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일본인의 필독서는 만화이다?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1.01.15 17:13:48

일본에서 발간되는 책 가운데 문고가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30%나 된다. 그 효시는 1903년에 선보인 도미산방(富山房)의 ‘수진(袖珍) 명저 문고’였다고 한다. 세계적으로는 1867년에 나온 독일의 ‘레크람 문고’가 가장 빨랐던 모양이다.
유럽에서 문고와는 약간 성격이 다른 페이퍼 백(paper back)의 등장은 1935년이었다. 영국인 알렌 레인(Allen Lane)이 펴낸 6펜스짜리 싸구려 책 ‘펭귄 북스(Penguin Books)’가 그것이었다. 펭귄 북스가 정평 있는 소설을 헐값으로 팔아 크게 성공을 거두자 이태 뒤에는 이를 모방한 ‘펠리컨 북스(Pelican Books)’가 생겨났다.
뒤질 새라 프랑스의 프레스 위니베르시테르 드 프랑스 출판사가 ‘크세즈(Que Sais-je)’ 시리즈를 기획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몽테뉴의 말에서 딴 크세즈 첫 권은 1941년에 나왔다.
비록 출발은 늦었으나 일본에서 문고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은 출판사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이 1927년 7월10일에 펴낸 ‘이와나미 문고’였다. 유명한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마음>을 위시한 일본 문학작품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 한꺼번에 22권을 발간했다. 닷새 뒤에는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 목록에 첨가되었다.
이후 이와나미 문고는 끊임없는 지성의 자양분을 일본인들에게 제공했다. 픽션과 논픽션을 망라하여 호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학생층과 청년 지식인들에게 고전으로부터 사상, 문학, 과학의 너른 지평을 열어주었다. 발간 당시 책값은 검은 별표로 표시했다고 한다. 가령 <마음>은 별 2개로 40전, <전쟁과 평화>(1권)는 별 5개로 1엔이라는 식이었다. 당시 물가는 메밀국수 한 그릇이 10전, 카레라이스가 20전, 맥주 큰 병이 40전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의 초봉이 50엔, 은행원은 70엔이었다니 얼추 가늠할 수 있으리라.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13년에 이와나미 서점을 창업한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는 ‘노동은 신성하다’는 신념을 지니고 청경우독(晴耕雨讀)의 전원생활을 바랐다고 한다. 이 출판사의 심벌마크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들’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의 궁핍했던 시절에도 지식인의 둘도 없는 반려가 되었던 이와나미 문고. 이 출판사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니 그동안 총 발간 타이틀이 무려 5천4백 종이라는 사실과, 그 동안 약 157만 부가 팔린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필두로 10종의 밀리언셀러가 탄생했다(2006년 12월 현재).

이렇게 이와나미 문고가 상징하듯 일본인은 책벌레다. 그런데 어쩌면 이제는 표현을 바꾸어야할 지도 모른다. 일본인은 만화 벌레라고.... 그만큼 만화에 푹 빠져 있다. 하기야 문학서에서 학술서, 법전에 이르기까지 만화에 쓸어 담지 못할 장르가 없다. 그 바람에 ‘만화는 종합예술이다’는 명언(?)도 들려온다. 그러니  “일본인은 앞으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만화를 읽게 될 것이다”는 어느 일본 지식인의 선언이 결코 빈말로 들리지 않았다.
'망가'로 불리는 일본만화의 효시는 메이지시대에 등장한 신문만화였다고 한다. 한국 신문에도 실리는 만평에서 시작하여 네 커트짜리 시사만화로 이어졌다. 20세기 초에는 스토리를 중시하는 본격 망가가 선보였다. 소년소녀 취향의 내용이 많았는데, 태평양전쟁 패전 뒤에 나온 하세가와 마치코(長谷川町子)의 <사자에상>(=‘사자에’는 소라, ‘상’은 경칭이다)이 일으킨 붐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사자에상>은 종이 만화에서 텔레비전 만화로 영역을 확대해 갔다.
망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단행본과 잡지다. 고상하게 표현한답시고 앞의 것을 코믹스라 하고, 뒤쪽은 코믹지(誌)라 부른다. 둘 다 한데 엮어 부를 경우에는 망가 혹은 코믹(Comic)인 모양이다. 최근에 와서는 그와 같은 텔레비전 만화에 이어서, 본격 극장용 동화(動畵)인 애니메이션에 푹 빠진 세대가 늘어나면서 망가 자체의 증가세가 한풀 꺾이기는 했다. 그러나 일본 출판계에서 세워진 망가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먼저 잡지 분야. 슈에이샤(集英社)가 발간하는 코믹지 <주간 소년 점프>의 주당 발행부수가 한창 때는 6백만 부를 넘었다. 그밖에도 3백만 부를 육박하던 고단샤(講談社)의 주간 코믹지 <소년 매거진>을 비롯한 밀리언셀러 잡지가 10개를 헤아렸다. 사원수가 1천 명을 훌쩍 넘는 대표적인 출판사 고단샤는 만화가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에 비해 가장 잘 팔린다는 시사 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의 발행부수는 평균 65만 부 가량이다.
다음은 단행본인 코믹스 부분. 슈에이샤가 시리즈로 내놓았던 <드라곤 볼>은 1억2천6백만 부(全 42권)로 1위를 마크했다. 같은 출판사의 <슬램덩크> 역시 9천3백만 부(전 31권)라는 놀라운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하기야 100권이 넘게 똑같은 타이틀의 시리즈가 나오고 있는 만화 단행본도 있으니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런 통계만 보더라도 일본에서의 망가의 괴력을 느낄 수 있다. 왜 이렇게 망가의 전성시대가 되었는가? 어떤 이는 농반 진반으로 “국립 도쿄대학생들 덕분이다”고 속삭인다. 진짜 망가 같은 그 이야기는 이렇게 그려진다. 1950년대에서 60년대에 걸친 시기의 전차 차내, 도쿄대학 학생들이 독서삼매에 빠져 있다. 다른 승객들이 궁금해진다. 지식인들에게 자양분을 제공하는 필독서, 이와나미 문고가 아님은 분명한데.... 그것이 망가였다. 자, 도쿄대학에는 못 들어갈망정 망가라도 따라서 읽자. 저질, 폭력, 외설이 3대 트레이드마크로 여겨지던 망가를 보는 게 흉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붐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다.
그게 믿어지지 않으면 이건 어떨까? 일본 정치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인 총리대신이 된 아소 타로(麻生太郞). 그는 외무장관 시절 자신의 홈페이지에 “일주일이면 10권에서 20권 가량의 코믹지를 읽고, 승용차에도 반드시 최신 잡지를 싣고 다닌다”고 자랑했다. 또 2007년 5월 비엔나에서 열린 핵확산방지조약 회의에 참석하는 일본 대표단에게 30권의 망가를 갖고 가도록 했다. <맨발의 겐>이라는 제목의 그 망가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슬픈 이야기를 그린 명작이었다. 일본 대표단은 영어로 번역한 이 망가를 가져가 외국 대표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소는 이를 두고 ‘망가 외교’라며 우쭐댔고, 내친 김에 ‘국제 망가상’을 창설하여 노벨상처럼 권위 있는 상으로 만들겠다면서 기염을 토했다.
믿거나 말거나 이다. 하지만 다른 물가에 견주자면 예나 다름없이 '싼 맛', 머리를 싸매고 읽지 않아도 되는 '쉬운 맛', 도처에 늘려 있어 언제라도 손에 쥘 수 있는 '흔한 맛', 이 세 가지 맛에 이끌려 망가는 남녀노소 일본인의 생필품 지위를 가뿐히 얻었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도서 문의 : 기파랑 02-763-8996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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