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한국을 뒤 흔들고 있습니다. 멀리 미국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을 지켜보면서 조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언론에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보도를 보고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저는 언론에 나타나는 것이 조국 동포들 전체의 생각이 아니라 표면적인 일부일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일부 진보 언론은 노무현의 자살을 미화시키고 눈물을 부채질하고, 보수 언론들이 여기에 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들 진보 언론은 죽음까지 자기들의 사상과 목적에 이용하고, 보수 언론들은 죽음 앞에서도 자기 이익을 계산하면서 자신을 위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한국적 감정 문화입니다.

    자살을 미화시키는 사회는 없습니다. 더욱이 나라를 책임졌던 대통령의 자살을 미화시키는 문명사회는 없습니다. 그것은 옛적 선진 민주정치가 미몽에 있을 때나 있었던 일입니다. 21세기 격동의 시대에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한국 사회에서 자살을, 그것도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미화시키고, 죽음을 굴절시키는 것은 한국의 선진화가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한국 의식이 얼마가 얇은 감정문화이고, 한국인 감정이 얼마나 극단적인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숙연해지고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그러나 숙연함으로 옷깃을 여미는 것은 망자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한 인생의 종결을 바라다보면서, 그 인생이 어떠했고, 그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망자가 남기고 간 죽음의 의미이고 산자가 곱씹어야 할 죽음의 뜻입니다.

    그런데 조국은 죽음을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비판하면 죽은 자에게 돌을 던진다는 비판이 두렵고, 이데올로기 홍위병들의 광폭한 돌팔매질을 감당하기 두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지성들은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 잘못됐다는 것을 지적하고, 한국 사회가 죽음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합니다. 진보 언론은 물론이고 보수 언론까지 노무현이 유서에서 말했다는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하는 말을 아전인수 하면서 자살을 왜곡시키고, 어느 철학자는 이 말을 철학적으로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죽음과 삶은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닙니다. 한 조각처럼 보이지만 삶은 시작이고 영원하고, 죽음은 끝이고 순간입니다. 죽음은 죽음이고 삶은 삶입니다. 우리는 죽어서도 살아있기를 원하기에 이 땅의 삶에서 혼신을 다해 노력하고 봉사하고 헌신합니다. 세상이 물질화되고 세상이 썩어 갈수록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모습으로 사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죽음과 삶은 하나가 아니라, 죽음이 생명을 갖게 하는 것이 진정한 삶입니다.

    저는 노무현의 살아 온 인생 역정을 보면서 가슴으로 느끼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과 눈물과 좌절과 분노 속에 자란 노무현의 어린 시절은 저의 어린 시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노무현의 염원에 깊은 공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처음부터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반대했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후 줄곧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노무현이 어린 시절의 슬픔과 좌절을 소화시키지 못한 채 정치인이 되고, 젊은 시절의 분노와 한을 극복하지 못하고 대통령이 되었고, 그의 지도자적 자질과 품성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이 된 후 청문회에서 명패를 던지는 것을 보면서 저는 노무현이 혈기와 의기가 넘치는 정치인으로 일그러진 시대 주름살을 펴는 역할을 하겠지만, 그가 정치를 분노와 대결의 마당으로 만들 것 같은 불안을 느꼈습니다. 분노와 한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도자가 되면 그 시대와 사회는 불행하게 됩니다. 역사는 분노와 한을 독기처럼 품은 극단주의자가 지도자가 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노무현은 극단주의 덫에 걸렸습니다.

    선진 민주정치에서 지도자, 특히 대통령이 될 때 가장 중요시하는 항목이 '캐리크터'(Character)입니다. 캐리크터 속에는 성격과 인격, 자질과 덕성과 행동이 용해되어 있습니다. 캐리크터는 인생과 운명을 결정하고, 캐리크터는 삶과 리더십의 총체입니다. 캐리크터가 잘못되면 인생이 방황하고 나라와 시대가 어지러워지고, 분열되고, 싸우고, 극단화됩니다.

    대통령은 투사나 전사가 아니라 통합하고 포용하면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신뢰를 만드는 치어 리더이고, 주저앉으려는 국민들을 일으켜 세우면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지휘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의 캐리크터는 국민들의 면밀한 검증을 받습니다. 노무현은 캐리크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국민을 통합하고 국민을 격려하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품성 보다는 대결하고 분열시키는 강기가 많았습니다. 노무현은 뛰어난 전사와 투사였지만 바람직한 지도자, 대통령은 아니었습니다.

    노무현의 자살 소식을 들으면서, "아! 그랬구나!" 하는 소리가 제 가슴에서 나왔습니다. 노무현의 자살은 노무현 정치가 왜, 실패했는지를 대답해 주는 것입니다. 저는 노무현의 말투가 조잡하고, 그의 언사가 격이 떨어지는지에 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지식은 있으나 지혜가 없고 능력은 있으나 자질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무현의 자살을 대하면서 저는 그 해답을 얻었습니다.

    노무현은 질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살은 병입니다. 바위산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자살할 수 있는 사람은 병중에도 깊은 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라가 위험합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삶을 위임받기 때문에 충동적이거나 극단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이 충동적이거나 극단적이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나라가 위급할 때 그 판단력이 잘 못 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을 뽑을 때 '캐리크터'를 철저히 검증하는 것은 위기의 순간에 한 치의 실수가 있어서도 안 되는 대통령 직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돌산에서 뛰어내려 자살할 수 있는 사람에게 나라의 운명을 5년간 맡겼다는 것이 섬뜩합니다. 만약 지난 5년간 어떤 위기가 있었을 때, 그가 극단적인 충동의식으로 나라의 운명을 선택했다면 어찌 됐을까하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합니다. 바위산에서 뛰어내려 자살할 수 있는 사람은 국가를 신명나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국가를 자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노무현의 자살은 그가 무사히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는 것만으로도 안도의 숨을 쉬게 합니다. 노무현은 결코 자살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노무현은 국민과 국가에게 용서할 수 없는 큰 죄, 자살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죄인에게 국민장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정치적 계산입니다. 국민 의식에 부정적인 짐을 지워주는 것이지만 이미 결정했기에 고인을 위로하고 국민을 통합한다는 대승적 안목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국민장은 슬픔과 추모의 국민장이 아니라 교훈과 반성의 장례식이 되어야 합니다.

    노무현 자살을 놓고 검찰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치졸한 파당의식입니다. 검찰은 자기 책임과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검찰의 역할은 죄를 지은 가능성이 있을 때 그것을 파헤치고 기소해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검찰이 이 기능을 제대로 못해서 검찰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 왔습니다. 전직 대통령이지만 부패와 부정의 혐의가 있을 때는 정치 보복이라는 비판이 있더라도 그것을 파헤치는 것이 검찰의 의무입니다.

    권력이 살아있을 때 이 역할을 하는 것이 정도이지만 죽은 권력이라도 부패를 척결하면 나중에는 살아있는 권력의 비리도 척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노무현이 자살한 것이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견강부회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고통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노무현이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했다면 노무현의 문제이지 검찰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래도 노무현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도덕성이 추락한 것을 견디지 못해 자살할 수 있는 양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잘못을 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노무현은 양심적이고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이러한 노무현의 모습은 그의 인간적이고 성실한 모습을 평가하는 것이 될 것이지만, 이것이 노무현의 자살을 미화시키는 명분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통령은 무슨 명분으로도 자살을 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은 무수한 비난과 비판의 홍수 속에서 억울하고 부당한 것이 많더라도 그것을 감내하고 묵묵히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노무현이 억울한 것이 있었더라도 모든 비판을 끌어안고 앞으로 걸어갔다면 그는 억울한 것을 풀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가 잘못했다면 그것을 용서받고 상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무현은 자살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노무현의 죽음은 한국사회에 심각한 질문과 과제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가 계속해서 노무현식 극단주의로 표류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노무현은 객기와 결기가 많았습니다. 그의 객기와 결기가 역경을 이기고 영광을 차지하는 힘이 되었지만 그 객기와 결기는 정치를 극단적이게 만들었습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촛불 때문이었고, 노무현은 이 왜곡된 한국의 촛불 문화에 대한 태생적 빚과 체질적 한계 때문에 순화와 조화의 정치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객기와 결기는 결국 자살이라는 광기를 불러냈습니다. 그가 죽은 뒤에도 이데올로기 홍위병들은 대통령이 보낸 조화를 훼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조문객을 쫓아내는 광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 광기문화를 씻어내지 않고는 한국의 장래는 어둡습니다.

    미국 쇠고기를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다는 광기시위를 했던 사람들은 노무현의 죽음을 또 다른 광기 축제의 호재로 삼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들이 그 길을 택한다면 그들이 믿고 외치고 전파하려는 이데올로기는 무덤으로 갈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노무현을 아끼고 자신들의 신념과 이데올로기에 성실하다면 그들은 숙연한 마음으로 노무현의 죽음이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는 이데올로기 홍위병들의 광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와 신념의 본질이 왜곡되고, 양식과 순수의 본질이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감미롭고 진솔한 촛불을 정치적으로 훔치고 악용해서 광기의 불길로 만든 이데올로기 홍위병들은 이제 가슴을 진정시키고, 노무현의 자살이 이 시대 조국과 민족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깊이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노무현의 죽음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몫이 어떤 것인지를 성찰하는 것이 망자를 향해 옷깃을 여미는 자세입니다.

    이 시대, 한국의 광기문화가 노무현의 죽음으로 종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살이라는 죄를 씻고 나라와 역사에 보답하고 공헌하는 노무현의 마지막 도리입니다. 그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저는 숙연한 마음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빕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앞에서 노무현을 논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저는 이 방법이 노무현을 위하는 길이고, 조국을 위하는 길이고, 살아있는 자의 양식이라고 믿습니다.

    * 편집자 주> 본 글은 필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직후인 5월 25일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