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자위대는 참 막강하다. 병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육상, 해상, 항공자위대를 합쳐 전체 정원 25만여 명에 실제 인원은 24만여 명에 불과하다(2007년 3월31일 현재). 1억이 넘는 인구에 비하자면 아주 적은 편이다. 그런데 어째서 막강한가?

  • ▲ 일본 자위대의 위용ⓒ자료사진
    ▲ 일본 자위대의 위용ⓒ자료사진

    우선 예산과 장비가 어마어마하다. 신무기의 경우 다른 골치 아픈 이야기는 다 그만두고 두어 가지 첨단 장비만 들먹여보자. 한국 해군이 ‘세종대왕함’ 한 척으로 이제야 겨우 면피를 한 이지스함, 일본 해상자위대는 6척을 거느리고 있다. 한국 공군은 아직 보유하지 못한 조기 경계경보기 E-2C가 항공자위대 각 기지에 13기나 배치되어 있다.
    2009년도의 방위예산은 약 4조 7000억 엔이었다. 참고로 같은 해 일본의 국가예산(일반회계총액)은 대략 88조 엔이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 본부를 둔 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2009년 6월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의 군사비는 세계 7위였다(2008년 기준). 미국에 이어 중국이 2위에 올라섰고, 프랑스와 영국, 러시아가 그 뒤를 이었다.
    더구나 일본은 2005년부터 2010년 3월까지 5년 동안 ‘중기(中期) 방위력 정비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총 24조 2천4백억 엔을 투입하는 중이다. 이토록 두둑한 자금으로 이지스함, F15 전투기, 공중 급유기 등을 추가 구입한단다.
    그러니까 일본 정부가 말하는 ‘방위력 정비 계획’이란 표현은 눈 가리고 아옹 하는 식이다. 남들이 볼 때는 정비 계획이 아니라 ‘증강 계획’이 보다 적확한 표현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것은 자위대의 태생적 한계에 기인한다.
    일본이 원폭 두 방에 무조건 항복한 뒤 만들어진 현행 헌법(1946년 11월 공포)에는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배어 있다. 일본이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 놓은 것이다. 헌법 9조에는 이렇게 명시되었다.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거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및 그 이외의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이 조항으로 인해 ‘평화 헌법’이라는 그럴싸한 별명도 얻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자 일본 국내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한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었다. 그것이 동서냉전의 여파로 미국 묵인 아래 ‘내 나라만 지킨다’는 의미의 자위대로 발전했다. 1954년 7월1일부터였다. 그러나 행여 외국인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던질까 염려하여 영어 표기를 위시하여 각종 용어 선택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자위대의 영어 명칭은 ‘Japan Defence Force'라고 했다. 군대는 분명 ’Military'이겠건만 ‘Force’라고 눙친 것이다. 11개 사단, 2개 여단, 2개 혼성단, 1개 공정단으로 구성된 육상자위대의 보병부대도 애매하게 ‘보통과(普通科)’라고 부른다. 그러니 ‘증강’이 ‘정비’로 둔갑하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이 있다. 1953년 11월3일의 일본 국회 답변을 통해 당시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가 자위대를 두고 ‘전력(戰力) 없는 군대’라는 절묘한 정의를 내렸던 것이다.
    문제는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금, 자위대가 ‘전력 있는 군대’로 돌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위대가 보유한 최첨단 병기들이 그걸 웅변한다. 게다가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자위대의 해외 파병도 이제는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만약 해외에 평화를 안겨줄 목적으로 파견된 자위대가 저항 세력의 공격을 받아 막심한 인명 피해를 입는다면, 과연 일본이 팔짱만 끼고 있겠느냐는 것이다. 잊을 만하면 불거져 나와 이웃나라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일본 내의 헌법 개정 논의도 위의 헌법 ‘제9조’를 손보겠다는 의도가 역력해 보인다.
    우선 표면적인 변화부터 생겨났다. 2007년 정월, 자위대를 관장하는 정부 부처의 이름을 방위청에서 방위성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영어 표기도 ‘Japan Defense Agency’에서 ‘Ministry of Defense’로 버젓이 고쳤다. ‘장관’이던 수장의 명칭 역시 덩달아 한 급수 위인 ‘대신(大臣)’으로 올라갔다. 게다가 2009년 봄부터 북한이 국제사회의 우려는 들은 체 만 체 위성 발사와 핵실험을 잇달아 실시하자 덩달아 일본의 동요도 높아졌다. 그러니 자칫 어제의 패전국 일본이 ‘군사대국’의 깃발을 또 다시 흔들까봐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인들 중에는 두 가지 점에서 자위대가 막강한 군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첫째는 병력이다.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募兵制)여서 절대적인 숫자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런 식으로 젊은이들을 불러 모우자니 대우를 잘 해주어야하고, 그 바람에 자위대 예산의 절반가량을 인건비와 식량비가 차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찮다. 병력의 경우, 전체의 충원률이야 90퍼센트 중반을 유지하이지만 장교 이상의 간부와 일반 사병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즉 일반 사병의 충원률이 상대적으로 낮긴 하지만 간부 자위대원은 월등히 높은 비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급 인력자원이 풍부하니까 여차하면 동원령을 내려 모자라는 병력을 채운 뒤 짧은 시간 내에 충분히 교육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국제정세라는 것이 생물과 같아서 걸핏하면 요동을 친다. 동북아시아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보아도 섣불리 한 치 앞의 정세 변화를 점치기 힘든 상황이 거듭된다. 종이호랑이에서 동물원 우리 안의 호랑이로, 거기서 다시 야생의 호랑이로 변신을 거듭하는 강대국 중국에 대한 일본의 경계심은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런 판에 자꾸 과거의 잘못만 들이대면서 꾸짖어서 일본 자위대의 손발을 묶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어쩌면 그게 도리어 우리를 자승자박(自繩自縛)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자위대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방위성 직할 기관인 기술연구본부(TRDI)가 그것이다. 1952년에 불과 47명의 인원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그런 TRDI가 지금은 산하에 4개 연구소와 1개 선진기술 추진센터가 있고, 삿포로를 비롯한 4개 지역에 시험장을 갖추고 있다. 2007년도 현재 정원은 1천1백여 명(그 중 연구직이 절반가량)이고, 순수 연구개발비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체 예산은 약 1천5백여 억 엔이다.
    이곳에서는 육해공 각 자위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첨단 무기와 부품 등을 개발한다. 물론 일본에는 방위청 직속인 TRDI 외에도 약 2천 개의 민간 기업이 방위산업에 매달리고 있다. 오래 전 어떤 책자에는 TRDI의 ‘연구에 관한 10가지 명심 사항’이라는 것이 소개되어 있었다.

    1, 사명을 자각할 것. 2, 노력을 아끼지 말 것. 3, 일에 책임을 가질 것. 4, 최고 권위자가 될 것. 5, 제 손으로 일할 것. 6, 항상 테마를 가질 것. 7, 불만을 극복할 것. 8, 기초학문을 잊지 말 것. 9, 고립하지 말 것. 10, 인간적이 될 것.

    그리고 그 무엇보다 “신무기는 완성되는 순간 구식이 되고 만다”던 TRDI의 교훈에 크게 고개가 끄덕여진 기억이 난다.
    끝으로, 자위대 하면 떠오르는 소설가 한 명을 모른 척 그냥 넘어가기가 아쉽다. 문인과 군대는 어째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 것 같은데, 이 사람은 보통 유별난 게 아니다. 미시마 유키오. 문학 이외에 검도와 보디빌딩, 영화 출연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으로 세상의 시선을 끈 일본의 돈키호테였다. 그가 어느 날 자위대 체험 입대라는 걸 하는가했더니, ‘방패 모임’이라는 극우 반공 동아리를 결성했다.
    그리고 일을 저질렀다. 사병(私兵)으로도 일컬어진 ‘방패 모임’ 제자들을 이끌고 1970년 11월 도쿄 신주쿠에 있던 자위대 동부방면 총감부-- 한국에 빗대자면 수도방위사령부라고 부를 만하다--로 난입하여 쿠데타를 선동했다. 자위대가 궐기하여 다시 천황을 떠받들고 나아가자고 호소했으나 불발에 그치고, 그는 할복 자결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마지막 사무라이와 같은 죽음의 방식을 택한 미시마에 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그와 절친했던 미국인으로, 오늘날 미국인 최고의 일본 전문가로 꼽히는 도널드 킨이 그랬다. 킨은 미시마가 결코 쿠데타 성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미시마가 거사 직전에 자신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네라면 내가 하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여 주리라 생각하네. 그러므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네. 나는 훨씬 오래 전부터 문인이 아니라 무인으로 죽으려고 다짐하고 있었네”라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미시마가 자위대 궐기를 촉구하던 그 장소에 지금은 자위대를 통솔하는 일본 방위성 청사가 들어섰다. 그러니 어쩌면 방위성 근무자들의 뇌리에 30여 년 전 일장기가 그려진 하얀 머리띠를 두르고 열변을 토하던 미시마 유키오의 모습이 현실감 있게 되살아날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분이 든다. 자칫 자위대가 우향우 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미시마 유키오(三島由起夫) 
    본명 히라오카 기미타케(平岡公威). 고교 재학 시절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단편집 <꽃피는 숲>을 발간했다. 도쿄대학 법학부 졸업. 나중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추천으로 정식 등단. 일본 문단의 주류였던 사소설 전통을 부정하고 허구와 상상력에 의한 고유의 작품세계를 일구었다. 여러 문학상을 받았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되기도 했다. 대표작 <금각사(金閣寺)> <풍요의 바다> 등. 탁월한 미학을 드러낸 작품세계에서처럼 45년의 삶을 나름대로의 미학으로 막 내린 감이 없지 않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도서 문의 : 기파랑 02-763-8996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