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나라위해 그렇게 용감히 싸우다가 적탄을 맞고 산화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장병중에서 6·25 한국전쟁 초기에 전사한 한도선 중위와 손종구 소위, 이한직 상사, 그리고 7월에 제1중대에 부임하여 용전분투하다가 신령화산전투에서 전사한 내 부하 소대장 도진환(都鎭煥) 소위 등은 용전분투와 희생에 걸맞은 훈장조차 받지 못한채 오늘에 이르렀다.

  • ▲ 이대용 장군 ⓒ 뉴데일리
    ▲ 이대용 장군 ⓒ 뉴데일리

    대한민국에 태극, 을지, 충무, 화랑 등의 무공훈장 제도가 생긴 것은 1950년 10월 28일로 한국전쟁 발발 4개월 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 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전사한 장병들은 받으래야 받을 훈장 자체가 없었다. 또 일선 장병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일념일 뿐, 훈장같은 것은 꿈속에 조차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제대로 된 국가라면, 나라위해 용전분투 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한 지고지순의 애국용사들에게 알맞은 훈장을 추서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국방부 상훈 담당부서에서는 이들 애국장병들에 대한 훈장 추서를 하지 않은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나는 10년 전 6.25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이하여 이들 몇명의 나의 옛 소대장 등에 대한 포상 누락 사실과 공적 사실을 상세히 적어서 그들에 대한 훈장 수여 상신을 육군본부 상훈당국과 국방부 측에 정식으로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당시 김대중 정권은 괴변을 부리며 이를 묵살했다. 묵살 이유는 6.25 한국전쟁 유공자에 대한 포상은 그때 충분히 했으며, 휴전후인 1953년 7월부터 1년간 포상누락자의 훈장추가 포상을 실시하여 누락자들에게도 훈장을 추서한 일이 있었고, 또 50년 전의 일을 이제와서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면서 거절한 것이었다.

    나는 1953년 7월부터 1년간 포상 누락자들에 대한 훈장추서 기간이 있었다는 사실도 금시초문이었고, 또 50년 전의 일을 이제와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변명도 성립되지 않는다고 단정한다. 전투 유공자에 대한 훈장 수여는 그 공적 사실 여부가 관건이지 훈장수여 시기가 늦고 빠른 것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2000년 6월에 보훈 선진국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제2차세계대전때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행정 실수로 훈장을 못 받고 있던 11명의 미국 사병에 대한 전공 사실이 58년만에 새로이 입증되자 이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2001년 3월 13일에는 51년전 미 육군 제24보병사단 말단 소총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경주 북방지구 전투에서 적탄 4발을 맞은 로버트 필립(76세)의 용감한 전공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자, 미국정부는 은성무공훈장을 그에게 수여했다. 우리 국방부가 배워야 할 선진국의 상훈 기본정책이다.

    다시 화제는 6.25날 춘천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중대선임하사관과 제4소대장대리 직책을 겸하고 있는 이한직 상사에게 외출자들과 외박자들이 영내로 돌아오는 대로 전선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때까지는 중대선임하사관 직무를 수행하되 저녁식사때가 되면 그 자리를 김지용 일등중사에게 인계하고, 제일선으로 나와서 제4소대장대리직만 맡으라고 했다. 김지용 일등중사는 외박중이었으나 곧 영내로 돌아올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대대장 김용배 소령에게 제1중대는 출동준비가 끝났다고 보고했다. 대대장은 제1중대의 출발 명령을 내렸다. 군용트럭 4대에 중대병력을 태우고, 우두산 북쪽 164고지로부터 북방으로 뻗은 능선의 고지군 일대에 준비된 제1대대 방어진지의 제일 북방 머리 부분이 제1중대 방어진지였다. 이 진지를 향하여 제1중대는 군용트럭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때가 오전 9시 30분경이었다. 군인들을 가득 실은 군용 트럭이 달리는 소양로연도에는 춘천시민 남녀노소가 자진하여 줄줄이 나와 ‘대한민국 만세!’, ‘국군 만세!’, ‘7연대 만세!’를 연호하면서 군인들을 격려했다. 이것이 1950년 6월 25일 제7연대 예비대의 출동 모습이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38선 초기전투, 한국전쟁 전투사에는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춘천 및 홍천에서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한 제6사단은 …(중략)…국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시 말해서 전쟁 초기국군 8개사단 중에서 적에게 승리한 부대는 오직 제6사단 뿐이었다. 북괴군 제2군단장 소장 김광협(金光俠)은 개전 직전까지 북괴군 총사령부 작전국장(1948.9.9~1950.6.11)이었다. 그는 남침작전계획 수립에 있어서, 주공(主攻)인 제1군단이 서울을 점령하면 조공(助攻)인 제2군단이 춘천-이천-수원으로 우회 기동하여 국군을 그 이북에서 섬멸케 하는 계획수립의 당사자이기도 했다.

    국군 제6사단은 이와같은 북괴곤의 공격계획을 좌절시킴으로서 유엔군이 증원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하였으며, 아울러 부산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니, 제6사단의 춘천-홍천전투야 말로 만고에 빛날 승리의 금자탑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6·25 남침계획은 독·소전(獨蘇戰)에 참전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소련군 사고문들이 러시아어로 작성했고, 북한공산군 총사령관부 작전국장 김광협 소장이 관여했다. 이 남침계획의 명칭을 ‘선제타격계획’이라고 붙이고, 은밀하게 각 사단을 38선 일대에 이동시켰다. 각 사단들은 예하부대들에 1950년 6월 22일, ‘6·25 남침전투명령 제1호’를 하달하였다.

    북한 공산군의 작전개념은 이랬다. 우선 제1군단이 개성-동두천-포천일대에서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제2군단은 춘천-내평-신남일대에서 38선을 돌파하여 춘천을 삽시간에 점령한다. 그런다음 우회(迂廻) 기동하여 이천-용인-수원선으로 진격하여 북쪽을 향하여 그물망 배치를 하고 기다리다가, 한강을 건너 남하하는 국국 패잔병들을 포착 섬멸시켜 한반도 적화통일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국군에 비해서 압도적인 화력과 기동력과 병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탱크 242대, 곡사포 552문, 대전차포 550문, 박격포 1천728문, 장갑차 54대, 전투기 및 전투폭격기 211대에다 소총, 기관총들을 충분히 원조 받았다. 그런 뒤 모든 화기나 군사장비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훈련을 실시했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소련군적 및 중공군적을 가진 조선족 장병들을 끌어들여 북한 공산군 전력을 강화시켰으며, 각급 부대들은 야전기동 훈련까지 모두 끝냈다. 이리하여 북한공산군은 화력과 기동력에 있어 우리 국군의 약5배, 그리고 지상군 병력수에 있어서도 북한공산군이 19만 1천 680명, 우리국군은 9만 6천 140명으로 북측이 우세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은 38선전 전선에 걸쳐 기습 남침 총공세를 감행했다. 이때 춘천에 있는 국군 제6사단 제7연대는 제16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약 40km의 넓은 정면의 38선을 따라 좌측 정면에는 제3대대가, 우측 정면에는 제2대대가 배치되어 38선 경비임무를 수행했다. 제1대대는 연대 예비대로 춘천시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춘천전투에 투입된 북한공산군 병력은 제2군단 예하 제2사단 전 병력과 제7사단 일부 병력으로, 우리국군 제7연대와 제16포병대대 병력을 합친것 보다 약 4배나 되는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이었다.

    북한공산군 총사령부 작전국장이었던 김광협 소장은 1950년 6월11일 제2군단장에 보직되었다. 그는 화천-춘천가도인 5번 도로변의 지촌리에 군단 전방지휘소를 전진시키고 춘천지구 전투를 총지휘하고 있었다. 북한공산군 제2사단 주력은 38선 상모진교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우리국군 제7연대 제9중대를 격파하고 신속히 남으로 진격해 내려왔다. 국군 제7연대 제9중대는 용전분투했으나 중대장 이래흥 중위는 전사하고, 중대는 약 60%의 인원 손실을 입은채 잔여병력은 산을 넘어 춘천시로 철수했다.

    1950년 6월 25일 오전10시경에 북한공산군 제2사단 선두부대는 춘천시에서 약3km 북방에있는 한계울까지 진격해왔다. 이 전진속도로 계속 남진한다면, 이날 점심때에는 춘천시 한복판에 진출하게 된다. 상황은 매우 급박했다. 춘천시내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7연대 제1대대는 일요일 외출 및 외박을 나간 사병들을 긴급 소집하는 비상을 걸어, 이들을 영내로 불러들여 출동 준비를 하고 탄약을 분배했다. 그런 다음 군용트럭에 승차하여 우두산 북방에 있는 능선일대에 미리 구축해 놓은 제1대대 방어진지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이때 5번도로 축선의 북한공산군 제2사단대부대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있는 아군부대는 놀랍게도 보병부대가 아닌 포병부대였다.

    김성 소령이 지휘하는 제16포병대대는 우두동일대에 포진하여 아직 국군 제7연대 제1대대가 방어진지에 진입하기 전에 역골, 아리산, 한계울, 삼거리에 진출한 적군대부대에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었다. 앞에서 포병부대를 보호해주는 보병부대가 거의 없는 상태인데도 개의치않고, 적군 보병대부대와 1대1로 대결하면서 용감무쌍하게 결사적으로 항전하고 있는 제16포병대대의 당당한 모습, 그것은 군용트럭을 타고 그 곁을 지나가는 국군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사기진작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제16포병대대의 맹활약으로 5번도로를 따라 내려오던 적군 제2사단의 전진속도가 거북이걸음으로 느리게 바뀌었다. 이날의 포병의 용전분투는 너무도 훌륭했다.

    국군 제7연대 제1대대는 우두동에 포진한 제16포병대대를 지나서 북동쪽으로 가 준비된 방어진지에 6월 25일 오전 10시 30분경에 완전 진입, 북에서 내려오는 적군과 교전상태에 들어갔다. 이 제1대대의 방어진지는 5번 도로에서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져 있으며, 5번도로와거의평행선을 이루면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능선상에 있었다. 이 방어진지는 만일의 긴급사태에 대비하여 춘천방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1950년 봄에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과 춘천 각 고등학교 남녀학생들이 땀흘리며 함께 공사해서 완성시킨 대대방어진지였다. 제1대대는 이 진지에 진입하여 방어임무를 수행하는 훈련을 이미 몇차례 해놓은 상태였다. 이렇듯 제7연대 장병들과 춘천 시민들은 춘천방어에 일체감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있었다.

    국군 제7연대 제1대대는 정면에서 오는 적군을 격퇴시키고, 서쪽 5번도로 축선을 따라 춘천방향으로 진격하는 적군에 대해서는 기관총 원거리 사격이나 박격포 사격을 측방에서 하여 그들의 전진을 방해했다. 이렇게 방어진지 고수에 성공한 상황에서 6월 25일이 가고 26일 아침이 밝았다.

    북한공산군 제2사단 주력은 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상당한 인원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워낙 수적으로 우세하여 느림보 전진이지만 6월 26일 오전10시경에는 한계울 남방2km 지점에 있는 옥산포를 완전 장악한 뒤 그곳으로부터 남쪽으로 좀 더 전진해 있었고, 곧 춘천시로 돌입할 수 있는 전개로 들어간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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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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