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8일자 오피니언면에 박효종 서울대 교수가 쓴 시론 '권력에 영혼을 판 죄'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최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보고 때 국정홍보처 공무원이 “우린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고 밝혔다고 해서 화제다. 자기합리화인지 아니면 면피용 발언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공무원의 정체성’에 대해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진 것은 사실이다. 공무원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을 위해 일할 책무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밤낮으로 ‘용비어천가’를 부르며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비판하는 언론과 여론을 무찔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마음 쳐다본 적 있나

    일찍이 황제가 되고자 했던 카이사르를 암살한 로마의 브루투스는 “나는 카이사르를 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을 뿐”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그러고 보면 그 옛날 로마에도 ‘영혼이 있는 공직자’는 있었던 모양인데, 정작 21세기 한국의 공직자에게서 영혼이 없다는 말을 듣다니 정말 뜻밖이고 씁쓸한 일이다. 물론 영혼이 있다고 해서 위정자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고언을 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동안 국민은 마음이 많이 상했다. ‘통합’보다 ‘투쟁’, ‘겸손’보다 ‘오만’, ‘유연함’보다 ‘고집스러움’, ‘프로’보다 ‘아마추어’의 길을 선택한 대통령 때문이다. 특히 그의 품위 없는 언사는 끊임없이 국민의 스트레스를 자극했다. 병원에 가본 사람은 안다. 의사는 비만 때문에 자신의 병원을 찾아온 환자를 보고 “무얼 먹었기에 올챙이배가 됐느냐”며 조롱조의 힐문을 하지 않는다. 또 지방간을 가진 환자에게 “간덩이가 부었다”는 거친 말도 하지 않는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도 자신의 말과 행동에 절제력을 발휘할 줄 안다면, 항차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에 있어섬에랴. 그럼에도 홍보수석은 한술 더 떠 천연덕스럽게 “대통령은 21세기에 사는데 국민은 20세기에 산다”고 했다. 이처럼 대통령에게 ‘노’라고 하지 못하고 ‘예스’만 함으로써 국민의 상처에 수없이 소금을 뿌리고 대선 1주일 전까지도 기자실에 대못질을 하던 강심장의 홍보처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영혼이 없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하다. 정말 홍보처 사람들은 ‘영혼’이 없는 것일까. 혹시 ‘영혼’은 있는데, 그 ‘영혼’을 권력에 판 것은 아닐까.

    지금 홍보처는 자기변명이 아니라 고해성사를 해야 할 때다. 그동안 지은 죄는 참으로 많다. 천장만 바라보다 바닥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권력탐미주의’에 빠져 대통령만 바라보다 국민을 바라보지 못한 죄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임기의 국민보다 5년 임기의 대통령에게 아부한 죄도 있다. 시름에 잠겨 있는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 자신의 정책이 비판을 받을 때마다 서러움을 참지 못한 대통령의 심기를 맞추려고 교언영색한 죄도 있고, ‘국정’은 형편없는데 ‘국정홍보’만 요란하게 한 죄, ‘아파트’와 ‘땅값’은 오르는데 실효성 없는 ‘아파트 정책’과 ‘토지 정책’만 홍보한 죄도 있다.

    미래의 교훈 위해 고해성사를

    또 ‘오믈렛’은 만들지 못하고 ‘계란’만 무수히 깬 정권을 싸고 아마추어 예찬론을 편 죄도 크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죄는 언론과 불화하고 국민과 불화함으로써 정치의 ‘따뜻함’보다는 ‘까칠함’을 보여 준 죄일 것이다. 이런 죄들은 홍보처가 폐족(廢族)이 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 만큼, 미래의 교훈을 위해서도 고해성사는 필요하다. 우리는 홍보처가 ‘국민 프렌들리 기관’이 되지 못하고 ‘대통령 프렌들리 기관’이 된 것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있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없어질 홍보처를 생각하면 사후검시와 같은 의미겠지만, 죽더라도 그 장기는 새 정권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이어가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