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왜 李承晩(이승만)인가?

                                        최 응 표 (뉴욕 거주)

        대한민국만이 안고 있는 민족적 비극

    김일영 교수의 말처럼, “우리에게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린 건국대통령 이승만,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에게 巨人(거인)으로 다가오는 雩南(우남) 이승만, 그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그는 우리 역사 속에 어떻게 기록돼야 할 인물인가? 時代精神(시대정신)에 부응해 한국판 “모세”로서 새 역사를 창조한 시대의 영웅인가, 아니면 시대정신을 거부한 역사의 배신자인가?
     이런 문제는 불행하게도 2차대전종결과 함께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장이 된 한반도, 그 國際冷戰(국제냉전)의 최전선에서 새 국가를 건설하고 새 역사의 진로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어느 신생국들보다도 냉전의 희생물이 된 한반도의 시대정신을 이해해야 정확한 답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어느 교수의 말처럼 4.19와 이승만을 기억하기 전에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먼저 생각하고 대한민국 탄생의 고난의 발자취를 국민의 양심으로 되짚어 본다면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부정하는 것은 곧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다”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누가 뭐래도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이라는 역사적 사실만은 대한민국과 함께 영원할 것이며, 우리민족의 양심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그 시대적 상황과 현재 속에서 내려져야 하는 것이라면, 이승만에 대한 평가도 정글의 생존법보다 더 살벌했던 解放政局(해방정국)이라는 우리만의 특수 상황과 2차 대전 이후 초 고속성장과 富(부)를 창출하면서 자유 민주국가를 건설하고 세계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는 성공한 대한민국의 현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공정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뒤틀린 민족성 그대로 뒤틀린 방향으로만 진행돼 왔다.
    왜 그랬을까. 물론 거기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修正主義史觀(수정주의사관)의 잘못된 역사해석과 정치세력의 집단이익, 그리고 이념갈등과 정직하지 못한 교육에다 비뚤어진 민족성이 더해진 결과가 아닌가 싶다.
     범죄에 가까우리만큼 국민을 악의적으로 세뇌시켜온 수정주의사관의 弊害(폐해)는 공산불럭이 무너지면서 어느 정도 해소 됐지만, 이념갈등과 정치세력의 집단이익이 끼치는 부정적 시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것은 대한민국만이 안고 있는 민족적 비극이며 불행이다.
     그런데다 권력 장악 수단이 떳떳치 못한 정권이 이어지면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貶毁(폄훼) 내지 무시정책이 펼쳐지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친북좌파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도가 더 심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승만 정신에 대하여

     이승만을 부정하는 것은 곧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것처럼, 이승만을 인정하는 것은 곧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만큼, 세계최악의 독재자 김정일을 좇는 김대중,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이 이승만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의 제자리 찾기 운동이 곧 친북좌파세력 척결의 길이고 제2의 건국운동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이승만을 떼 놓고는 대한민국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임 대통령을 존경하고 기리는 아름다운 전통을 세우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민족성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기독교 정신에 바라는 것은, 어느 연설에서 자신이 말한 것처럼, 선임 대통령의 사상(자유 민주주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고 보전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세워, 역사에 뿐 아니라 국민의 기억 속에 남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한다.

    남에게 기억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임을 가슴에 새기면서 건국대통령 재평가작업과 기념사업추진에 앞장선다면, 民族正氣(민족정기)를 되살리고 역사바로세우기에 기여한 역사적 대통령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지금처럼 제2의 해방정국과 같은 혼돈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이승만이 거인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 왜 이승만인가, 라는 시대적 물음에 대한 답은, 다시 혼돈의 시대에 빠진 오늘의 대한민국의 時代狀況(시대상황)이 바로 이승만 정신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제냉전의 최전선에서 대한민국을 설계하던 시대정신이 바로 이승만 정신이라고 이해한다면 이승만을 우리시대의 거인으로 받아들이고 이승만 정신에 따라 제2 건국운동에 동참하는 일에 인색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8.15 해방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해방정국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이승만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건국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너무도 왜곡돼 있다. 그리고 좀 지나친 표현인지는 모르나, 갑자기 주어진 분에 넘치는 자유와 풍요에 썩어가는 국민정신으로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가치도 올바로 평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국민의 정신이 썩는다는 것은 민족혼이 썩는다는 것이고 國格(국격)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자랑스러운 이름인가. 대한민국 국민이 지금 기적의 나라, 감동의 나라, 감사의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 미래가 없는 국민이다.
     해외에서 바라보는 조국의 모습은 그 처절했던 8.15해방정국과 너무도 닮은꼴이다. 진정으로 그 참혹했던 解放空間(해방공간)을 상상해 보라. 그래도 대한민국과 건국대통령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지금의 자유와 풍요를 누릴 자격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 정신 바로 알기 운동은 시대의 사명인 동시에 역사의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이 백 퍼센트 완벽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람이 어떻게 백 퍼센트 완벽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종전 후, 스탈린의 흉계에 따라 공산화의 길로 끌려가는 한반도를 반쪽이나마 자유민주화의 길로 바로 잡은 이승만, 다시 말해 어느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2차대전 후 신생국은 물론 기성국가들까지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의 이념선택을 강요당하던 국제냉전의 질서 속에서 공산주의라는 죽음의 길을 거부하고 민주주의라는 생명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져온 이승만,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승만 정신의 가치와 역사적 평가는 올바로 마무리 돼야 마땅한 것 아닌가.

     그리고 종전 후, 민주주의, 시장경제, 기독교를 받아들인 신생국들은 거의가 자유와 번영의 길을 간 반면, 스탈린의 공산주의와 통제경제 그리고 기독교를 배척한 국가들은 하나같이 빈곤과 독재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이승만의 선택이 얼마나 지혜롭고 올바른 선택이었는가를 알 수 있지 않는가. 바로 正道(정도)를 택했다고 말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탠다면, 4천년 역사를 살아오면서 늘 주변 세력에 억눌린 채 찌들고 가난했던 大陸文明圈(대륙문명권)을 벗어나 자유와 풍요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海洋文明圈(해양문명권)으로의 이동으로 대한민국 탄생의 길을 연 이승만의 또 하나의 업적은 세계사 속의 대성공 드라마가 아닌가. 그래서 우리민족과 역사 속에 이승만이 있었다는 것은 축복중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스탈린의 음모를 차단한 사람

    이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건국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잘못되고 악의적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의 이승만 부정세력의 행위는 한 마디로, 공산국가가 세워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왜 오늘의 풍요로운 자유 대한을 건국 했느냐는, 지극히 정치적 산물인 동시에 역사 부정행위고 반민족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 친북좌파세력이 득세한 가운데 좌파성향의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더욱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승만과 4.19를 기억하기 전에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먼저 생각하고, 자유와 풍요를 만끽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토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냉철한 이성으로 다시 짚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가졌던 건국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감정은 틀림없이 긍정적으로 바뀔 것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이 객관적 사실검증 없이 어떤 이익집단이나 특정이념의 도구화가 될 때, 진실은 허구에 묻히고, 왜곡된 역사관과 날조된 정치선전으로 인해 역사의 진로가 뒤틀린다는 것은 지금의 한국현대사가 보여주는 역사적 현실이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만연돼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한국현대사를 고쳐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건국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작업은 반드시 우리세대에서 마무리 돼야 하며, 기념사업도 국가차원에서 추진돼야 한다. 후세를 위한 바른 역사교육과 미래세대의 도덕성 함양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죽어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서도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건국대통령까지 국민의 기억에서 지우려든 저들의 주장이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짓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고 진실은 반드시 그 빛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 하늘의 법칙 아닌가.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공개된 소련공산당 비밀문서는 지금까지 날조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결정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다시 말해, 소련의 對日戰(대일전)과 함께 계획된 스탈린의 韓半島衛星國化(한반도위성국화)전략이 오늘의 비극을 가져왔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다.

    더욱이 한반도의 소련위성국화 계획이 소련의 대일전 이전부터 꿈꾸던 스탈린의 오랜 야욕이었다는 사실은 정말 감당키 어려운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대일전에 뛰어든 것은 한반도의 소련위성국화를 위한 고도의 정치수단이었던 것이 아닌가. 이런 스탈린의 음모를 폭로하고 차단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다. 그래서 오늘의 대한민국에 이승만 정신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암흑 속에서 대한민국 청사진을 그린 이승만

     이와 같은 생생한 기록들은 김극후씨의 저서인 “평양의 소련군정”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여기에는 단순한 군사분계선이던 38선이 정치 분계선으로 바뀌면서 국경 아닌 국경으로 고착화된 과정과 소련공산당의 가짜 김일성 만들기 공작, 그리고 북조선 인민공화국 수립과정과 그 배후, 더 나아가 한반도의 소련위성국화 전략 등이 놀랄 정도로 상세히 수록돼 있다.

     이처럼 저자가 북조선인민공화국 만들기의 주역을 담당했던 평양 소련군정의 정치사령관 “레베테프”장군을 비롯한 핵심인물들과의 인터뷰와 소련공산당 비밀문서들을 뒤져가며 어렵게 얻어낸 귀중한 역사의 증언과 자료들을 접하면서 느낀 것은, 이것이 한국현대사를 고쳐 쓸 수 있는 결정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건국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오해가 말끔히 가시게 되었다는 반가움이다.

     김극후 씨의 “평양의 소련군정”과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대한민국 건국의 내막”을 근거로 대한민국 건국과정과 북조선 인민공화국 수립과정을 비교해 보면, 절대로 이승만을 외면할 수가 없다.
     북한은 철저하게 계획된 스탈린의 한반도 소련의 위성국화 전략에 의해, 헌법과 초대내각까지 스탈린의 작품에 의해 만들어진 말 그대로 소련의 위성국인 반면, 남한은 소련공산당과 북조선 노동당의 지령에 의한 남노당의 살인, 방화, 테러, 파업이 난무하는 가운데, 미군정마저도 좌우합작정부 수립을 위한 회유와 공갈과 압력으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민주세력을 옥죄던 암흑정국 속에서 당당히 미래의 대한민국청사진을 그린 이승만 대통령의 위업은 대한민국 國父(국부)로 추앙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것이 대한민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고 그것이 국민의 도리가 아닌가.

     이제 타임머신을 타고 이승만 박사가 최악의 여건 속에서 온 몸으로 대한민국을 설계하던 해방정국으로 돌아가, 당시의 시대상황을 돌아보고 건국의 토대가 어떻게 마련되었는가를 국민적 양심으로 살펴보자.

     양동안 교수의 지적처럼, 해방정국에 있어서 공산세력은 어느 정치세력보다도 외세의 확고한 지원을 받은 세력이다. 다시 말해, 소련공산당과 북한 노동당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그들은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무장폭력 활동을 벌이며 한반도 전체를 공포와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은 그때까지도 이렇다 할 한반도 정책을 수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서울의 미군정의 정책도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미군정에서는 소련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임시 좌우합작정부 수립을 정책목표로 삼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진영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숨 막히는 역사의 현장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

     남한이 좌우대결의 격전지가 되면서 무장폭동, 살인, 방화, 테러, 파업으로 남한 전체가 전쟁터로 변하게 된 것은 어쩌면 소련이 동유럽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든 그 여세를 몰아 한반도까지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려는 스탈린의 야망이 본격화 되면서 부터가 아닌가 싶다.   
     그 전략을 실천하기 위해, 1945년 9월 20일에 “소련군 점령지역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스탈린의 지령이 내려지면서 한반도는 본격적으로 좌우대립의 결전장이 되고,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세우기 위한 치밀한 계획 하에 美蘇共同委員會(미소공동위원회)를 여는가 하면, 1948년 4월 말에는 평양으로 남한의 좌익세력만을 불러다 남북정치지도자 연속회의라는 저들만의 잔치를 벌이면서 북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의 명분을 쌓기 시작했다.

     이처럼 한반도 공산화를 위한 그 정치 쇼에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가 참여했다는 것은, 그분들을 아끼고 존경하는 많은 국민들에게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해방 후 3년은 혼돈의 시대

     8.15 해방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3년은 정말 숨 막히는 순간들로 이어진 혼돈의 시대였다.
    소련공산당과 북조선 노동당을 등에 업은 남한의 공산세력에 비해 자유민주세력은 턱없이 약세에 놓여 있었다. 이런 사실은 소련의 각본에 의해 수립된 북한정권처럼, 대한민국이 미국의 시나리오에 의해 건국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인 동시에 이승만에 대한 오해가 풀리는 단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을 미국에 예속시켰다는 이승만에 대한 비난을 불식시키는 역사의 증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미군정은 민주세력, 특히 이승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것은 소련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는 김일성처럼,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해 비판적이며 잘못된 정책에 대해서는 당당히 맞서는 이승만의 자신감과 뚜렷한 주관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소련을 의식한 미국은 남한정책에 대한 正道(정도)를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미군정은 임시좌우합작정부 案(안)을 가지고 민주세력을 압박하면서 남한정국을 더욱더 혼돈상태로 몰고 갔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지령으로 민족통일의 희망이 사라진 가운데, 미국의 정책마저 불확실해지자 이승만은 마침내 정면 돌파를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정식 교수의 논문에서 보듯, “언제까지 미국을 믿고 기다려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 이승만으로서는 “한반도 전체를 잃느니 아쉬운 대로 남한만이라도 민주정부를 세워 우리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적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곧 시대를 앞서가는 老(노)정치가의 외로운 결단이었으며 운명적인 것이었다. 이승만의 1946년 6월 4일의 “정읍발언”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해방당시의 남한사정은 80퍼센트가 문맹이었고, 전체적으로 보아 국민의 생활상태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지식층은 거의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사회주의사상에 물들어 있었고, 이들은 가뜩이나 어지러운 정국을 더욱 더 혼돈 속으로 몰고 있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남한이 선택해야 했던 길은 과연 어떤 길이어야 했을까.

     한치 앞도 점치기 어려웠던 그 같은 상황에서 이승만과 함께 민주세력의 두 축을 이루고 있던 백범 김구의 노선변화는 이승만의 대한민국 설계 작업을 더욱더 어렵게 했다.
     1948년 4월 말에 있었던 평양 남북 정치지도자 연속회의(이 회의에는 남한 민주세력을 완전히 제외시킨 채 북조선 노동당의 지시에 움직이는 공산세력과 사회주의자들만을 불러 모은 공산주의 전체 회의였다)에 참석하고 돌아 온 김구 주석은 북한에 이미 단독정부가 수립된 사실을 알았고, 또 “그 정부가 소련의 한반도장악을 위한 소련의 음모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지지할 수 없었다”고 선언했으면서도, 대한민국 수립을 위한 5. 10 선거 반대운동을 펼쳤다.

    왜 그랬을까? 정말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북쪽도 안 되고, 남쪽도 안 된다, 그러면 어디로 가자는 것인가.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의 갈림 길에서 제3의 길이란 있을 수 없는데 말이다.
     물론 백범이 공산주의자는 아니다. 철저한 민족주의자다. 그러나 종전 후 급변하는 세계질서의 흐름을 바라보는 국제 감각 부족으로 오류를 범했다는 것과,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한 정치적 실수는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는 그분에게는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로 남는다.
    하지만 국권회복을 위한 백범의 희생과 애국정신마저 부정돼서는 안 된다. 어쨌거나 김구 주석은 민족의 큰 어른으로 영원히 우리가슴 속에 남을 것이다.

      功(공) 7, 過(과)3의 업적

     이런 아픔들은 첫째 우리민족이 못난 탓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의 모든 비극에 대해, 올리버 박사는 “2차 대전 승리를 위해 동맹국이던 미소양국이 종전 후 이념대결의 상대국으로 대립하게 된 데 원인이 있다”면서 계속해서 그는 “세계질서 전환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국가가 아닌 하나의 볼모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것도 비극을 가져온 원인 중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1947년 “트루만 독트린”이 발효되기 전까지는 워싱턴 국무성의 한반도 정책은 어떤 면에서는 남한의 민주세력에게 보다는 좌익세력에게 더 유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서 평화를 실현하려든 꿈을 포기하면서 미국의 정책도 변하고, “트루만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한반도 정책에도 변화를 가져 왔다.

     이처럼 첩첩산중 같은 혼돈 속에서 대한민국 건국과 새 역사창조의 주역을 담당했던 이승만, 그는 확고한 신념과 용기, 세계를 보는 예리한 정치 감각과 국제 외교의 탁월한 능력,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인 자신감과 책임감에 이어 미래에 대한 비젼의 소유자만이 감당할 수 있는 역사의 무거운 짐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묵묵히 고난의 길을 헤쳐 온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주위의 압력과 협공에 못 이겨, 미군정의 좌우합작정부안이나, 김구 김규식의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정부안을 이승만이 수용했더라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됐을 것이고, 오늘의 북한처럼 짐승 같은 독재와 거지국가로 전락했을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소동은 바로 그 길로 가자는 것이 아닌가. 세계를 상대로 구걸하는 거지국가로 말이다. 이제 국민적 양심으로 돌아가 현실을 바로 보자. 무엇이 진실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애국하는 것이며 국민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인가를 냉철한 이성으로 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유영익 교수는 이승만의 업적에 대해,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 6 .25 전쟁이라는 전대미문의 재앙, 한반도를 둘러 싼 동서 냉전의 격화, 전쟁 후 지속된 남북 간의 치열한 대결 등, 여러 객관적 요인들을 염두에 두고 이대통령의 업적을 거시적으로 평가해 보면 그에 대한 채점은 적어도 ‘功(공)7, 過(과)3’으로 바뀌어야 마땅하지 않을까.”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제2의 해방정국

    그런가 하면, 김일영 교수는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근대 국민국가 건설에의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고 양국 간에 냉전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그는 남한만의 단정수립이라는 차선책을 택하는 결단을 내렸고, 냉전이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끝난 현시점에서 그것은 옳은 선택임이 증명되었다.”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한편, 이승만은 무엇 때문에 그처럼 미국과 대립하면서까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고집했느냐에 대해 양동안 교수는, “이승만이 남한에 정부를 수립하려는 목적은 소련이 북한을 공산화하기 시작하고 남한까지 공산화 하려는 노력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지역의 국민만이라도 공산당의 지배를 면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남한의 정부를 강화시켜 공산화통일이 아닌 민족통일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고 남한정부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박사의 정치고문으로서, 줄곧 이 박사의 건국사업을 도운 올리버 박사는, “이 박사는 공산당의 정체를 충분히 파악한 이상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오직 건국에 대한 신념만은 굽히지 않고 밀고 나갔다”라고 회고 하면서, “이승만 박사의 역할은 한국국민의 최대 이익과 자유세계의 안정보장을 위해 한량없는 가치가 있었음이 분명하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역사의 증언과 자료, 그리고 전문가들의 논문을 통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쉬운 대로, 지금 왜 이승만인가, 이승만 정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어느 정도 얻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앞에서 보아 온 것처럼 대한민국 탄생에는 너무나 많은 걸림돌이 있었다. 이 장애물들을 다 제거하고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이승만 정신은 곧 오늘의 한국의 시대정신이고 그 때처럼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통일정부가 아닌 단정수립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것과 부정적 비판을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누가 통일정부를 마다하겠는가. 아쉬움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다만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보아 어떤 길이 우리 민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나를 민족적 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 주소를 보라. 이게 어디 일류국가를 꿈꾸는 자유 대한민국이라고 할 수 있는가.
    광주 5. 18 묘역에 “주석단”이 등장하는가 하면, 광화문 네거리에 “인공기”가 나부끼는 기막힌 현상, 정말 대한민국이 맞는가. 그런가 하면 북한노동당의 영향권에 들어간 대한민국 공무원 집단이 새로운 정치집단이 되고, 제도권 안의 정치인들까지 노골적으로 친북좌경화로 기우는, 마치 제2의 해방정국을 맞은 느낌이다.
    그래서 이승만의 리더십이 다시 아쉬워지고 이승만 정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승만 제자리 찾기 캠페인을 제안하는 것도, 이승만 정신을 오늘의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이고 제2의 건국운동을 펼치자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지금 왜 이승만인가?”라는 시대의 물음은, 곧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지경이 되었는가”라는 대한민국 현실에 대한 실망감과 국민적 충정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더 이승만 재평가 작업에 인색하지 말자. 그리고 본격적인 기념사업도 추진하자. 2세들의 역사교육을 위해서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을 부정한 백범의 기념관이 저처럼 거대하다면,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의 기념관은 보다 더 웅대(雄大)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형평에 맞는 처사가 아닌가.

     그리고 경제대국으로 가는 길을 연 박대통령을 선업화의 영웅으로 국민의 존경의 대상이 된다면, 이 모든 것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 건국대통령은 국부(國父)로 추앙받아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러면 오늘의 난국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이다.

    대한민국,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거룩한 이  름인가.  그 앞에 평화와 번영의 길이 활짝 열려야 하지 않겠는가. 남북전쟁의 아픔을 딛고 번영의 길을 달려 와 오늘의 미국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