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⑬  

     나는 1913년 8월 25일에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교민 아이들의 교육에 열정을 쏟는 한편으로 교회에서 교민들의 단합과 조국에 대한 봉사를 강조했다.

    나를 하와이로 초청한 감리교 감리사 와드만이나 박용만 모두의 기대에 부응했고 나 또한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이 부여된 것을 행운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또한 「태평양잡지」라는 월간지를 발행했는데 서민층의 계몽을 위한 잡지였다. 그래서 한글만 썼다. 1백 페이지 정도의 잡지여서 나 혼자서 그것을 다 만들려니 밤늦게까지 글을 쓰는 날도 많았다.

    지난 일년간 본토를 방황한 공백을 그것으로 메우려는 것처럼 몰두했다.
    방랑자란 의식을 지우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인지도 모른다. 항상 초조했고 막막했으며 그리움과 울분, 그 모든 것이 혼합된 심사를 일로 때우려고 한 것 같다.

    그것이 나 뿐이겠는가? 박용만도 그렇다.
    내 가장 아끼던 의동생. 열혈청년. 내 모든 것과 얽혀져 있던 박용만은 무력(武力)에 의한 독립뿐이라고 믿는다. 나는 무력은 현실에 맞지 않고 가능한 모든 외교적 수단을 강구해야 된다고 주장해 왔다.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新韓國)의 사장겸 주필이 되었는데 국민회로부터 운영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다. 또한 박용만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총회를 하와이 정부로부터 사단법인 인가를 받도록 주선하여 1913년 5월 인가를 받았는데 그것으로 하와이 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모두 박용만의 공적인 것이다.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는 것은 국민회 하와이 총회가 경찰권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인 사이의 문제가 발생하면 국민회 경찰부장이 조사, 처리하여 미국 법원에 이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회의 조사와 초심 등 법적 행사를 인정받게 된 것이니 박용만은 이것을 무력독립의 기반으로 굳힐 작정이었다.

    「형님, 이제 국민군단이 창설되면 조선의 첫 정식 군대가 됩니다.」
    어느 날 학교로 찾아온 박용만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박용만은 이제 15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 교사 낙성식을 앞두고 있다. 한인 농장주의 농장 안에 설립된 병학교는 이미 2백명 가까운 지원자를 받아 놓았다고 한다.

    나는 소리 죽여 숨을 뱉았다. 본토인 네브라스카에서도 박용만은 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 그래서 재작년에는 내가 마지막 졸업식에 참석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보게, 교민들이 회비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네.」
    내가 말했더니 박용만이 대뜸 머리를 끄덕였다.
    「압니다. 국민회 회비 외에 교회에다 내는 돈도 있고 또 지역마다 사업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앞으로는 국민회 총회에서 각 지역회의 지역 사업도 승인을 받도록 할 계획입니다.」
    나는 머리만 끄덕였다.

    교회를 돌아다니다 보면 교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이제는 친숙해진 때문인지 나에게 불만을 털어놓는데 대부분이 국민회 사업이다. 국민회에서 예산은 함부로 전용한다는 것이다. 간부들이 횡령한다고도 했다.

    국민회 예산 규모는 컸다. 한인교민이 5천명 가깝게 되는데다 대부분이 국민회에 가입해 있었는데 1년 회비가 5불이다. 사탕수수 노동자 한달 월급이 30불 정도였으니 큰돈이다.

    그 5불에서 국민회 하와이 총회는 50센트를 미국 본토의 국민회 중앙총회에 보내고 나머지 4불 50센트를 자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든 내가 박용만을 보았다. 박용만이 병학교 건설에 쓴 돈을 교육 사업에 쓴다면 학교 두 개는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박용만은 국민회 하와이총회의 배후 실력자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