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 이야기

박정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09.08.06 18:19:12

 대중문화 비평에서 즐겨 쓰는 단어, ‘아우라’

대중문화 기사에서, 특히 연예 기사에서 ‘아우라’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띤다. “고현정은 강하고 악하고 독한 아우라를 풍길 수 있도록 푸른색, 퍼플 그리고 블랙으로 이어지는 짙고 무게감 넘치는 컬러를 메인으로 사용했다”느니,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에너지가 하늘과 땅 차이 같아요”라든가, “자칫 그 본래의 아우라마저 이 드라마를 통해 깎아 먹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등등. 원래 벤야민의 미학 개념인 아우라(Aura)에서 의미가 약간 미끄러진 감은 있지만, 그것이 ‘독특한 분위기’를 뜻하는 것임은 누구나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아우라 체험

베니스와 플로렌스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겨울의 끝자락인 2월, 영하의 기온이 아님에도 습기를 한껏 품은 회색 빛 대기의 차가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거리마다 관광객은 적당히 많았고, 추위 때문일까, 사람들의 얼굴은 여름 관광의 들뜬 표정이 아니라 어쩐지 황량하고 쓸쓸한 표정이었다. 괴테도 조르주 상드도 방문했었다는, 유리문이 아름다운 오래된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추위를 녹였었다. 아르노 강의 600년 된 폰테 베키오 다리, 강 쪽으로 돌출된 구조물의 가게들이 50년대 청계천 다리 어디쯤과 비슷하다는 묘한 착시 현상을 느꼈다. 하나같이 비스듬히 굽어진 골목길들은 접어들 때마다 꿈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몽롱한 기분이었다. 어떤 골목길에서 문득 빠져 나왔을 때 눈 앞에 갑자기 닥아 선 아름다운 색깔의 거대한 대리석 건물. 초록색, 분홍색, 온갖 색깔들의 대리석 카드를 붙여 놓은 듯한 아름다운 건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 이처럼 아름다운 건물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미로 속을 헤매듯 골목길을 돌고 돌아 자꾸만 성당 앞에 이르러 한없이 건물을 바라보았었다.


▲ 벤야민 얼굴 ⓒ 뉴데일리

그로부터 십여년 뒤 한국 여행사를 따라 패키지 여행으로 베니스와 플로렌스를 다시 찾은 적이 있다. 여름날의 후끈한 열기로 가득찬 두 도시는 온 세계의 관광객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베니스 산 마르코 광장의 카페 플로리안을 감싸고 있던, 어쩐지 쓸쓸하고 고풍스러웠던 기분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플로렌스의 꿈 속 같은 좁은 골목길들은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들의 행렬 속에서 내가 10년 전에 느꼈던 몽환적 분위기의 추억을 조롱했다. 꽃의 산타 마리아 성당의 초록색 분홍색 대리석들도 흐릿하게 색이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별 감동 없이 찾는, 그저 그렇고 그런 세계 유명 관광지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거의 천년동안 지속되어온 도시가 십년 만에 달라졌을 리는 없다. 그런데 내가 그 안에서 꿈꾸듯 희미하게 숨 쉬던, 마치 수증기처럼 두 도시를 감싸고 있던 그 분위기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인가.
아우라의 상실이다.

 아우라란 무엇인가?

아우라는 본래 사람이나 물체에서 발산하는 기운 또는 영기(靈氣) 같은 것을 뜻하는 말인데, 1936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독특한 예술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아우라는 유일한 원본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므로 사진이나 영화와 같이 복제되는 작품에는 아우라가 생겨날 수 없다고 하면서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아우라의 붕괴'로 정의하였다.

벤야민에 의하면 ‘아우라’는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織物)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벤야민의 모국어인 독일어 표현을 그대로 소개하면 einmalige Erscheinung einer Ferne, so nah sie sein mag(가까우면서도 먼 어떤 것의 찰나적인 현상)이다. 영어는 unique phenomenon of a distance, however close it may be이고, 프랑스어로는 manifestation d'un lointain quelle que soit sa proximité(아무리 가까워도 멀리 있는듯한 아득함의 발현)이                 다.
내가 베니스와 플로렌스를 찾았던 어느 겨울날 두 도시를 감싸고 있던 몽환적 분위기가 그것이었다. 그 순간 그 장소에서만 느꼈던 단 한 번의 분위기, 시간과 공간이 조금만 어긋나도 다시 찾을 수 없는 미묘한 느낌, 바로 옆에 있지만 어쩐지 먼 과거인 듯 느껴졌던 아득함, 나중에 인위적으로 다시 만들어 낼 수 없는 그 절묘한 순간이 바로 아우라였던 것이다.

 사진에서 찾은 아우라의 정의

벤야민도 한 특정의 공간과 시간이 만나는 지점의 미묘한 아우라를 여름날 산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아득한 시선에서 찾았다. 산 그림자 길게 뻗은 산을 바라보고 있던 여름 어느 날, 그것이 가까이 있음에도 왠지 멀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복제될 수도 없고, 나중에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는 이 감정이 바로 아우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중점적으로 아우라를 분석한 것은 사진에서이다. 그가 아우라의 정의를 설명한 것도 사  진에서였다. 그는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기술복제 예 술의 전형으로 사진과 영화를 들었다. 물론 사진과 영화는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기술복제 예술이지만, 오늘날에는 컴퓨터의 발달로 미디어 아트가 새롭고 강력한 기


▲ 옥타비우스 힐: 생선 파는 여인 ⓒ 뉴데일리

술복제 예술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기의 발명

사진은 1835년에 프랑스의 다게르(Louis Jacques Daguerre, 1787-1851)에 의해 발명되었다. 장식미술가였던 다게르는 처음에는 3차원의 환영(幻影)을 주는 장치인 디오라마를 발명했고, 이어서 디오라마의 보조기구였던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 어두운 방)에서 얻어진 영상을 고정시키고 현상(現像)하는 법을 발명했다. 물리학자 니엡스(Joseph Nicéphore Niepce, 1765-1833)와 공동작업을 한 것이지만 니엡스는 이 결과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새로 발명된 사진기는 그의 이름을 따서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라고 명명되었다. 최초의 사진술인 은판(銀板)사진기이다. 이보다 앞서 카메라의 전신인 카메라 옵스쿠라가 벌써 수백년 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래 꾸준히 연구되고 있었다. 어두운 방의 지붕, 벽, 문 등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반대쪽 벽에 외부의 풍경을 투사시켜 대상의 정확한 상(像)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몇 사람이 이동시킬 수 있는 큰 형태였고, 그것을 더 축소시켜 한 사람이 운반할 수 있는 소형의 것으로 만들었다. ‘진주 귀고리의


▲ 사진사 다우텐다이와 약혼녀 ⓒ 뉴데일리

소녀’를 그린 베르메르도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백년간 화가들은 카메라 옵스쿠라 속의 상(像)들을 고정시키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해 왔는데, 다게르에 와서 비로소 그 꿈이 이루어졌다.
다게르가 성공시킨 사진 영상들은 요드 처리가 된 은판을 빛에 노출시켜 얻어낸 연한 회색의 상(像)이었다. 1839년에 은판 하나의 값은 평균 금화 25프랑에 달했고, 그것을 귀금속처럼 케이스 속에 보관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많은 화가들의 손에서 이 은판은 기술적 보조 수단으로 변모했다.

 초창기 사진의 아우라

저명한 초상화가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도 정확한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사진을 보조 수단으로 썼다. 먼저 사진을 찍은 후 그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식이다. 그는 화가로서는 별로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만 보조 수단으로 사용했던 평범한 사진들로 역사에 이름이 남게 되었다.여기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채 생선 광주리를 들고 있는 한 젊은 여인이 있다. ‘뉴헤이븐의 생선 파는 여인’, 여인은 무심하면서도 유혹적인 수줍은 모습으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다. 1930년대 독일 시인 스테판 게오르게는 사진 속 여인을 보고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곱게 빗어 넘긴 이 머리와 눈길이 사람들을 어떻게 사로잡았을까! 불길 없는 연기처럼 정신없이 피어오르며 휘감았을 욕망이 여기 이 입술에 어떻게 입맞춤을 했을까!”
한 때 살아 있었던, 지금은 인화지에 납작하게 남아있는, 그러나 단순히 사진의 장면 속에 매몰되어 사라져 버리지 않은, 한 여인의 분위기, 그것을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했다.
여기 또 시인 다우텐다이(Max Dauthendey)의 아버지인 사진사 다우텐다이가 약혼 시절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다. 먼 훗날 그의 아내는 여섯째 아이가 태어난 직후 모스크바 저택의 침실에서 동맥을 끊고 자살한 채 발견됐다. 아내는 이 사진에서 그의 곁에 서 있고, 그는 아내를 붙들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를 비껴가고 있고, 왠지 불길하게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사진사가 제아무리 조작을 잘하고 모델의 자세를 세심하게 미리 계획했더라도 사진 속에는 한 줄기 불꽃 같은 우연, 도저히 다시 재연할 수 없는, 오래 전에 흘러간 그 때의 ‘지금 여기’가 찰나적인 한 순간으로 응축되어 있다.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아득한 과거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가벼운 현기증, 이것이 아우라이다.

  사진의 아우라는 지속성에서


▲ 청년 시절의 카프카와 세 누이들 ⓒ 뉴데일리

사진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서구 대도시 부르주아 가정들은 가족의 초상 사진을 거실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걸거나 세워 놓았다. 앨범들은 집안의 서늘한 곳, 응접실의 선반이나 작은 탁자 위에 곧잘 놓여 있었다. 쇠 장식을 한 가죽 겉장에 금테두리를 한, 손가락 두께의 앨범들에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주름이 잡히거나 꽉 동여맨 옷을 입은 인물들, 예컨대 알렉스 삼촌, 리크헨 숙모, 어릴적 트루트헨, 첫 학기 때 아빠의 모습이 여기저기 붙어있게 마련이다. 때로는 똑바로 때로는 비스듬한 자세로 깨끗이 닦아놓은 기둥에 기대어 서있는 말쑥한 모습의 수병도 있다.
초상 사진의 배경에는 으례 기둥 받침, 난간, 타원형 탁자 등이 있었는데, 이것은 오랜 노출 시간 때문에 모델들에게 움직이지 않은 채 있을 수 있도록 기댈 곳을 줘야만 했던 시절의 유물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머리받침이나 무릎 대로 만족했지만 곧, ‘유명한 그림들에 나오고 그렇기 때문에 예술적으로 보였던’ 보조 도구들이 뒤이어 등장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희랍 신전의 기둥과 커 튼이 었다. 1860년대의 한 영국 잡지는 이렇게 꼬집었다. “회화에서 희랍식 기둥은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사진에서는 어처구니 없다. 대리석 기둥이나 돌 기둥이 양탄자
▲ 카프카가 살았던 프라하의 작은 집ⓒ 뉴데일리

위에 서있을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이어서 등장한 것이 휘장과 종려나무, 태피스트리와 이젤 등이다.
여기 여섯살 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지나치게 레이스 장식을 많이 단 꽉 끼는 아동복을 입고 있다. 풍경은 겨울 정원 같은데, 그 안에는 종려나무 잎들이 무성하다. 이 박제된 열대 풍경을 더욱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듯 소년의 왼 손에는 터무니 없이 커다란 차양 넓은 모자가 들려 있다. 한없이 슬픔을 머금은 눈의 이 소년은 어린 시절의 카프카이다.
한국의 30년대도 서구와 나란히 갔다는 것에 문득문득 놀라는 때가 있다. 나의 어머니와 큰 언니의 사진 배경은 저 멀리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언뜻 모습을 보이는 서양의 대저택이다. 그러나 바닥의 양탄자 주름이, 그 곳이 사진관의 실내임을 말해준다. 아래 쪽에는 펜으로 휘갈겨 쓴 1932라는 숫자가 보인다.
아! 오래된 흑백 사진만 보면 나는 눈물이 난다.

아우라에는 지속성과 일회성이

최초의 다게르 사진들은 선명하고 사실적이어서 그것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사진을 감히 오랫동안 바라보지 못했다.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에는 침묵이 서려 있었고, 눈길은 그 침묵 속에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초기 사진들이 주로 공동묘지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힐의 사진들도 대부분 에딘버러의 그레이프라이어스(Greyfriars) 공동묘지에서 찍은 것이다.  


▲ 아제: 텅 빈 파리 거리 ⓒ 뉴데일리

그것은 순전히 기술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초기의 사진판은 감광도가 낮았기 때문에 옥외에서 오랫동안 햇빛에 노출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사진의 모델을 가능하면 한적한 곳으로, 즉 조용히 집중하는 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을 장소로 데려가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렇게 모델을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있게 했던 촬영방식 자체에서 아우라가 발생했다. 초기의 사진들은 모든 것이 지속성(permanence)이다. 초상 사진 속의 셸링(Schelling)이 입고 있는 코트의 주름들까지도 지속성을 지니고 있는 듯 하다. 초창기 사진의 아우라는 이런 지속성에서 나온 것이다.
사진술이 엄청나게 발달하여 사진기가 자동으로 초점을 맞춰주고 언제 어디서 아무렇게나 눌러도 잘 나오게 되자 사진의 지속성은 사라지고, 찰나성(transitoriness)이 들어섰다. 오래 앉아서 포즈를 취하던 모델의 얼굴에 그윽하게 고이던 분위기는 사라졌고, 수많은 연속동작 중 하나의 찰나적 순간만이 포착될 뿐이다. 은판 하나가 유일한 사진을 만들어내던 기술이 발전하여 한 장의 원판으로 다량의 인화가 가능해지자, 소위 아우라의 일회성(uniqueness)은 반복적 복제가능성(reproducibility)으로 바뀌었다. 어느 것이 진짜 인화냐고 묻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예술작품의 제의(祭儀)가치와 전시(展示)가치

아우라는 예술작품의 제의(祭儀)가치(cult value, ritual value)에서 발생한다. 벤야민은 제의가치와 전시(展示)가치(exhibition value)가 예술작품을 규정하는 두 개의 특징적 성격이며, 이 두 성격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밀어내고 들어서는 역사가 곧 예술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 아제: 텅 빈 안뜰 ⓒ 뉴데일리

처음에 인류가 예술작품을 만든 것은 주술에 사용되는 형상물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이 형상물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존재 자체의 중요성 때문에, 즉 제의 가치를 위해 만들어졌다. 석기시대의 인간이 동굴 벽에 그려놓은 사슴은 일종의 마법적 도구일 뿐,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진다 해도 그것은 단지 우연한 기회에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제의가치는 예술작품을 은밀한 곳에 숨겨 두기를 요구한다. 힌두교의 어떤 신상(神像)들은 밀실에서 승려들에게만 접근이 허용되고, 어떤 교회의 성모상은 거의 일년 내내 베일 속에 가려져 있으며 또 중세 사원의 어떤 조각들은 지면에서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러나 차츰 예술활동이 의식(儀式)의 목적에서 해방됨에 따라 예술작품은 점점 더 전시를 위해 만들어졌다. 사원 내부의 일정한 장소에 붙박혀 있던 신상 대신 옮기기


▲ 아제: 사람이 없는 방 ⓒ 뉴데일리

쉬운 흉상(胸像)이 만들어졌고, 모자이크나 프레스코화보다는 패널 그림(이젤 회화)이 그려졌다.

 사진의 전시가치

근대에 가까워질수록 전시가치는 제의가치를 밀어낸다. 그러나 제의가치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물러난 것은 아니다. 제의가치는 최후의 보루로 물러서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는데, 그 마지막 보루가 바로 인간의 얼굴이다.
사진에서도 초창기의 사진은 제의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초상 사진이 그것이다. 초상 사진에는 멀리 있거나 이미 죽고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기 위한, 일종의 제의적 흔적이 남아있다. 오늘날 우리의 영정 사진이 그 마지막 남은 제의가치일 것이다. 초기 사진에 나타나는 멜랑콜리하면서도 아름다운 분위기, 인물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아우라는 바로 이 제의가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에서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면서 비로소 전시 가치는 처음으로 제의가치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 외젠느 아제(Eugène Atget, 1857-1927)이다.

아제는 파리 서민층의 풍속과 풍경을 상세하게 촬영했는데, 특이하게도 그가 렌즈에 담은 1900년경의 파리 거리에는 사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없는 도시의 거리는 마치 범행 현장처럼 괴이하다. 파리 성곽의 성문도 비어있고, 호화로운 계단도 비어 있으며, 안뜰도 비어 있고, 카페의 테라스도 비어 있다. 쓸쓸하다는 것은 적당한 말이 아니고, 아예 아무런 정취가 없다. 도시는 아직 세입자를 찾지 못한 집처럼 말끔히 치워져 있는 것이다. 아제와 함께 사진 촬영은 이제 제의가치를 포기하고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이 되기 시작했다.

사라져 버린 모든 것에 대한 슬픔

그러나 아제가 찍은, 텅 빈 파리의 거리풍경 사진들을 보면 역시 아득하게 먼 일회성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기와집이 줄지어선 100년 전 서울 어느 거리 사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순 제의가치와 전시가치의 이분법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지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아우라는 그러니까 사라지고 없어져 버린 어떤 것의 흔적이 주는 잔잔한 슬픔에 다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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