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곪아터진 쇼트트랙…쇠뿔도 단김에 빼야

    쇼트트랙 안현수 선수 측의 문제 제기 이후 불거진 '쇼트트랙 파벌 문제'가 시간이 흐를수록 진정은 커녕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어 우려를 사고 있다.

    안현수의 아버지 안기원씨는 벤쿠버 동계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대회가 모두 끝난 지난달 24일 안현수의 팬카페 '쇼트트랙의 디 온리 히어로 안현수'에 글을 올려 "이정수가 2010 세계쇼트트랙선수권대회 개인전 출전을 포기한 것은 대한빙상연맹의 '부조리' 때문"이라며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코치진과 빙상연맹이 출전을 다른 선수에게 양보하게 했다"고 폭로했다.

  • ▲ 안현수 팬페이지에 게재된 '이정수 사건' 폭로 글.  ⓒ 뉴데일리
    ▲ 안현수 팬페이지에 게재된 '이정수 사건' 폭로 글.  ⓒ 뉴데일리

    이같은 안씨의 글은 빙상계에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고 급기야 대한체육회는 이정수의 쇼트트랙 세계선수권 개인전 불출전 사유에 대한 감사를 전격 실시, "당시 코칭스태프의 강압적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한체육회는 감사 결과를 토대로 "지난해 4월 열린 2009-2010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 선발전 마지막 경기였던 3000m 경기 직전 코치와 선수들이 모인 가운데 선수들이 랭킹 5위 안에 들어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고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획득할 수 있도록 담합을 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지난 8일 밝혔다.

    이는 국가대표 선발을 위해 코치 및 선수들이 '승부조작'을 벌였다는 사실을 대한체육회가 공식 인정한 것으로, 스포츠 정신을 망각한 한국 빙상계의 어두운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 계기가 됐다.

    대한체육회 감사 불구 '논란' 가중

    그러나 대한체육회의 감사에도 불구, 파문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정수는 13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탄천종합운동장 빙상장에서 아버지 이도원씨와 함께 기자회견을 자청,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에도 전재목 코치가 1000m 종목을 곽윤기에게 양보하라는 얘기를 했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공개했다.

    이정수는 "동계올림픽 당시 전재목 코치가 김성일(단국대), 곽윤기(연세대), 그리고 나를 불러다 놓고 (나에게)1000m 출전을 곽윤기에게 양보할 것을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명목상 이유로 지난해 대표 선발전에서 곽윤기가 도와주었으니 이번에는 자신이(이정수) 양보할 차례라는 논리를 내세웠다는 것. 더욱이 "만약 1000m를 타면 세계선수권대회를 포기하라는 협박성 발언까지 했다"고 이정수는 덧붙였다.

    "하지만 김기훈 코치가 '개인전 성적대로 출전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기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전 코치를 막아 해당 경기 출전이 가능했다"고 이정수는 밝혔다.

    특히 이정수는 지난해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 마지막 경기에서 선수들과 담합을 했다는 대한체육회의 발표에 대해서도 "당시 선수간 협의했던 사실이 없으며 만일 코치가 그런 말을(담합지시) 하더라도 이를 수용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반박했다.

    이날 기자회견 자리에 동석한 아버지 이도원씨는 "빙상연맹에서 발표한 진상조사위원회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김철수 위원장이 전재목 코치와 동향(대구)이고 간사 역시 빙상연맹 집행부"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조사를 받아야 할 주체가 조사한다는 것 자체가 공정성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 구성원의 중립성 문제를 들고 나섰다.

    이정수 "선수간 짬짜미 없었다"

  • ▲ 이정수가 미니홈피에 올린 글.  ⓒ 뉴데일리
    ▲ 이정수가 미니홈피에 올린 글.  ⓒ 뉴데일리

    결론적으로 이정수와 아버지 이도원씨는 코치진의 강요로 인해 동계올림픽 및 세계선수권 대회 출전에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이정수 본인은 '짬짜미'라 불리는 경기 담합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폈다. 즉, 대한체육회의 감사 결과를 놓고 코칭스태프의 '강압적 지시' 사실은 인정하되 지난해 4월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 경기에서의 담합설에 대해선 "당시 선수간 협의했던 사실이 없었다"며 철저히 부인하는 태도를 보인 것.

    이정수 측의 폭로와 대한체육회의 감사 결과는 이정수 대신 세계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던 곽윤기의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곽윤기는 지난달  22일(한국시간) 새벽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막을 내린 2010 세계빙상경기연맹(ISU) 세계쇼트트랙선수권대회에 출전, 1500m와 5000m 계주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1000m와 3000m 슈퍼파이널에서 은메달 따내면서 남자 대표팀의 차세대 주자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애당초 출전 자격에 문제가 있었다는 비판이 이어지면서 대한빙상경기연맹에 가해지던 비난의 화살이 곽윤기에게로 집중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쇼트트랙의 영웅이 졸지에 양심을 잃어버린 타락한 스포츠스타로 전락하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이다.

    궁지에 몰린 곽윤기도 결국 '묵묵부답'에서 탈피,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곽윤기 "이정수가 전 코치 찾아와 '도와달라' 부탁"

  • ▲ 이정수 선수
    ▲ 이정수 선수

    14일 한 스포츠지와 인터뷰에 나선 곽윤기는 "지난해 4월 국가대표 선발전 1000m 준결승을 앞두고 이정수가 전재목 코치를 찾아와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면서 "당시 전 코치가 나에게 '정수를 도와주라'고 말해 (담합을)흔쾌히 수락했다"고 밝혔다.

    즉, 짬짜미에 관여하지 않았던 이정수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오히려 이정수 스스로 전 코치를 찾아 국가대표 선발을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 지난해 4월 열린 2009-2010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 선발전 마지막 경기에서 코치와 선수들이 담합을 했다는 대한체육회의 감사 결과와 맥을 같이하는 동시에, 동계올림픽 당시 전재목 코치가 '지난해 대표 선발전에서 곽윤기가 도와주었으니 이번에는 이정수가 양보할 차례'라는 논리를 내세워 1000m 출전을 곽윤기에게 양보할 것을 이정수에게 요구하게 된 실질적인 배경이 된다는 설명이다.

    곽윤기는 "밴쿠버 올림픽 때 정수가 약속을 안 지켰다"면서 "솔직히 내가 올림픽 개인전 전 종목을 타게 될 줄 알았는데 정수가 올림픽 1000m를 앞두고 자신이 타겠다고 해서 좀 황당했다"고 밝혔다.

    "약속을 안 지켰다", "황당했다"는 말로 미루어보아 곽윤기가 '짬짜미'에 동의 혹은 동참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점은 이같은 행동에 대해 선수 본인이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곽윤기는 '선수간 경기담합'이니 '외압' 같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이정수 역시 자신처럼 선수간 담합에 참여했다는 사실만 강조했다.

    더욱이 곽윤기의 '폭탄발언'으로 발끈한 이정수 측이 고소·고발도 불사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이번 사태가 자칫 사법기관이 개입하는 형사사건으로 번질 가능성마저 내비치고 있다.

  • ▲ 곽윤기-이정수 선수가 선보이는 시건방 춤.  ⓒ 뉴데일리
    ▲ 곽윤기-이정수 선수가 선보이는 시건방 춤.  ⓒ 뉴데일리

    이정수의 아버지 이도원씨는 진상조사위가 중립적이지 못한 인사들로 구성돼 관련 조사에 응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힌 뒤 진실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서 검찰 고소까지도 고려 중이라고 14일 밝혔다.

    이씨는 "곽윤기의 반박 인터뷰를 접하고 수사기관에 이번 사건을 의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피고소인 대상에 대해선 함구했다.

    '진흙탕 싸움'에 연세대 선배 성시백 가세

    이후 며칠동안 잠잠했던 '쇼트트랙 사태'는 성시백이 곽윤기를 옹호하는 동영상을 게재, 다시금 논란에 불을 붙였다.

    성시백은 18일 자신의 미니홈피에 '이정수는 과연 1000m 준결승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았나?'라는 제하의 동영상과 글을 게재, 지난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동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이정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성시백은 "마지막 1000m 결승선에 들어오기 직전에 영상을 자세히 보면 마지막 바퀴에서 휘청하면서 넘어지려는 이정수를 받쳐주는 곽윤기의 손을 볼 수 있다"면서 "만약 곽윤기가 이정수를 도와주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절호의 기회에 (앞으로)치고 나가지 않을리가 없다"고 설명했다.

    성시백은 "곽윤기는 이정수를 밀어주다 그 힘에 자신이 뒤로 밀리게 됐고 결국은 넘어졌다"면서 "이 새로운 영상으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 ▲ 비난의 화살을 한몸에 받고 있는 곽윤기 선수
    ▲ 비난의 화살을 한몸에 받고 있는 곽윤기 선수

    실제로 해당 동영상에는 동영상에는 이정수가 마지막 코너를 돌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뒤따르던 곽윤기가 오른손으로 이정수의 엉덩이를 받쳐주는 듯한 장면이 나온다.

    공교롭게도 성시백과 곽윤기는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라는 점 외에도 연세대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반면 곽윤기와 89년생 동갑내기인 이정수는 단국대학고 출신이다.

    결과적으로 성시백의 동영상 공개로 이정수 사태는 대단히 복잡한 구도를 띠게 됐다.

    사건 초반 이정수의 출전 포기를 강요한 외압이 있었는지 여부를 캐내는데 관심이 집중됐다면 이제는 이정수를 포함, 선수들간 담합이 있었는지 혹은 이정수의 주장대로 선수들끼리의 짬짜미는 없었는지를 가리는 데 초점이 맞춰지게 됐다.

    현재 이정수와 곽윤기·코치진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정수는 외압은 있었지만 선수들의 참여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곽윤기나 전 코치 등은 사실상 선수 선발 과정에 나눠먹기식 담합이 있었음을 시인한 상태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담합을 이정수 혼자 깨뜨렸다는 주장이다.

    진실게임? 쇠뿔도 단김에 빼야…

  • ▲ 곽윤기 선수의 오른손이 휘청이는 이정수 선수의 엉덩이에 닿은 동영상 캡처.  ⓒ 뉴데일리
    ▲ 곽윤기 선수의 오른손이 휘청이는 이정수 선수의 엉덩이에 닿은 동영상 캡처.  ⓒ 뉴데일리

    '외압' 여부 역시 중요한 쟁점 중 하나다. 이정수 측은 국가대표 선수 선발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일개 코치로선 불가능하며 반드시 윗선, 즉 빙상연맹의 개입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와 관련 안현수의 아버지 안기원씨는 "대한빙상경기연맹의 파벌은 2008년에 두 부회장이 들어오면서 어느 정도 종식이 됐다고는 하지만 이 두 분이 모든 것을 힘을 가지고 코치도 마음대로 선임한다"고 밝히며 여전히 선수 선발에 윗선의 입김이 개입되고 있음을 폭로한 바 있다.

    당초 이정수의 출전 논란이 제기될 때만 해도 빙상연맹은 "이정수가 세계선수권 개인종목 출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이정수가 제출한 사유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외압 논란을 일축시켰다.

    그러나 관련 추가 의혹들이 속속 공개되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대한체육회 감사실은 쇼트트랙 국가대표팀이 귀국한 지난달 30일부터 빙상연맹에 대한 감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체육회의 감사 결과에도 잡음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정수, 곽윤기의 잇단 돌출 발언과 성시백의 동영상까지 공개되며 한때 절친한 동료였던 국가대표 선수들끼리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감정싸움으로 번지는 형국이다.

    '과연 누가 거짓말을 했느냐'는 진실게임으로 번진 이상, 이번 사태를 간과한다면 한국 빙상계의 고질적인 문제는 영원히 치유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자체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면 사법기관의 동원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게 빙상계 일부의 시각이다.

    최근까지의 발언 내역을 종합해보면 이정수 측의 고소는 시간문제로 보이며 피고소인이 될 확률이 높은 빙상연맹 측의 맞대응 역시 예상되는 수순이다. 국민들에게 벅찬 기쁨과 감동을 안겨줬던 한국 쇼트트랙이 더 나은 발전을 위해 겪어야 할 진통이라면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을 속히 적용해야 할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