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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백년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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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백년의 신화'. 국립현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엘 가 보았다.
미술은 말할 것도 없고 미술평론 같은 고상한 장르엔
100% 문외한인 필자지이만,
화가 이중섭에 앞서 인간 이중섭이 남기고 간
음울한 삶의 그림자만은 필자의 마음을 질식시키고도 남았다.
고작 41년의 짧디 짧은 생을 저렇게 마감할 바에야
왜 굳이 이 세상에 태어났단 말인가?
프랑스에서 반 고호의 무덤을 보러 갔을 때도 그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이 온통 도로(徒勞)였다는 뜻은 아니다.
시종 암울한 느낌을 가지고 전시실을 서성이다가
그래도 그가 남긴 마지막 시기의 한 마디가 필자의 마음에
"저거다" 하는 공명(共鳴)을 일으켰다.
"나는 세상을 속였다. 마치 무엇이 될 것처럼 설치고..."
이걸 사람들은 혹시 절망의 표현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 자신도 절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서 이 말을 내뱉었을지 모른다.필자는 그러나 그의 이 말에서 이중섭이 드디어 바닥을 쳤구나 하는
돌파(突破) 감 같은 걸 느꼈다.
절망의 벽에 부딪혀 꽝하는 천둥소리가 나는 그 순간
번쩍하고 흑암(黑暗)을 가르는 한 줄기 깨침의 섬광(閃光).
바닥을 치면, 아니, 바닥을 쳐야만 구도자는 비로소 진짜로 태어나는 법이다.
원효대사도 거렁뱅이 노릇의 바닥을 치고서야
마침내 저 심오한 화엄의 세계를 발견하지 않았던가?
석가모니도 보리수 아래의 깨침을 하기까지는 오랜 시행착오가 있었다.이중섭은 그래서 더 불행하고 불운한 예술가라고 느꼈다.
아니, 거기까지 갔으면 더 진지하고 영롱한 예술혼으로 올라갈 수 있었으련만,
아뿔싸, 그만 병마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적십자병원에서 쓸쓸히 '무연고자'의 죽음을 맞이했다.
반 고호에겐 그래도 임종을 알릴 아우라도 있었는데.
어차피 그 이후의 속편일랑 다음 생에서나 이어 쓰려 했던가?예술적으로는 필자는 모른다.
하지만 그만의 독특한 '은지화(銀紙畵)'만은 며칠이 지나도록 눈 앞에 삼삼했다.
양담배를 쌓았을 법한 조그만 은지에 칼끝으로 그렸을 그 그림들이
만약 거대한 벽화라면? 그도 벽화를 생각하고 은지화를 그렸다고 하지만
"그가 정말로 그런 벽화를 그렸다면 아마도 수 천 년 후에는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만큼이나 유명해졌을 것이다..."라는 공상을 해보았다.
그 만큼 그의 은지화는 독특한 장르라고 느꼈다.
누군가가 그걸 이어도 좋으련만 아직은 그 후배가 없는 것 같다.종이나 화구도 변변히 없었을 그 가난한 피난시절
이중섭은 양담배를 둘둘 말고 있었을 그 조그만 은지에서
“저것도 예술을 위한 질료”라는 강렬한 영감을 얻었던 것 같다.
그렇다.
예술도, 철학적 사유도, 역사적 상상력도, 도덕적 결단도, 정치사회적 헌신도
그것이 참으로 절절한 진정성과 절박함을 가질 때는
온 세상 만물이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어느 것 하나 도(道)의 그릇이 아닌 게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은지를 발견했을 때의 이중섭의 심정이 아마도 그런 것 아니었을지?인간은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 아니라 성인군자라 할지라도
가장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사랑할 때
가장 아름답게 보이고, 신뢰성이 있어 보이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중섭은 그래서 아내와 아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가장 친근한 사람으로, 가장 부담 없는 사람으로 다가 온다.
두 시간이면 날아갈 일본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들을 만나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의 편지들은 언젠가는 필자 같은 ‘무연고자’ 대중도 볼 것이라고 예감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조신하고 우아하고 잘 다듬어지고
반듯한 예절을 갖춘 문장을 구사했단 말인가?
그는 그 편지 문투 안에선 결국은 한 사람의 교양 있는,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그의 그런 측면이 좋았다.
필자는 데카당(decadent)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전시관 밖 덕수궁의 하오는 눈부셨다.
이 아름다움은 그 누군가, 이중섭 같은 탁월한 영혼이 감내한
어둠의 대가(代價)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상(感傷)이겠지,
그러나 어쨌든 미안합니다, 이중섭 영가, 이런 화창함을 혼자서 만끽해서...(蛇足 : 더군다나 저 궁궐 처마 밑에선 반세기 전에
서울대 신입생 셋이서 사진을 찍었던 곳이다.
그 사진을 필자는 아직도 스마트폰 갤러리에 간직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지금 바로 그 자리를 지나치고 있고,
둘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