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의 재평가

이영훈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09.09.04 23:53:10

1950년대의 암울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무 잎은 떨어지고
나무 잎은 흙이 되고 나무 잎은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1956년에 나온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입니다.
좀 나이 든 한국인이라면 대개 젊은 날의 애틋한 사랑의 추억과 함께 이 시를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시인은 50년대의 허무와 죽음을 사라진 옛사랑의 추억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명동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 즉흥으로 지은 이 시를 동석한 시인의 친구가 음악으로 옮겼습니다.
그 뒤로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노래로 번져 나갔습니다.


▲ 1950년대의 해방촌. ⓒ 뉴데일리

50년대의 황폐와 방황을 그린 대표적인 소설로서는 흔히들 이범선의 《오발탄》을 꼽습니다.
계리사 사무실 서기인 송철호 가족은 월남민입니다. 서울 남산 밑 해방촌의 판잣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돌아온 철호에게 전쟁 통에 정신이 이상해진 어머니는 자꾸만 “가자 가자”하면서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채근합니다.
동생 영호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고 입대했다가 상이군인으로 돌아와 결국 권총강도를 저지릅니다.
여동생 명숙은 양공주가 되어 밤마다 늦게 돌아옵니다만, 몸을 판 돈으로 올케의 병원비를 내놓습니다.
아내는 아름다운 미모의 음악도 출신이지만 가난한 살림에 찌들려 고생만 하다가 병원에서 출산 도중에 사망합니다. 철호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습니다.
극도의 혼란에 빠진 철호는 택시를 탑니다. 하지만, 어디로 갈지 몰라 해방촌으로, 경찰서로, 병원으로 헛소리만 합니다. 전쟁이 할퀴고 간 50년대의 참담한 현실에서 삶의 지표를 잃은 인간들의 몸부림을 《오발탄》은 그렇게 애달프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50년대는 참으로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제 기억에 남아 있는 50년대도 그러했습니다. 조그만 시골 군청 소재지에 있는 것이라곤 장터, 정육점, 신발가게, 약국, 일본인이 남기고 간 높은 굴뚝의 정미소, 아이스케키 공장, 제재소뿐이었습니다.
가끔 어디선가 목재를 가득 실은 트럭이 제재소에 들어오는 날이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낫을 들고 나무껍질을 벗기러 모여 들곤 했습니다. 그것으로 죽을 끓여 먹는다지요. 4~5월 보릿고개에는 이웃집 아저씨의 얼굴이 황달에 걸린 것처럼 누렇게 변했습니다.
가끔 쥐약을 먹고 자살한 사람의 벌거벗은 시체가 리어카에 실려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그 길을 따라 하루에 몇 차례 완행버스가 지나가면서 흙먼지를 뿌려 온 동네가 회색빛이었습니다.
사방의 산들도 참담하게 헐벗어 있었습니다.

절대 가난의 역사적 업보

50년대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이 이토록 암울한 것은 60년대 이후와의 도드라진 대비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60년대 이후의 고도 경제성장이 거둔 화려한 실적에 비하자면 50년대의 성적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국근대화’의 구호가 거창하게 내걸린 가운데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였던 60년대에 비하자면 50년대는 무기력하게 내버려진 시대와도 같았습니다.
50년대가 암울하게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정치와 사회의 부정부패 때문일 겁니다.
늙은 이승만 정부는 부정선거를 획책하다가 결국 국민의 심판을 받아 쫓겨났습니다.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하였는지, 당시를 증언하는 기록을 읽으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정원 한 겨울의 일입니다.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의 병사 9만 명이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사령관 이하 고급장교들이 군수물자를 횡령했기 때문입니다.
어디 군대에서만 그러했습니까. 한 나라의 경제순환이 온통 부정부패였다고 말해도 좋을 지경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원조자금의 일부는 정부에서 기업으로, 기업에서 자유당으로 흐르는 특혜와 정치자금이었습니다. 기업은 그런 부정한 먹이사슬 속에서만 기업으로 클 수 있었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재인식》에 실린 우정은 교수의 <비합리성 이면의 합리성을 찾아서ㅡ이승만시대 수입대체산업화의 정치경제학>이란 논문이 좋은 참고거리인데, 이 논문에 관해선 다음 장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의 부정부패에 관해 역사가로서 저의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절대 가난으로 빚어진 우리의 문화이기도 했습니다.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없는, 모두가 시대의 공범인, 그러한 역사의 업보였습니다.
자세하게 예를 들 겨를이 없습니다만, 19세기까지 조선왕조의 시대가 그러하였습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는 양반관료들이 백성을 밭으로 갈아 먹는다고 했습니다. 권세를 이용해서 백성의 재산을 갈취한다는 뜻이지요. 제5장에서 썼습니다만, 조선의 양반관료들은 ‘면허 받은 흡혈귀’였습니다.
일정 때는 관기가 엄격하여 이런 일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만, 해방 후에는 버릇처럼 되살아났습니다. 1939년부터 논산군에서 공직생활을 출발한 어느 분의 회고에 의하면 일정때는 상급자가 바뀌면 사무실 책상에다 사이다와 과자를 벌여 놓고 환영회나 송별회를 가졌는데, 해방후가 되니 장소가 기생집으로 바뀌더랍니다. 기생집에 갈 돈이 어디서 나옵니까.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겪어온 삶의 주변이 온통 그러하였습니다.
저는 자랑스럽게도 1970년대 초반에 육군의 병졸로서 휴전선 근방에서 근무했습니다. 쇠고기나 닭고기 등, 육류는 그야말로 구경하기 힘들었고 그것들이 헤엄쳐 간 국물만 마셨습니다. 장교들만 해먹은 것이 아니지요. 하사관 심지어 내무반의 고참 사병까지 취사병에 강요하여 졸병들이 먹을 고기를 빼돌렸습니다. 그렇게 위에서부터 조금씩 빼돌리니 말단 졸병들이 고기 한 점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어느 날 사단 사령부에 들렀다가 연대 본부로 돌아오는데 같은 방향의 트럭이 지나가기에 올라탔습니다. 연대로 쌀을 싣고 오는 수송트럭이었습니다. 어느 고개에 이르자 타고 있던 군수계의 병장이 쌀가마니 하나를 발로 차 밖으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민간인 몇 명이 튀어 나와 집안으로 날랐습니다. 다른 사람이 옆에서 뻔히 보고 있는데도 일개 병졸이 태연히 그런 짓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오래 된, 아마도 창군 이래로 물려받은 버릇이었을 겁니다.
개인적인 경험담으로 치우쳐 미안합니다. 우리의 역사에서 부정부패란 것은 50년대만의 일도 아니고, 위정자의 책임만도 아니고, 일종의 문화로서 오로지 경제성장만으로 치유될 수 있는 역사의 업보였음을 강조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관점을 바꾸어 놓고 보면, 50년대는 부정부패가 심각한 시대이긴 했습니다만, 부패하지 않은 구석도 있었고, 그러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성취가 있었던 시대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50년대라 하지만 실은 1953년의 휴전 이후를 따지면 6년의 짧은 세월에 불과하지요. 그렇게 짧았습니다만 그 시대를 전제하기 않고서는 60년대 이후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적지 않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그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교육혁명

우선 《재인식》에 실린 유영익 교수의 논문, <거시적으로 본 1950년대의 역사ㅡ남한의 변화를 중심으로>를 소개하겠습니다.
유영익에 의하면 50년대는 역사상 최초로 공화제 민주주의가 시도되고 나름대로 뿌리를 내린 시기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독재에도 대의민주주의의 기틀이 무너진 적은 없습니다. 예정된 선거는 반드시 치러야 했고, 집권당은 선거에서 이기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정선거가 생긴 것이지요. 건국 이후 1960년까지 대략 일곱 차례의 선거를 치르면서 보통선거제가 정착되어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국민의 정치의식이 발달해서 사실상 양당제를 정착시켜 가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 점에서 저는 50년대의 정치를 두고 오늘날의 역사교과서가 ‘민주주의의 시련’을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에는 이전 어느 시기에 민주주의가 활짝 꽃을 피운 적이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50년대는 민주주의의 ‘시련’이라기보다 민주주의를 위한 ‘진통’ 또는 ‘산고’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역사상 처음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의 비용을 지불하였다는 뜻에서 말입니다.
유영익 교수에 의하면 50년대가 거둔 가장 볼 만한 성취는 교육에서였습니다.
가히 ‘교육기적’ 또는 ‘교육혁명’이라고 부를만큼 교육에 대한 국민적 수요가 폭발했던 시기가 50년대였습니다. 의무교육이 시행되고 각급 학교와 학생 수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1945~1960년에 걸쳐 초등학생이 163만에서 359만으로, 중·고등학생이 13만에서 78만으로, 대학생이 7,800에서 9만 8,000으로 증가했습니다. 여대생의 수는 1945년에 불과 1,086이었습니다만, 1960년까지 1만 7,000으로 늘었습니다.
대학생의 수가 크게 늘자 대학망국론이라 하여 그 사회적 폐단을 걱정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당시 한국인의 일반적 인식에서 인간의 사회적 성공과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학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대학에 가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것이지요. 가난한 농민이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은 너무나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가리켜 우골탑(牛骨塔)이라 하는 이상한 말까지 생겨났지요. 그런데 자식을 공부시키려고 농가에 없어서 안 될 소를 파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민족이 이 지구상에 달리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했기 때문에 60년대 이후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했던 우수한 ‘사회적 능력’이 사회에 가득 축적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많은 수의 학생과 관료와 군인이 해외 유학과 연수의 길을 떠났습니다.
1953~1966년에 7,400명의 학생이 외국 유학을 떠났고, 50년대에 걸쳐 2,400명의 공무원이 국외로 단기훈련이나 시찰을 다녀왔으며, 50년대에 걸쳐 9,000명 이상의 장교가 외국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다녀온 국가는 주로 미국이었습니다. 대학의 교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나 할 것이 없이 기회를 찾아 외국 연수를 떠나는 통에 물리학회의 경우 회장단이 모두 국내에 부재하여 정기총회를 열 형편이 못 되었다고 합니다.
유영익 교수의 논문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이러한 50년대의 성취를 19세기말부터 시작된 문명개화라는 장기추세의 한 국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화기의 개화파 인사들은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에 별 욕심이 없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에 대한 중국, 일본, 러시아의 욕심을 제어하면서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고종황제의 무능과 무책으로 실천에 옮겨진 적은 없습니다만, 그러한 연미(聯美) 방식의 근대화 노선은 식민지기의 독립운동과 근대화 과정을 거쳐 해방 후에 이르러서는 미국으로 향하는 유학과 연수의 긴 행렬로 계승되었다는 겁니다.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저는 유영익의 이러한 문명사적 시각을 존중합니다.
몇 번이고 강조했습니다만, 지난 130년간의 한국 근·현대사는 개화기 이래 문명개화파와 그 후예들이 주도한 문명사의 대전환 과정이었습니다. 실은 저의 독창적인 발상이 아니고 사계의 원로이신 유영익 교수께서 오래전부터 해 오신 이야기를 제 나름으로 각색한 것일 뿐입니다.

마지막 소농사회

이상은 주로 50년대의 도시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1960년까지도 도시부의 인구비중은 전체 국민의 28%에 불과했습니다.
인구의 8할 가까운 다수가 살았던 농촌의 사정은 어떠했을까요.
이와 관련해서는 《재인식》에 실린 이만갑 교수의 <1950년대 한국 농촌의 사회구조>라는 논문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1958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의 이만갑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경기도 광주군과 용인군의 접경에 있는 여섯 마을의 사회, 경제, 문화 실태를 주민과의 면접 방식으로 세밀히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를 가지고 이만갑 교수는 1960년에 《한국농촌의 사회구조》라는 책을 출간합니다. 《재인식》에 실린 위의 논문은 이만갑 교수의 양해를 얻어 그 책의 일부를 저와 제 제자가 논문의 형태로 압축하고 간략히 해설을 붙인 것입니다.
그 여섯 마을은 오늘날의 성남시입니다.
전국 유수의 산업도시와 아파트단지의 하나인 그곳은 50년 전 이만갑 교수의 일행이 찾았을 때만 해도 순수 농촌사회였습니다.
저는 위 논문에 해설을 붙이면서 그곳에 살았던 18세기의 사람이 다시 살아나더라도 “조금 낯설긴 하지만 여전하군”이라고 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만, 아마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50년대의 농촌사회는 근대 국민국가에 포섭되어 있긴 하나, 전통사회의 원래 모습을 꽤 많이 남기고 있었습니다. 해방전후사를 재인식함에 있어서 해방, 분단, 건국, 전쟁으로 급박하게 돌아간 국가 수준의 역사가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느리게 움직이는 밑바닥의 흐름으로서 대다수 사람의 일상생활의 무대였던 농촌사회에 대한 전체적이며 구조적인 이해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함을 강조해 두고 싶습니다.


▲ 1950년대의 농촌 풍경. 장에 가는 길. ⓒ 뉴데일리

농촌 주민의 사회적 인간관계를 규정했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양반인가 상민인가라는 신분의식이었습니다. 마을의 상민들이 양반가의 장례에 상여를 메야 했던 것과 같은 전통사회의 신분억압과 차별은 오래전에 사라졌습니다만, 관습의 영역에서 신분의식은 여전히 살아 있는 규범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원 신분을 예민하게 의식하였습니다. 양반 출신은 상민 출신을 멸시하였으며, 두 출신이 우정으로 교류하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신분의식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결혼이었습니다. 결혼은 동일 신분 간의 중매를 통한 신분내혼(身分內婚)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마을마다 양반과 상민 신분의 구성은 달랐습니다. 양반마을과 상민마을은 그런대로 잘 단합된 질서를 보였습니다만, 양반과 상민이 비슷한 세력으로 대립한 마을에서는 골목의 쓰레기조차 치워지지 않을 만큼 자치질서가 취약했습니다.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는 신뢰관계는 친족이 기본이었습니다.
피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신뢰관계로서 사회단체는 그 종류가 많지 않았고 기능도 약했습니다. 농촌사회를 통합한 가장 중요한 힘은 친족이었고 그 다음이 마을이었습니다. 그 바깥으로 나가면 면 단위의 관료기구가 있었습니다만, 일정 시대에 비해 권위나 효율이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학교와 교회가 있었지만 농촌사회의 내부 질서로 정착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교사와 목사는 어디까지나 손님으로 머물렀을 뿐입니다.
경제활동과 관련하여 축산조합, 채소조합, 산림조합 등 여러 단체가 있었지만 농민들의 참여 의식은 약했습니다. 농촌주민들이 가장 많이 가입한 단체는 자유당이라는 지배 정당이었습니다. 면접의 대상이 된 336명 가운데 무려 66명이 자유당의 당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다수는 관료기구와 마을의 유력자에 의해 정치적으로 동원된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농촌사회를 통합한 가장 규정적인 질서는 친족과 마을과 관료제였습니다. 그 외에 인간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나 단체는 희박하였습니다. 친족과 마을을 벗어나면, 심지어는 마을 내부에서조차, 사람들은 대개 고독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긍정적인 조짐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의 사회적 성취와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돈과 명예와 재능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다 합해도 30%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교육에 따른 학력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58%나 되었습니다.
농민들은 농지개혁으로 그들의 삶이 개선되었음을 인정하지만, 농촌의 가난과 관료기구의 무관심과 무능력에는 강한 불만을 드러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마을의 엘리트에게 양반인가 상민인가의 신분의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농촌사회에는 새로운 협동질서가 창출되고 있었습니다.
60~70년대의 농촌사회가 과시한 개발과 협동의 능력이 전통사회의 끝자락에 놓였던 50년대의 농촌에서 이미 뚜렷한 조짐으로 성숙되고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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