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공간의 김구, 선거도 정부수립도 반대

    2008년 6월 16일자 신용하 백범학술원장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백범이 광복 후 환국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할 때, 남·북한의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먼저 ’남북협상‘을 해보자고 주장하며 1948년 4월 평양을 다녀온 것을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참으로 큰 오해이다.”

    신용하 씨의 주장은 김구 초상 10만 원권 화폐 도안인물 선정 사건과 맞물려 건국 60주년을 기해 봇물 터지듯 터진, 건국 당시 김구의 부정적인 행적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봉합(封合)의 대응으로 보인다. 신용하 씨의 주장처럼 그것이 과연 전혀 사실이 아닌 순전한 오해인지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김구는 1948년초만 해도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에 참여한다는 데에 이견이 없었다. 김구뿐만 아니라 한독당 구성원 다수도 같은 생각이었다. 유엔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한 소련의 입장을 재확인했다는 보도가 있자 한독당은 1월 25일 “소련측이 북조선 입경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부득이 유엔 감시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1948년 1월 26일, UN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한 후 열린 청문회에서 김구는 돌연 외국 군대의 즉시 철수와 남한만의 선거 반대를 표명하였다. 이에 외군 철수 후의 무정부 상태와 내란을 생각지 않느냐는 UN위원단의 질문에 김구는 “그것은 유엔한국위원단이 해결할 책임”이라고 답변했다. 이러한 답변에 프랑스의 마네트(Manet) 위원은 “김구 씨는 UN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군대가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는 핀잔을 했다.
    유엔위원단을 만나고 나온 김구는 “미·소 양군이 철퇴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양군이 철퇴한 후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장덕수 암살후 한민당과 갈등, 돌아서

    비록 조건부였지만 총선 참여를 천명했던 김구와 한독당이 돌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장덕수 암살사건의 영향을 들 수 있다. 1947년 11월 17일 김구가 당수인 한독당이 주축이 된 각 정당협의회는 미·소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며, 남북 정당대표회의를 구성하여 통일정부를 세우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11월 21일, 70여 민족진영 단체들이 이러한 주장은 공산당의 대변자로 밖에 볼 수 없다고 규탄하자 김구는 이 주장을 보류하고, 12월 1일 UN 결의안과 이승만 박사의 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12월 2일, 김구의 휘하로 알려진 김석황의 주도하에 한민당의 중진인 장덕수 암살 사건이 발생한 후, 김구의 정치노선은 다시 돌변하여 결과적으로는 공산당과 같은 노선으로 들어선 모습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에서는 장덕수 암살 배후인물로 김구를 지목했다. 그러자 김구 측에서는 이승만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이 박사와 하지의 관계는 견원지간을 방불케 하는 상태였다. 결국, 비서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박사에게 전달하지 않았고, 이 박사가 고의로 도움 요청을 회피한 것으로 생각한 김구는 몹시 서운해 하며 두 사람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둘째, 1936년 임정의 주불(駐佛) 외교위원이었던 서영해의 등장과 성시백의 공작을 들 수 있다.
    임정 국무위원을 지냈으며 해방 후에도 김구를 추종해 온 조경한에 의하면 “김구는 처음에는 단선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서영해가 나타나 ‘남북한을 통털어 총선거를 하면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실 텐데 무엇 하러 이  박사가 주도하는 남한만의 선거에 참가하려고 하십니까? 김일성도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변심하게게 되었다”는 것이다.

    북한 로동신문의 보도 내용

    동시에 성시백의 김구 회유 공작이 있었다.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로동신문’ 2면 특집보도에는 성시백이 김구를 회유(懷柔)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성시백 동지는 4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한 반동분자로 있던 김구 선생을 돌려 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
    성시백 동지와 김구 선생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그 사연인즉 ‘상해림시정부’의 간판을 달고 프랑스 조계지 안에 있던 김구 선생을 비롯한 ‘림정’사람들이 프랑스 총영사의 지시에 따라 조계지 밖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성시백 동지가 그들을 구원해 준 것이었다......김구 선생은 이 때 성시백의 소행을 고맙게 여기었으며 그를 출중한 인물로까지 보게 되었다. 이런 관계로 하여 성시백 동지는 김구 선생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 생각에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위하여 한생을 바쳐 오신 분인데 김일성 장군님을 직접 찾아 뵈옵는 것이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이북에서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 민족 자주 력량으로 조국을 통일하기위한 대표자들의 련석회의를 개최할데 대한 제의를 내 놓았는데, 이 거사가 성사되기만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우리 민족사에 특기할 사변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견입니다.”
    김구 선생은 그의 이 말을 듣고 한숨을 푹 내 쉬더니 “자네 말에는 반박할 여지가 하나도 없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들이라면 무조건 적으로 규정한 이 김구를 반가워할 리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라고 생각한 성시백 동지는 “바로 그것이 선생님의 고충이시겠는데 나라가 영영 둘로 갈라지느냐, 아니면 통일이 되느냐 하는 시국에서 지나간 일을 두고 시비할 것이 있습니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선생님이 결단을 내리시어 북행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국 사람들의 시녀노릇을 하는 리승만과 손을 잡겠습니까? 아니면 북에 들어가서 김일성 장군과 마주 앉겠습니까?”
    “음, 그러니 군은 김일성 장군을 신봉하고 있군 그래. 알겠네. 내 알아서 용단을 내리겠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실태를 인편으로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 드리었다. 그의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 수령님께서는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할 각계 민주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김구, 김규식에게 보내는 초청장만은 성시백 동지가 직접 전달하도록 하시였다......(중략)
    간단한 인사말이 오고 간 다음 성시백 동지는 김구 선생에게 “선생님은 전번에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과거를 불문에 붙인다는 것을 무엇으로 담보하겠는가고 물으셨지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그리고는 “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선생님의 애국충정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고 지나간 일들을 모두 백지화할 것이라고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의사를 전달할 뿐입니다.”
    그러자 김구 선생은 “아니, 뭐, 뭐라고? 김일성 장군님께서?” 그렇게 말하며,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하고 물었다. “내가 바로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입니다.”
    김구 선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문과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김구 선생은 “아니 자네가? 그렇다면 임자가 오늘 오신다고 하던 김일성 장군님의 특사란 말씀이시오?”하고 물었다. 이렇게 김구 선생의 말투도 대뜸 달라졌다.
    성시백 동지가 일어나서 김구 선생에게 엄숙히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우리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께서 백범 선생에게 보내시는 남북련석회의 초청장입니다.” 이 순간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김구 선생의 얼굴이 감격과 흥분으로 붉어졌다.
    “김일성 장군님께서 그처럼 믿어 주실 줄을 내 미처 몰랐습니다. 장군님께서 불러 주셨으니 기여이 평양으로 가겠습니다. 내 이후로는 다시 일구이언하는 그런 추물이 되지 않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1985년 남북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1948.4)에 참석한 김구의 행적을 소재로 한 <위대한 품>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김일성에게 투항하여 국기와 임시정부 관인까지 바치면서 “황해도 신천에 과수원이나 하나 마련해주면 여생을 장군님에게 의탁하여 살겠다.”고 읍소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등 김구를 비하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대한 품>은 김대중 정권 시절인 2002년 12월, 남한의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발간한 ‘통일 한국인이 보아야 할 북한영화 50선’에 수록되었고, KBS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결국, 김구는 생전(生前)은 물론 사후에도 김일성-김정일의 이용 대상이 된 것이다.

    남북 정당대표회의 개최를 위한 북측의 준비과정
    1947년 9월경, 북한과 연계를 갖고 있던 사람들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없애고, 새로운 민족통일 연합체를 성사시키기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남한 정치권의 새로운 통일대오를 꾸리기 위해 자기가 속한 정당에서 정치적 신임을 받고 있던 실무자들인 근로인민당의 최백근(1961년 체포됨, 사형. 사회당,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서 활동, 북한의 애국열사능에 묘비가 있음), 한독당의 안우생, 민족자주연맹의 권태양, 민주독립당 강병찬, 조선인민당 염정권, 삼균청년동맹 김홍곤 등은 미국과 이승만에 반대하여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 연합을 실현시켜 나갔다.
    남과 북의 노동당 지도부는 47년 12월 중순과 48년 2월 초순에 열린 ‘정치국연석회의’에서 북로당 제2차 전당대회가 끝나는 4월 중순에 남북 정당대표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성시백의 서울공작위원회를 통해 김구에게는 김구의 비서로 있던 안중근의 조카 안우생(1991년 사망.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혔음)을, 김규식에게는 4월 남북연석회의 남측 대변인으로 대회를 성사시킨 실무자인 권태양(1966년 사망.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조국통일상’을 수여 받음), 조소앙은 비서였던 김홍근을, 그리고 홍명희에게는 그의 아들 홍기무와 비서였던 김기환을 통해 집중 공작하여 남북협상을 성숙시켜 나갔다.
    48년 2월과 4월의 ‘레베제프 비망록’에 의하면 소련은  ‘전조선인민위원회대회’ 소집을 구상하고 있었다. 소련은 이 대회를 통해 남한만의 선거 반대와 분쇄, UN임시한국위원단을 한반도로부터 추방하고 미·소 양군 철수 등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했다.
    이와 같이 남북 정당대표회의는 김구를 비롯한 일부 지도자의 ‘구국의 결단’이나 명망가들의 서한 왕래로 개최된 것이 아니라 소련과 북측의 철저한 사전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임시정부 전통 포기하고, 대한민국 건국 반대
    결국, 김구는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월 19일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한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미군 철수와 북한에 모인 좌파 56개 단체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 남조선 선거 반대와 수립된 정부 불인정을 골자로 하는 4·30 성명에 한독당 대표 자격으로 서명했다. 자신이 지켜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스스로 무시해 버리고, 북측과 합작으로 새로운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로 한 것이다. 진의야 무엇이든지 김구의 행동은 소련과 북측의 의도대로 따라준 결과를 야기했다.
    김구는 북한에서 북한헌법과 국기제정 등 공산정권수립의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목도했다. 그럼에도, 공산측에 가담하여 UN이 결의한 선거로 세워질 남한의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방해하기까지 했다.

    대한민국 불인정, 북한과 한목소리
    1948년 5·10선거후 5월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이승만 국회의장은 이 국회에서 세워질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과 민국의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한다고 선언했다.
    그런데도 5월 5일 북한의 연석회의에서 돌아와 4·30성명이 남북요인회담의 성과라고 밝혔던 김구는 6월 7일 “현 국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아무 조건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또한 7월 1일에는 “대한민국의 국호나 법통도 반조각 정부로서는 계승할 근거가 없다.”며 남북통일정부를 주장했다.
    반면에 양 김 씨와 함께 북한을 다녀온 조소앙은 7월 10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해서 독립운동의 정맥을 계승하게 한 것은 당연하게 생각한다.“며 법통승계문제에 긍정적이었다. 공산당이 아닌 임정요인의 대부분도 각자의 시국판단에 따라 5·10선거를 국권회복을 위한 바른 길이라 보고, 국내의 민족진영과 함께 정부수립에 협력하고 있었으나 김구만은 끝내 반대한 것이다.

    김구의 패배주의
    김구의 완강한 태도에 1948년 7월 11일 중국 공사 유어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지지하기 바란다는 장개석 총통의 뜻을 전하기 위해 김구와 단 둘만의 비밀회동을 했다. 이 회동에서 김구는 “내가 요인회담에 갔던 동기의 하나는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보려고 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간 조선인 붉은 군대의 확장을 중지한다고 해도 남한이 전력을 다해서 붉은 군대의 현재 병력만한 군대를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러시아인들은 책잡힐 일 없이 쉽게 남쪽에 급습을 할 것이며 당장 남한에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이다.“라는 폭탄발언을 했다.
    김구는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어도 소련에 의해 곧 인민공화국이 될 터이니 대한민국을 건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피력한 셈이다. 다시 말해 김구의 통일정부 수립 주장은, 군사력이 우월한 북한의 인민공화국에 남한이 편입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국민을 기만한 것이다.

    대한민국 유엔승인 반대운동 펼친 김구
    김구와 김규식은 5·10선거 무효화 운동을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 48년 6월 7일, 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등의 동조세력을 통합하여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을 앞둔 8월 11일, 이승만은 장면, 장기영, 김활란등을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승인 운동을 펼칠 한국대표단으로 파견했다.
    이보다 앞선 8월 1일, 통일독립촉성회는 부주석 김규식을 수석대표로 하는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할 대표단을 선정했다. 분단정권을 승인하지 말고, 상해 임시정부를 승인해 주도록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서영해는 선발대로 파리에 가 있었다. 그러나 김규식이 수석대표직 수락을 거부하는 등 통촉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정부수립 선포식이 있던 8월 15일에도 김구는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결심과 용기를 가지고 강력한 통일운동을 추진해야 되겠다.”라고 말했다.

    김구와 국회프락치 사건
    1949년 5월,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 15명의 소장파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건이 이른바 ‘국회 프락치사건’이다. 친북좌익세력과 김구추종세력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 친일세력이 이승만과 합작으로 반민특위 와해를 위해 펼친 방해공작이 ‘국회 프락치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친북좌익세력과 김구 추종세력의 주장에 의하면, 구속된 국회의원들은 김구와 뜻을 같이 하던 反이승만 계열 의원들로, 반민특위법 시행 강경론자라고 한다. 의원들의 구속 사유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내용 또한 남로당의 지시를 따른 행위라고 하나 실증할 만한 근거자료가 하나도 없으며, 단지 ‘외국군 철수’와 ‘평화통일’ 그리고 남로당 7원칙과 일치한다는 이유를 들어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주장을 폈다.
    그런데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로동신문’에는 성시백이 1948년 가을부터 국회를 대상으로 공작을 펼쳤으며, 그 결과 국회부의장과 수십 명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는 내용과, 성시백이 그들을 이용해 ‘외군철회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하게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북한은 그동안 ‘국회프락치사건’의 실체를 철저하게 부인해 왔다. 그러나  ‘로동신문’과 2002년 북한의 대남선전매체인 통일여명 편집국 특집보도(181호)에서 이를 스스로 인정했다. 
    성시백이 국회의원 포섭공작을 벌였다는 북한 ‘로동신문’ 기술 내용과, 신경완의 증언 내용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통일정부를 주장하며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고 방해했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미화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김구가 호언장담했던, 미군이 철수해도 공산군이 남침하지 않는다는 북한의 약속은 여지없이 깨어졌다. 아마도 김구 생전에 6·25사변이 발발했더라면 결코 오늘날과 같은 ‘백범 추앙’은 불가능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김구는 해방전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독립운동가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