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⑪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나는 테이블에 앉았다.

    드루시 호텔의 식당 안이다. 빈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두 여자가 차지한 테이블에 합석을 한 것이다. 그래서 합석을 허락해 준 인사를 했다.

    웨이터에게 주문을 한 나는 식당 안을 둘러보았다. 오후 6시경이어서 이른 시간이었지만 손님이 많다. 국제연맹이 오늘 개막식을 했기 때문에 외국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또 상처 받았다.

    물잔을 든 나는 문득 상처에 둔감해지지 않는 자신을 깨닫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일 둔감해져서 아픔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는 조선 독립에 대한 의욕 또한 사그라져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디서 오셨죠?」

    옆에서 묻는 소리에 나는 생각이 깨어났다. 머리를 든 나는 두 여자중 젊은쪽과 시선이 마주쳤다. 선한 인상이다. 서양인이면서도 동양인의 차분하고 은근한 분위기가 풍긴다.

    「코리아입니다.」

    영어로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여자가 일본인이냐고 묻지 않은 것이 고맙게 느껴졌다. 열에 일곱은 그렇게 묻는다. 양복장이 동양인은 다 일본인 인줄로만 아는 것이다.

    「아, 여행 잡지에서 코리아에 대해서 읽었어요.」
    하고 여자가 말을 이었는데 옆에 앉은 중년여인이 낮게 말했다. 독일어여서 알아듣지 못했지만 주의를 준 것 같다. 중년 여자는 어머니처럼 보였다.

    「전 승만리라고 합니다.」
    내가 정식으로 부인과 아가씨를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코리아를 알고 계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전 프란체스카 도너, 그리고 이분은 우리 엄마시죠.」
    중년은 영어를 모르는 것 같았고 아가씨가 밝은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우린 빈에서 온 관광객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오셨군요.」
    나는 잠깐 젊은 프란체스카의 밝은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프란체스카는 흰 레이스가 달린 연분홍색 원피스를 입었다.

    우리가 시킨 음식이 각각 날라져 왔으므로 식사를 하면서도 프란체스카는 이야기를 계속 했는데 나는 머리만 끄덕이거나 웃어주기만 해도 되었다. 프란체스카가 제 말에 제가 대답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기억나지 않지만 모처럼 편안하고 안정된 분위기였다. 식당 안은 혼잡한데다 소음도 심했으나 나는 집안 거실에서 식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프란체스카와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다.

    「다음에 또 뵙기를 바랍니다.」
    먼저 식사를 마친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했을 때 프란체스카가 따라 일어섰다.

    「제 연락처 드릴 테니까 연락 주세요.」
    그러더니 손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놀란 나는 먼저 어머니부터 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도너 여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다.

    명함을 받아 든 나는 몸을 돌렸다. 모녀의 따뜻한 분위기가 고마웠고 내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프란체스카의 태도가 인상 깊었다. 나는 내 나이가 58세라고 밝혔던 것이다. 프란체스카는 당시에 33세였으니 나이차가 25년이다.

    그리고 내가 강한 인상을 받은 또 한가지가 있다. 그것은 프란체스카가 첫 번째 결혼에 실패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태도였다. 나는 그 나이가 되도록 한번도 그렇게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당당하게 실패를 인정한 그 태도가 부럽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