지 않았으며, 건국에 악(惡)영향을 미친 좌우합작(左右合作)에 대해 긍정적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
     
     이들 교과서는 또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建準)과 조선인민공화국(人共)이 ‘종이정부’에 불과했던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실제로 人共은 미군의 진주를 앞두고 수세에 몰린 建準이 택한 자구책이었고, 이승만(李承晩) 등 명망 있는 지도자들을 인민 대표위원으로 임명했으나 과시용 전시(展示) 내각에 불과했다.
     
     일례로 법문사 발행 역사 교과서는 두 번(288, 304페이지)에 걸쳐 여운형의 사진을 게재, 그의 좌우합작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교과서는 김오성(金午星)의 ‘지도자 군상’에 게재된 내용을 그대로 인용, 親日 행적이 명백한 여운형에 대해 “모든 지사들이 절개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대일 협력을 감행하고 있을 때에도 여운형 씨는 끝끝내 고상한 절개를 지키고 불응하였다(288페이지)”고 서술했다.
     
     여기서 김오성은 공산주의 이론가로 1944년 8월 여운형과 조동호가 결성한 조선건국동맹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는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3당(黨)이 합당되어 남조선로동당 창당과 함께 남로당 중앙위원이 됐다. 그리고 이듬해 1947년 월북(越北)했다.
     
     김오성은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 이후 그는 북한에서 문화선전부 부상을 지내는 등 요직을 겸한 인물이다.
     
     천재교육의 경우 법문사와 더불어 여운형의 親日행적에 대한 언급 없이 1945년 8월16일 여운형의 휘문고보 방문 사진을 게재했다.
     
     교과서는 사진설명에서 여운형이 조선총독부 엔도(遠藤柳作) 정무총감을 만나 일본인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는 대신 조선인들의 건국 활동을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받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建準)를 결성하였다고 기술했다.
     
     천재교육은 또 여운형 중심의 건준(建準)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정부 수립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미군이 들어오기 전인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각지의 조직을 인민위원회로 바꾸어 나갔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외형적으로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이승만, 김구, 김일성 등을 각료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해외에 있던 당사자들과 우파 정치인들은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의 노선에 반대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교과서는 여운형이 左右를 아우르는 정치조직을 구성하려 했던 점만 집중조명하고, 親日행적과 建國에 악영향을 끼친 좌우합작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판을 하지 않았다.
     
     이와 함께 (주)삼화출판사는 한 페이지(288페이지) 전체를 할애해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 대해 기술했다. 교과서는 구체적으로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한 것을 강조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독립동맹, 조선건국동맹이 광복 후 민주 공화국을 만든다는 데에 대체로 의견을 같이하였다고 기술했다.
     
     (주)미래엔컬쳐그룹은 “한국의 정치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신탁통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좌우익의 협력이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미-소 공동위원회에 참가하여 민족전체의 의사를 표시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결과 1946년 미군정의 지원 아래 좌익의 여운형과 우익의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이 개최되었다(330페이지)”고 서술했다.
     
     비상교육과 지학사의 경우도 다른 역사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과 좌우 합작 운동을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극복한 건국 준비 활동(비상교육, 296페이지)’, ‘분열된 정국을 통합하기 위한 활동(지학사, 263페이지)’ 등 긍정적인 서술로 일관했다.
     
     親日-親北으로 점철(點綴)된 ‘몽양 여운형의 생애’
     
     6종(種)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들이 여운형을 민족주의자로 포장하고 그가 마치 建國에 큰 업적(業績)을 남긴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여운형의 행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歷史歪曲)임을 알 수 있다.
     
     소련공산당 선언을 최초로 우리말로 옮긴 여운형. 여운형이란 인물과 그가 주도한 건준(建準)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정국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필요하다.
     
     1945년 8월10일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한반도 내의 일본인 생명과 재산이 위협 받게 될 것을 우려해 송진우(宋鎭禹)에게 국내 치안유지의 모든 권한을 맡아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를 거절했으며 김준연(金俊淵)도 동일한 교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러한 宋鎭禹와 金俊淵의 거절에 놀란 총독부는 제3의 인물로 1945년 8월15일 아침 8시 여운형을 정무총감 관저로 급히 초대, 조선이 해방을 맞아 정치적 공백기에 처했을 때의 치안유지의 협력을 요청했다. 여운형은 이를 즉석에서 쾌히 승낙했다.
     
     이때부터 ‘치안유지의 협력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은 여운형은 그 날로 좌익계의 정백(鄭栢), 최용달(崔容達) 등과 함께 建準을 조직하고 동위원회 위원장 자리에 앉았다. 建準의 깃발아래 1945년 8월30일까지 145개의 建準 지방위원회가 결성됐다. 조직기반이 취약한 여운형은 남로당의 당수 박헌영(朴憲永)과 제휴, 建準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여운형은 建準 결성 후 ‘건국치안대’를 조직 했는데, 이 치안대는 9월2일자로 建準에 통합됐다.
     
     그러나 建準이 좌경으로 변질되자 건준부위원장 안재길 및 민족진영 인사들은 建準을 사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준은 1945년 9월3일 2차 개편대회를 열고 이강국(李康國)을 비롯한 골수 공산주의자들을 간부로 등용한 뒤, 박헌영 계열의 공산당과 연합했다. 같은 해 9월4일 건준은 박헌영, 여운형, 정백 등 4명에 의한 인공설립준비위원회를 거친 뒤, 9월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人共)을 선포했다.
     
     建準은 人共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1945년 9월6일 해외에서 아직 귀국하지도 않은 민족진영 인사들 가운데 李承晩을 주석으로, 金九를 내무장관에 정해 놓는 등 일방적으로 내각 명단을 발표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더욱이 인공의 중앙인민위원회의 내각구성원을 살펴보면 전체인원 52명 가운데 72%인 38명이 공산당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종오著, ‘변질되어가는 한국사의 진상(上)’, 43페이지)
     
     이것만 봐도 여운형의 건국(建國)구상과 행적은 공산정권 수립을 위한 전위역할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운형은 또 일제치하에서 입건되어 서울지방법원 재판과정에서 일본을 위해 헌신(獻身)하겠다는 ‘충성서약’을 한 친일(親日) 세력의 일부이기도 하다.
     
     ‘대동신문’ 1946년 2월 17, 18일자에 따르면 여운형은 1943년 2월 6일 일본 검사에게 제출한 진술서에서 “일본을 위해 대(對)중국 공작을 할 수 있으니 기회를 달라”며 한시(漢詩)까지 지어 충성을 맹세했다.
     
     시의 내용은 “포연탄우 속에 문필도 보답하고(砲煙彈雨又經筆·포연탄우우경필) 나라 위해 젊은 목숨 바치기를 청하네(爲國請纓捨一身, 위국청영사일신) 천억이 결성하여 공영을 이루는 날(千億結成共榮日, 천억결성공영일) 태평양 물에 전쟁의 티끌을 씻으리(太平洋水洗戰塵, 태평양수세전진)”이다. 여기서 ‘천억’은 일본이 중심이 된 동양을 말한다.
     
     또 일제 패망 후 서울에 진주한 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는 1945년 9월 12일자로 작성한 비밀문서 ‘G-2 Periodic Report’에서 여운형은 “한국인들 사이에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정치가”이며 “조선총독으로부터 거금(2000만 엔)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1950년 11월 UN군이 노획한 조선공산당 문서도 그를 "변명할 이유가 없는 친일분자"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조병옥(趙炳玉) 박사는 ‘나의 회고록’(도서출판 해동, 1986, 163~164페이지)에서 여운형의 親日 행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여운형, 안재홍 두 사람은 일정말기에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전에는 항일파요, 민족적 지도자로 관록을 가진 여운형, 안재홍씨 두 분은 영국령 싱가폴이 함락되고 필리핀의 마닐라가 일본에 의하여 점령당한 후 미-영 연합국이 패전하고 일본이 승리한다고 오산한 나머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끼(小磯國昭)에게 불려가서 소위 대동아전쟁에 협력할 것과 황국신민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만약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여기에 그 증거로서 매일신보에 실린 담화와 논문과 사진들이 있으니 자세히 들여다보시오. 누구의 필적이며 누구의 사진인가를(이하 생략)”
     
     이기하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 급조’와 한국일보사가 1987년 발행한 ‘한국의 정당’에는 여운형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한인(韓人) 제1호’라며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대의원, 임정 외교부장관과 노동청년단장을 역임하는 한편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뒤, 이르쿠츠크 재건공산당 상해지부당원, 소련 공산당 한인(韓人) 제1호 입당, 조선공산당 해외부원, 中共黨江蘇省黨입당 활동 중 상해에서 일본 영사경찰에 체포, 본국에 압송되어 3년간 복역 후 中外日報 사장 등을 거치며 활동하다가 권태석(權泰錫)을 만나게 된다…….(중략) 그러나 얼마 후 日本世話會 주선으로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여운형의 약속으로 일본인 대표로부터 70만원의 거액을 받고 사태가 수습됨으로써 건준 활동은 재개했다.”
     
     한민성의 ‘추적 여운형’(갑자문화사, 1982년, 100페이지)에는 여운형이 처음부터 ‘대한민국’이란 국호(國號)를 극력 반대하고 ‘조선공화국’을 주장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로서의 여운형의 족적이라면 한 마디로 말해서 소련공산당의 세계적화 공작에 뛰어들어 그 주구(走狗)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적화 공작에 앞장서서 그 하수인으로서 죽는 날까지 놀아났다. 일급 하수인답게 그의 당적(黨籍)도 화려하다. 즉 상해파, 고려공산당원 이르크츠크파 공산당원, 소련공산당원, 조선공산당원, 중국공산당원, 중국국민당원(중국 적화 공작을 위해 침투), 장안파 공산당의 비밀당원 공산분자들이 일야(一夜)에 날조(捏造)한 소위 인민공화국의 부주석, 인민당 당수, 가짜 김일성파인 사회노동당위원장, 북로당계인 노동인민위원장 등으로 소련공산당 지령에 따라 조국과 민족도 헌신짝같이 버리고 공산당원답게 공산당을 위해 광분하였다.”(‘추적 여운형’, 갑자문화사, 1982년, 187페이지)
     
     현대공론(이현택, 1988년 9월호 432~433페이지)에 게재된 ‘여운형의 딸들은 왜 서울에 올 수가 없는가’에는 월북(越北)한 여운형 일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몽양의 유가족들이 생존의 보호막을 찾아 월북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가슴 속에서 통곡한 사람은 여운구 씨의 선친인 여운홍 씨였다. 1985년 가을 이산가족 방문단이 평양에 갔을 때 여연구 씨가 인민회의부의장으로 환영회장에 나왔었다는 것이 공식적 확인이었다. 그 밖에는 단편적인 미확인자료이지만 큰 누님(장녀) 난구(鸞九)는 이미 연로했으니까 알 길이 없고, 둘째 연구는 무슨 단체의 사무총장, 그리고 4남 붕구(鵬九)는 수산업 관계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3남 영구의 소식은 전혀 모르겠다고 여운형 일가의 최근 상황까지 밝히고 있다.”
     
     이처럼 여운형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정국을 올바른 길로 수습해야 할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越北해 김일성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그의 딸 여연구(1996년 사망)는 생전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북한 정권에 충성을 바쳤다.
     
     여연구는 문익환, 유원호 등의 방북을 알선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운형을 순수한 민족주의자로 묘사하는 것은 국민의 역사의식을 오도(誤導)하는 극히 위험스러운 행위다.
     
     김필재 기자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