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사랑에 대한 기억은 누구에게나 쉽게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이다. 세월이 흐른 후, 한번 쯤 어린 시절 첫사랑을 찾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감독 스티븐 달드리)의 마이클(데이빗 크로스)에게 첫사랑은 지독히 아픈 ‘열병’이자 삶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하교 길 열병으로 구토하는 걸 도와준 30대 여성 한나(케이트 윈슬렛)을 사랑하게 된 마이클은 그녀의 집을 다시 찾으면서 비밀스러운 연인이 된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사랑하고, 책을 읽어주며 깊어가던 관계는 한나가 갑작스레 떠나면서 끝을 맺는다. 오랜 시간 그녀가 떠난 것에 상처 받은 마이클은 시간이 흐른 후 법대생이 되어 전범 처리 재판장에서 한나를 다시 만난다.

  • ▲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에서 감시원을 자원했던 그녀는 300명을 죽게 한 사건의 책임을 묻고, 재판장에 선다. 법대생으로 재판을 지켜보는 마이클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기억과 전범처리자에 대한 입장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고자 모든 죄를 덮어쓰는 한나의 비밀을 마이클은 알았지만, 끝내 법정에서 증언하지 않는다. 재판 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은 마이클은 학살의 현장을 목격하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진실을 묵인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래 전 아무 말 없이 그를 떠나버린 그녀에 대한 일종의 항의일지도 모른다.

    가석방 되어 나오기 전 한나를 만난 마이클은 “감옥에서 무엇을 배웠나요?”라고 묻는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못했던 그녀에게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냐는 차가운 말투였다. 어쩌면 그의 닫힌 마음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숨겨버린 태도일지도 모른다. 감옥에서 마이클이 보내준 책을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희망을 가졌던 한나는 마이클의 차가운 태도에 실망해 가석방되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 초반부터 직업 정신에 철저한 모습을 보이는 그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감시원일 때도 다른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철저한 직업 정신에 의해 그들을 감시한다. 그녀의 역할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단지 그녀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 

    영화를 보고 나면 왜 이 시점에서 홀로코스트(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 학살)에 대한 영화가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지금까지 수없이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많은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다시 회자되는 장면들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무지하기도 했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한 개인의 책임을 단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왜 사람들을 도망가게 두지 않았냐는 판사의 질문에 “그럼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 묻는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듯하다. 단순한 어린 소년의 사랑에 눈 떠가는 과정과 일생을 그린 영화가 아닌 영화를 본 후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