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 노출이 숭고?

박정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09.06.23 11:36:12

배우 송강호가 영화 '박쥐'에서 충격적인 성기 노출을 감행했다고 신문마다 대서특필했다. 언론 시사회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박찬욱 감독은 ‘아주 자연스러운 장면’이라고 말했고, 송강호는 “영화 내용상 가장 강렬하면서 정확한 표현이며, 개인적으로 숭고함을 느꼈다”고 했다.

성기 노출이 ‘숭고’라니! 촬영에 바빠서 책 볼 시간이 없을 배우까지 ‘숭고’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과연 ‘숭고’가 요즘에 가장 유행하는 핵심적인 미학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숭고’란 과연 무엇일까?

  거대하고 두려운 것 앞에서의 감정

우리는 높이 깎아지른 위협적인 바위들, 천둥 번개와 함께 하늘을 두텁게 가리고 있는 비구름, 엄청난 파괴력의 화산,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대지를 초토화시키는 허리케인, 높은 파도가 몰아치는 광활한 대양, 빠른 물살의 폭포... 이런 것들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 앞에서도 그 크기에 압도되어 당황한다. 시선이 바닥에서 꼭대기까지의 크기를 가늠하는데만도 시간이 꽤 걸리고, 그러는 동안 앞의 부분은 벌써 상상력의 범위에서 사라져 버려, 결코 단숨에 대상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바닥 넓이만 52,600 평방미터인 거대한 피라미드는 달에서도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인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에 들어갈 때도 그 크기와 엄숙함에 압도되어 당혹감을 느낀다. 6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의 크기도 놀랍지만 이 크고 화려한 건물이 4백년 전에 지어졌다는 역사적 무게도 우리를 압도한다. (성베드로 성당은 1506년에 짓기 시작하여 120년만인 1626년에 완공되었다). 바로크 시대 화가 비비아노 코다찌가 1630년에 그린 성베드로 광장은 한국의 관광객이 들끓는 오늘날의 광장과 별로 모습이 다르지 않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습을 칸트도 헤겔도 가서 보았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여하튼 두려운 자연 현상 앞에서 혹은 거대한 인공물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경외감, 이것이 바로 숭고의 체험이다. 숭고는 거대함 혹은 힘의 압도적 감각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체험된다. 거대함과 관련된 것이 ‘수학적 숭고’(mathematical sublime)이고, 압도적 힘에 관련된 것이 ‘역동적 숭고’(dynamic sublime)이다.

수학적 숭고는 무한한 절대적 크기의 관념에서 나오고, 역동적 숭고는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경외감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절대적으로 큰 것을 숭고라고 부른다. 칸트의 말이다(<판단력 비판>, 25절).

  불쾌와 고통의 감정이 쾌감으로 바뀔 때 느끼는 숭고의 감정

절대적인 크기 앞에서 우리는 공포와 왜소함의 감정을 갖는다. 어마어마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혹은 거대한 인공물 앞에서 인간이 한없이 작고 보잘것 없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순간의 두려움이 지나고 나면, 그리고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하다면, 두려운 광경은 두려울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리에게 경외감을 자아내는 거대한 대상들은 우선 상상력에 저항한다. 다시 말해 상상력을 압도한다. 숭고한 것은 무한함을 내포하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적 표상의 능력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엄청난 어떤 것을 보고 “상상을 절한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우리의 상상력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광경 앞에서 완전히 압도되고 좌절하여 자기 본래의 기능인 구상력(構想力)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일순 억눌렸던 감정이 그 억눌림의 반동으로 더욱 강렬하게 튀어오르는 희열감을 느낄때,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숭고의 감정을 느낀다. ‘숨막히는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감동이란 순간적인 억압감과 그에 뒤따르는 보다 강렬한 생명력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의 마음 안에서 작동되는 인식은 이성이다. 우리의 인식에는 이성과 오성(悟性) 두 가지가 있는데, 상상력(또는 구상력)은 오성과 관련이 있고, 또 오성은 감성의 도움을 받아 작동하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숭고한 것은 우리의 감성이 아니라 이성의 인식 능력에 적합한 대상이다.

숭고는 그러므로 불쾌와 고통의 감정이 일순간에 쾌감으로 바뀌는, 쾌와 불쾌의 혼합이다.

 미와 숭고의 공통점과 차이점

미적인 것과 숭고한 것은 칸트 미학의 양대 요소이다. 우리가 미적 감동을 느끼는 대상은 아름다운 것 아니면 숭고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둘 다 우리의 즐거움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 미와 숭고의 공통된 특징이다. 한 송이의 장미꽃을 볼 때나 폭풍우 몰아치는 대양을 볼 때 우리는 똑같이 즐거움을 느낀다.

그리고 어떤 것이 숭고하다는 판단은, 어떤 것이 아름답다는 판단이 그러하듯, 어떤 일정한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다. 우리는 장미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때 그것이 이러저러한 개념에 맞으므로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장미가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다. 수십미터 파도가 치솟는 폭풍우를 보고도 그것이 어떤 폭풍우의 개념에 맞으니까 장엄하다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 단 한 번의 폭풍우를 보고 장엄함을 느낄 뿐이다. 그러므로 미나 숭고는 똑같이 개념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미적인 것은 양 보다는 질과 연관되어 있지만, 숭고한 것은 질 보다는 양과 연관되어 있다. 한 송이의 장미꽃은 크기가 커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형태와 색깔이 우리에게 쾌감을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배를 집어삼킬듯 휘몰아치는 폭풍우와 용솟음치는 파도의 광경이 우리에게 어떤 미학적 감동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그 크기 때문이다. 그것이 금붕어를 넣은 어항 크기의 용기 속에 축소되어 들어가 있다면 그야말로 ‘찻잔 속의 태풍’이어서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는 질과 관련이 있고, 숭고는 양과 관계가 있다.

두번째로, 미는 형식성인데 반해 숭고한 것은 무형식성이다. 형식에는 제한이 있고, 무형식성에는 제한이 없다. 장미꽃은 여린 꽃잎들이 순차적으로 이리저리 포개져 특유의 장미꽃 문양을 만든다. 모든 장미는 다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 즉 장미는 장미라는 형식을 갖고 있다. 그것은 꽃의 중심으로부터 꽃의 끝까지 몇 cm 정도라는 제한이 있고, 장미 문양이라는 형태의 제한도 있다. 칸트가 미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이라고 했을 때의 그 ‘형식’인 것이다. 그러나 바닷물을 한껏 끌어올리며 포효하는 파도에는 정해진 형식도 없고 크기의 제한도 없다. 얼마든지 위로 더 솟아 오를 수 있고, 얼마든지 다른 모양의 물기둥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는 형식성이고, 숭고는 무형식성 혹은 몰형식성이다.

세번째, 미적인 것에 의해 야기된 즐거움은 적극적인 기쁨이고, 고요한 관조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반해, 숭고한 것은 경이로움에 의한 수동적 감동이고, 고요한 관조라기 보다는 에너지가 분출하는 대상에 자극 받는 역동적 감동이다. 예컨대 장미를 바라볼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 앞에 다가가 “아! 참 예쁘다!”라고 말하며 지그시 바라본다. 고요한 관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적극적인(positive) 즐거움의 감정이다. 그러나 해일처럼 무섭게 달려오는 파도를 보고 우리는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수동적으로 서서 우리 앞에 전개되는 무서운 광경을 두려움 혹은 경외감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소극적인(negative) 쾌감이다. 그리고 조용한 관조가 아니라 마구 가슴 떨리는 역동적인 감동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차이는 미가 오성(悟性)(understanding)과 관련이 있는 반면 숭고는 이성(理性)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오성은 상상력이 보내준 데이터를 개념에 의거하여 분류하고 정돈하는 기능이다. 영어로 understanding이지만 ‘오성’의 의미는 ‘이해’라기 보다는 차라리 표상(表象)에 가깝다. 표상(presentation 혹은 representation)은 ‘지각에 기초하여 의식에 나타나는 대상의 상(像)’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각의 대상이 우리 눈 앞에 실제로 있을 때 그것을 현전(現前)(presence)이라고 하고, 대상이 눈 앞에 있지 않고 기억에 의해 그 상이 의식 속에 재생되는 경우를 표상이라고 한다. 더 쉽게 얘기하면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책상은 현전이요, 여행을 떠나 여행지에서 머리 속에 떠올리는 책상의 모습이 표상이다. 관념과 같은 뜻으로 쓰기도 한다.

장미꽃 같은 미적인 대상을 볼 때 오성은 상상력(구상력)이 보내준 데이터를 가지고 개념에 의거하여 ‘장미꽃’이라는 하나의 표상을 만든다. 이때 상상력과 오성 사이에는 자유로운 유희와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오성은 수많은 개별 장미꽃들을 취합하여 공통적인 개념인 ‘장미꽃’이라는 표상을 하나 만든다. 이것이 반성적 판단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반성적 판단이란 특수에서 보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판단이다.

그러나 숭고는 이와 전혀 다른 감정이다. 숭고의 감정은 상상이 하나의 대상을 제시(표현)하는데 실패할 때 일어난다. 상상력과 오성의 조화는 깨지고, 둘 사이에 자유로운 유희 가 일어나기는 커녕 심한 갈등이 일어나고, 구상력과 오성의 표상능력은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다. 이때 우리는 일시적으로 좌절하고 불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오성이 더 이상 적절한 기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한 주체는 인식의 또다른 축인 이성에 의존한다. 비록 오성은 좌절했지만 대상을 이성과 조화시키려 시도하면서 오성보다 더 높은 단계인 이성의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한 주체는 스스로 고양되었다는 느낌을 갖는다. 우리의 정신력이 평범한 중간치 이상으로 높아지면서 우리는 강렬한 감동을 느낀다. 이것이 숭고의 감정이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미를 오성과 연관시키고, 숭고를 이성과 연관시켰다.

  숭고의 역사

숭고 이론은 칸트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숭고를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칸트가 처음은 아니다. 최초의 것은 1세기 때 로마에서 나온 <숭고함에 대한 시론>이다. 오래동안 이 책은 3세기 그리스의 수사학자 롱기누스의 작품으로 잘 못 알려져 있었다. 이 저서를 프랑스 고전주의 이론가 부알로(Boileau)가 17세기에 번역 출간함으로써 천 6백년만에 숭고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와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가 <미와 숭고함에 대한 시론>(Essay on the Sublime and the Beautiful, 1756)을 썼다. 이 저서의 영향을 받아 칸트는 1764년 <미와 숭고함의 느낌에 대한 고찰>을 출간했으며, 마침내 1790년에 출간한 그 유명한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함의 분석’은 ‘미의 분석’과 함께 미적 판단의 중요한 두 부분을 이루고 있다.

고전 시대의 숭고가 주로 수사학적 표현에서의 숭고를 다룬 것이라면 18세기의 숭고는 자연 속의 야생 및 광활함, 그리고 카오스의 감각을 일으키는 모든 현상과 관련이 있다.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퍼 데이빗 프리드리히(Caspe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안개낀 바다 위의 방랑자>나 영국의 풍경화가 윌리암 터너(William Turner, 1775-1851)의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풍경은 숭고를 시각화한 그림들이다.

 


▲ 카스퍼 데이빗 프리드리히(Casper David Friedrich)(1774-1840)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대자연의 숭고함을 그린 19세기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적 그림이다.  ⓒ 뉴데일리

                


▲ 윌리암 터너(William Turner)(1775-1851) '플리머스 해협의 폭풍우‘(The Mew Stone at the entrance of Plymouth Sound) (1814)▶자연의 숭고함을 폭풍우 치는 바다의 광경으로 그려낸 그림이다.  ⓒ 뉴데일리

아방가르드의 숭고미학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 얼핏 보기에 칸트의 숭고 개념과는 상관없는것 같은 예술작품들이 숭고미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 1924-1998)는 숭고의 전형으로 소련의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나 미국의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의 그림들을 예로 들었는데, 그것들은 검은 테두리 안에 흰 사각형을 그려넣은 기하학적 추상화이거나, 몇 개의 수직 혹은 수평선으로 나뉘어진 노랑 빨강 파랑의 색면(色面)회화(color-field painting)이다. 최소한의 미니멀리즘으로 환원된 아방가르드 회화들이 과연 칸트의 숭고미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앞에서 우리는 구상력과 오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숭고의 감정이 생겨난다고 말했다. 그것은 쉽게 말하면 적절한 표현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는 거대한 크기와 엄청난 힘을 보여줄 수 있는 표현 방법이 없다. 구상력은 좌절되고 오성의 표상 능력은 방해를 받아 우리는 대상을 적절한 표상으로 제시할 수 없다. 장미꽃 앞에서는 “예쁘다”고 말하며 차분하게 관조적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만 거대한 폭풍우 앞에서는 그것을 표현할 적적한 말을 찾지못해 망연자실하고 있을 뿐이다. 숭고의 대상은 표현이 불가능한 관념이다.

그것을 표현(present)할 적절한 말은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보여질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은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네가티브한 표현(제시)의 가능성이다.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말로 그 사실을 표현하라는 것이다. 포지티브하게 표현할 수단이 없다면 그것을 네가티브하게 표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는 출애급기의 형상금지법을 유대 율법중 가장 숭고한 구절로 제시한다. 10계명중 다음의 구절이 그것이다.

“너는 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출애급기 20장)

여기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가 바로 칸트가 숭고함의 최고치로 찬양한 구절이다.

현대 숭고회화의 미학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칸트의 이 견해보다 더 탁월한 견해는 없을 것이다. 20세기초의 아방가르드 화가들은 더 이상 자연을 모방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회화를 택했지만 그것은 구상(具象)이나 재현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재현에 대한 거부를 일차적 목표로 삼고, 전통적 회화 예술의 기본적 규칙들을 완전히 무시했다. 재현적 회화의 전면적인 붕괴 속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색채와 형태 뿐이었다.

그들의 회화는 회화로서 분명 뭔가를 ‘표현(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포지티브하게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티브하게, 마치 말레비치가 4각형을 그냥 하얗게 남겨두듯이 일체의 재현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 바네트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 
‘콩코드’(Concord) (1949)▶거칠게 칠한 녹색 바탕에 노란 수직선이 두 개 있다.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 색칠을 한 후 떼어내는 방식으로 그렸다. ⓒ 뉴데일리

 

 


▲ 바네트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
‘하나임’(Onement 1) (1948)▶회화공간을 구획짓기 위해 소위 zip(지퍼)을 사용하기 시작한 첫번째 작품이다. 단색 배경에 하나의 수직선만을 그려 넣어 일체의 구성(composition)을 포기했다. 크기, 모양, 색채에 관계없이 모든 것이 일자(一者)로 환원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뉴데일리
 

 


▲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  
‘흰 사각형’ (White on white,1917)▶도저히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말레비치는 그냥 하얀 색의 사각형을 그렸다.ⓒ 뉴데일리

 
▲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
‘검은 장방형과 푸른 삼각형’ (Black rectangle and blue triangle) (1915)▶말레비치는 이 그림을 시작으로 순수 기하학적 추상예술론을 표방했다. ‘절대주의’(suprematisme)라고 불리는 미술운동의 시작이었다. ⓒ 뉴데일리

 
▲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
‘검은 사각형’▶일체의 색과 형태를 거부하여 검정색으로만 남겨둔 화면. ⓒ 뉴데일리 

 

현대의 숭고미학

리오타르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인 바넷 뉴먼의 <숭고는 지금>(Sublime now, 1948)이라는 짧은 에세이의 제목을 포스트모던의 철학적 명제로 삼았다. 그는 숭고와 계시를 말하는 뉴먼의 예술론과 실험적 회화에서 새로운 미학의 단초를 보았다. 가시적인 표현을 통해 표현불가능성을 암시하고, 보는 것을 금함으로써 보게 하고, 고통을 줌으로써 쾌감을 준다는 회화적 아방가르드의 공리(公理)에서 우리는 칸트의 숭고미학이 그대로 구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칸트의 숭고의 미학에는 이처럼 이미 아방가르드주의가 배태되어 있었다.

아방가르드 예술작품은 표현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저 하얀 바탕에 파란 수직선이나 갈색 수직선 하나를 그리거나, 아니면 받침대 위에 덩그러니 3m 높이의 스테인리스 강철기둥을 세우거나 할뿐이다.

숭고 미학에 자극 받은 포스트모던의 예술은 이제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모방을 그만 두고, 강렬한 효과를 추구하거나 비일상적이고 충격적인 결합을 시도한다. 즐거움 보다는 놀라움을 주기 위해 쇼킹하고 충격적인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숭고미학의 ‘표현할 수 없음’을 증언하고 암시하고 가시화하기 위한 현대 포스트모던 미학의 전략이다.

현대의 숭고는 자연 속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수학적 크기나 역동적 힘이라는 18세기적 숭고의 개념에서 멀리 떨어져나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흔히 느꼈던 묘한 효과, 즉 합리성의 한계를 넘어선 것에 대한 불편한 쾌감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제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강렬한 효과를,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 아니라 놀랍고 비일상적인것을, 상식이 용납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것들을 추구한다.

예컨대 죽은 상어를 잘라 포름알데히드에 담아 전시하거나, 서서히 썩어가는 생선 냄새가 전시장을 가득 메우게 하는 식이다. 그러나 문제는 놀랍고 충격적인 것의 추구가 과연 숭고 미학의 발로인지 아니면 그저 일종의 예술적 사기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박쥐’의 성기노출이 숭고한 ‘숭고’ 미학인지 아니면 그저 관객의 눈길을 끌기 위한 저급한 선정성(煽情性)인지 구별하기 어렵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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