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이영훈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09.06.30 14:52:57

갑작스런 해방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수많은 애국선열이 오랜 세월 붉은 마음으로 기다려 오던 해방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정인보 선생은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선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라고 하여 독립투쟁에 몸바쳐 먼저 가신 분들을 안타까워했지요. 해방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이태준의 소설 《해방전후》를 보면, 주인공 현은 이탈리아와 독일이 이미 망한데다 일본이 사이판을 잃고 오키나와에까지 적을 맞아들였다는 신문보도를 통해 일제의 패망이 길어야 1년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렇지만, 막상 8월 15일 그날의 해방은 모두에게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함석헌 선생은 성서의 표현을 인용하여 해방이 도적같이 갑자기 찾아왔다고 했지요. 국제정세에 누구보다 밝은 하와이의 이승만 박사도 일제가 패망한 소식을 듣고 넋이 빠진 듯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부인에게 “여보, 우리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어”라고 했다 합니다.


▲ 해방에 환호하는 사람들. ⓒ 뉴데일리

이태준의 체험이겠습니다만, 《해방전후》의 주인공 현도 그러하였습니다. 현은 8월 17일 경기도 철원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운전사로부터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전쟁이 끝났답니다.” “뭐요? 전쟁이?” “인제 끝이 났어요.” 현은 코허리가 찌르르해집니다. “옳구나! 올 것이 왔구나! 그 지루하던 것이….” 그러면서 버스 안의 좌우를 둘러봅니다. 확실히 일본 사람은 아닌 얼굴들인데 하나같이 다들 무심한 표정입니다. 답답해진 현이 소리칩니다. 일본이 망했다는데 왜들 그렇게 조용히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한 영감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세상이라고 똑똑히 모르는 걸 입을 놀리겠소.” 저는 이 대목에서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통의 민초들에겐 해방의 소식은 놀라움 그 자체이자 일종의 두려움이었던 모양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어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해방의 소식은 점점 민족의 환희로 삼천리강산에 울려 퍼졌습니다.
충북 중원군 동량면의 김인수라는 한 선비의 한문 일기를 소개하겠습니다(《致齋日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해방 일주일 뒤입니다. 마을 전통 잔치인 호미씻이[洗鋤]가 예정된 날이었습니다. 오랜 가뭄 끝에 소낙비가 내린 날이기도 했습니다. 마을의 남녀노소가 당나무 아래에 모였습니다. 모두 “대조선 독립만세”를 소리쳐 축하했습니다. 온종일 풍물과 술과 국수로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김선비의 일기는 당시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오호라 천운의 돌고 돎이여! 가서 돌아오지 않음이 없도다.” 역시 성리학자다운 표현이군요.

도움은 어디에서?

그런데 그 해방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어떤 힘이 작용하여 일제가 이 땅에서 물러가게 된 것입니까. 이 문제는 해방전후사의 올바른 인식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임에도 지금까지 한 번도 진지하게 논의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올바로 접근하려면 1931년부터 1945년까지 동아시아와 태평양을 무대로 전개된 전쟁의 역사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잘 아시는 대로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에 괴뢰국을 세웁니다. 1933년에는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화북 지방에 또 하나의 괴뢰정부를 세우지요. 1937년에는 드디어 남중국을 포함한 중국 전 연안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중국과 전면 전쟁을 벌입니다. 나아가 1941년 12월에는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미국을 상대로 한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 일련의 전쟁을 가리켜 일본사람들은 15년전쟁이라고도 합니다.
일제는 무엇 때문에 15년전쟁을 벌였을까요. 전쟁으로 대략 500만 명에 달하는 일본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일본이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끼친 피해는 그보다 몇 배나 크지요. 그런 엄청난 전대미문의 전쟁을 일본은 왜 벌였을까요. 1930년대 세계경제는 대공황의 깊은 늪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일본만은 순조로운 경제성장을 거듭하였습니다. 당시의 통계를 보면 일본경제의 성장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빨랐습니다. 저 아프리카 남단에 이르기까지 수출이 크게 증가하는 등, 일본경제의 대외의존도는 현저히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세계자본주의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는 미국과의 연관성이 심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제가 미국과 승산도 없는 전쟁을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젠가 일본의 어느 연구회에 참석하여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인 연구자끼리 맹렬하게 토론을 벌이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거기서의 결론도 아무튼 잘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속으로 “이 친구들아, 그래서 조선은 해방되었어”라고 딴전을 피웠습니다.
어쨌든 숨김없는 사실은 우리 민족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헤게모니를 두고 일본이 미국과 벌인 전쟁 덕분에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1945년 8월 8일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이해 말까지 대략 14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비극의 현장에 우리 조선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나가사키[長崎]에도 원자폭탄이 떨어졌지요. 그렇게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고 나서야 최후의 1인까지 본토를 사수한다고 결의를 다지던 일제는 드디어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렇게 우리 민족은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를 강제로 해체시키는 통에 해방되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해방된 것은 아니지요.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은 속이 쓰리더라도 이 점을 냉정하게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둘러싸고 큰 혼란이 빚어진 것도 이 점을 명확히 전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한의 《현대조선역사》(1983)란 책을 보면, “조선의 해방은 김일성이 조직 영도한 영광스런 항일부장투쟁의 승리가 가져다 준 위대한 결실이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김일성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연군(抗日聯軍)에 중대장급 지위에 있던 김일성과 그의 부하 50여 명은 일본 관동군의 추격을 받자 1941년 연해주 소련령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김일성이 귀국한 것은 1945년 9월입니다. 전쟁이 끝나기 얼마 전 스탈린은 연해주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그가 장차 북한에 세워질 자신의 대리정부의 책임자로서 적격인지를 테스트합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 만족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소련군 배를 타고 해방 한 달 뒤에 원산항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실이 엄연히 이러함에도 북한의 역사책이 위와 같이 국민을 속이고 있는 것은 그 사회에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없고 위선의 전제권력이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돌려 한국의 《한국근·현대사》(금성사판)라는 역사교과서를 보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광복을 가져다 준 것은 연합군의 승리였다.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광복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 민족이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북한에서와 같은 심각한 날조는 없습니다. 그 대신 연합군에 의한 해방이 새로운 국가의 건설에 장애가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저는 이런 얼토당토않은 주장이 정부가 검인정한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음을 보면서 솔직히 말해 남한 역시 북한 못지않은 위선의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관해 보다 자세하게는 다음 장에서 분단의 책임을 물으면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독립운동의 실태

기타 남한의 역사교과서나 많은 연구서를 보면 1920년대 이래 만주와 중국에서 ‘무장 독립전쟁’이 줄기차게 벌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독립전쟁은 드디어 1944년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국으로 통합되었습니다. 그리고선 연합군과 합동으로 국내로의 진격작전을 준비하였으나 미국이 너무 일찍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통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애석해하는 서술로 독립전쟁의 역사는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1985년 판 국정 교과서에서 관련 서술을 찾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연합군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은 그해 9월에 국내 진입을 실행하려던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과장이거나 실태와 동떨어진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 임시정부 요인들(1945.12.5). 앞줄 왼쪽부터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 뉴데일리

만주벌판에서 독립군이 일본군과 독자의 힘으로 전투를 벌인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 한 해였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홍범도 장군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서로 합심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둡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그것이지요. 이후 일본군의 추격을 받은 독립군은 연해주 소련령인 알렉세예프스크로 퇴각합니다. 그곳에서 여러 정파 간에 독립군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큰 내분이 벌어지고 그 틈을 타서 소련 적군(赤軍)이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여 수백 명이 사살되는 등, 독립운동사에서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자유시참변’이라고 하지요. 이후 독립군이 일본군과 유격전이든 진지전이든 독자의 전선을 형성한 적은 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1930년대가 되면 중국공산당의 통제를 받는 항일연군과 팔로군에 속한 조선 청년들의 무장투쟁이 전개됩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과 중국 간 전쟁의 일환이었습니다.
항일연군의 영웅적인 전사의 한 사람으로서 양정우 장군을 소개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보다 상위의 연대장급 인물이었습니다. 1990년 저는 중국 션양[審陽]의 역사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양정우의 위대한 항일투쟁이 커다랗게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더군요. 반가워서 자세히 읽어 보았더니 조선 출신이란 말이 없더군요. 민족사의 비극을 다시  한번 실감한 대목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국제적 조건과 관련하여 유의할 점은 미국, 소련, 중국 등 연합국의 어느 정부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거나 임시정부 독자의 군사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을 정도로 임시정부의 대표성은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은 이념이나 노선에서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체적 조건도 부족한 가운데 임시정부를 지원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장차 일제로부터 해방될 한반도에 걸린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1941년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국광복군행동준승(準繩)’을 임시정부에 강요하여 광복군을 중국군 참모총장의 통제하에 둡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임시정부의 조소앙 외무부장이 주중 미국대사에게 중국이 일본의 패배 후에 다시 한국을 중국의 종주권 하에 두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같은 입장은 정도의 차가 있겠지만 중국의 공산당 정부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차 일제로부터 해방될 한반도에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강대국 간의 긴장관계가 벌써부터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요컨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이러한 긴장관계의 국제질서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거나 발언권을 확보한 조선인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현실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일제의 부속 영토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그 국제법적 지위는 1910년 대한제국이 패망할 당시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렇게 대한제국의 패망은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한국의 현대사에 드리웠습니다. 그 깊은 상처는 2007년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직업이 역사가라서 더욱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대한제국의 패망이란 아픈 상처를 지금도 간혹 가슴의 통증으로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구조 변동

그렇지만, 조선을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킨 국제정치의 역학과 성질은 대한제국을 패망시킨 구제국주의 시대의 그것과는 판이해져 있었습니다. 해방의 역사적 의의를 올바로 평가할 때, 이 점은 결코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시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선 지적해 두고 싶은 점은 세계적으로 보아 1945년까지 존속한 제국주의 세계체제는 식민지 민족이 거세게 무장독립전쟁을 펼친 결과로 해체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알기에는 그렇게 독립한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 힘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 세계가 그랬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국주의를 해체한 궁극의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제국주의에 내재한 모순 그 자체였습니다. 앞서 지적한 대로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해 제국주의는 식민지에다 근대를 이식하였습니다. 그런데 근대를 학습하고 실천하는 식민지 민중이 성장하자 제국주의의 지배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으로 근대화된 인간들을 언제까지나 정치적으로 차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지배의 결과가 지배의 부정이 되는 것, 그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바로 변증법적 모순입니다. 제국주의는 그러한 모순으로 조만간 해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은 자주 식민지를 문명화시키는 것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변명했습니다만, 어느덧 제국은 그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 서울에 진주하는 미군. ⓒ 뉴데일리

제국주의를 해체한 직접적인 계기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국가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뀐 데 있었습니다.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은 거대한 땅덩어리에다 최대의 자원 보유국이자 최대의 농업국이요 최대의 공업국이었습니다. 그런 미국에 식민지라는 부속 영토는 거추장스런 것이지요. 그보다는 전 세계를 하나의 자유시장으로 통합하는 편이 미국의 국익에 맞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필요로 한 상품을 미국에 팔고, 그래서 미국의 달러를 벌어들여서 미국으로부터 필요한 물건을 사가는 국가들로 세계의 식민지들이 독립해 준다면, 그 편이 미국으로서는 가장 바람직하였습니다. 이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쟁이 끝난 다음에 식민지를 해방한다는 다짐을 받고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을 지원하였던 것이지요. 약속대로 전쟁이 끝나자 영국을 위시한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들의 오래된 식민지로부터 철수하였습니다. 미국도 식민지였던 필리핀으로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물러났습니다. 그 결과 1960년대까지 대략 140개 이상의 신생 독립국가들이 성립하였습니다. 대한민국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컨대 해방 그 자체는 세계자본주의의 구조변화를 반영한 글로벌한 사건이었습니다.

해방의 세계사적 의의

이후 대한민국이 되는 한반도의 남부가 미국 헤게모니하의 세계체제로 편입된 사건의 세계사적 의의에 대해 좀 더 부연하겠습니다. 흔히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라 하면 동서냉전과 자유무역의 두 가지를 그 기둥으로 꼽습니다. 우선 세계지도를 펴놓고 봅시다. 1980년대까지 거대한 유라시아대륙의 대부분이 소련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제체제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대륙의 동쪽 끝에 하나의 점과 같은 한반도의 남부가 사회주의 국제체제의 바깥에 놓인 것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합니까. 그것은 차라리 기적과 같은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제15장에서 다루게 될 한국전쟁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 전쟁은 소련의 스탈린이 한반도의 남쪽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에서 기획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전쟁은 미국에 의해 방어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미국은 그들의 젊은이 3만여 명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그 전쟁에 개입했습니까. 한국을 특별히 사랑해서가 아니지요. 전 세계를 사회주의진영의 공세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동서냉전에서 질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정부 수립 이후 지난 60년간 한국인들이 누려온 신체의 자유, 기회의 평등, 대의민주주의 등의 기초적 가치는 세계사에서 그러한 정치 원리에 입각한 국가의 효시를 이루면서 그러한 원리로 세계를 통합고자 했던 미국체제를 배제하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현상입니다.
미국체제의 다른 한 기둥은 세계의 자유무역입니다. 이를 위해 1947년까지 IMF[국제통화기금]와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두 국제기구는 1950년대까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합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의 모든 국가가 미국에 맞서 자유무역을 할 정도로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국가는 미국과의 무역에서 적자였고, 이에 미국은 비경제적인 논리로, 곧 원조의 형태로 달러를 국제사회에 살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냉전의 논리와 깊이 결부되어 있었지요. 그러다가 독일, 일본 등 서방 국가들이 미국과 자유무역을 할 만큼 경쟁력을 갖추게 되는 것은 대개 1958년부터입니다. 드디어 1961년부터 GATT 제6차 케네디라운드가 펼쳐지면서 세계 자유무역체제가 본격적인 기치를 올리지요. 다 잘 아시는 대로 대한민국의 기적적인 경제성장이 개시되는 것도 바로 그 케네디라운드라는 운동장에서였습니다.
그러니까 1945년 8월의 해방이란 역사적 사건은 한국인들에게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와 경제적으로 시장경제를 자신의 능력으로 추구해 볼 수 있는 국제적 조건으로서 이른바 미국체제가 한반도의 남쪽에 들어선 글로벌한 사건이었습니다.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짙은 안개 속의 새벽길처럼 불확실해보였습니다. 아니 불가능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역사의 업보랄까, 분단과 전쟁이라는 커다란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그 건국사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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