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 길지만 우선 인용을 하나 하고 이야기를 하려 한다.

    장로교신학대학 김철홍 교수가 국사교과서를 둘러싼 작금의 [문화 전쟁]에 관해 피를 토하는 모습으로 쓴 세 번째 글(뉴데일리 <박원순이 한강에 괴물 조형물을 만든 이유>) 중 한 대목이다.
    이 인용문에 나오는 박영이란 사람은 장신대 재학생으로 김 교수의 글에 대해 비판적인 댓글을 단 사람이고,
    [통진 소녀]라는 이름은 최근 정부의 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에 반대해 시위를 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을 외친 고등학교 여학생이다.
 
아래 인용한 박영과 [통진 소녀] 사이의 대화는 실제상황이 아니다.
박영의 비난 댓글에 대해 김 교수가 [통진 소녀]의 입을 빌려 재반박한 일종의 [설정](設定)이다.
김 교수에 대한 박영의 비판은 "좌경적 교과서라도 다양성의 요청에서 그냥 놓아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교과서로 가르친다 해도 청소년들이 결코 좌경화 되지 않을 만큼 오늘의 한국사회에선 이념의 규정력(力)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 교수더러 "너무 난리치지 말라"는 투로 나무라고 있다.
 
박영의 이런 비판에 대해 김 교수는 "오늘의 '혁명적 좌파'의 문화공작과 그 영향력을 과소평가하는 박영의 낙관론인지 비관론인지는, 뭘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리"라는 것, 그리고 "이것은 [통진 소녀]의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 운운의 사례만 보아도 이내 알 만한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박영: “단순히 나열된 단어들과 좌편향된(?])시야가 과연 중고등학생들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통진 소녀: “네, 영향을 줍니다. 저를 보시고도 모르시겠어요?”
 
박영: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도 해석하지 못 한 부분을 중고등학생들이 그 뜻을 파악하고 해석하여 계급투쟁을 꿈꾸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야겠다는 의식화 교육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통진 소녀: “네, 가능합니다. 오빠는 지금 중고등학생의 이해능력을 우습게 보는 거 같은데요? 저는 교과서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석하고 있고, 계급투쟁을 꿈꾸며,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고 있어요, 오빠.”
 
박영: “좌파 지식인들이 의도한 의식화 교육이 실패나 마찬가지란 소리입니다. 왜 그럴까요? 중고등학생들에게는 그것을 해석할 시간적 여유와 심화적인 학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의 교육은 철저한 입시위주의 교육이지, 그런 스스로 생각을 할 시간과 수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게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입니다.”
 
통진 소녀: “그렇지 않아요, 오빠. 스스로 생각할 충분한 시간과 수업이 제공되고, 심화된 학습이 이미 잘 되었어요. 제가 보기에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을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은 김철홍 교수가 아니라 오빠예요.”
 
박영: “이념전쟁은 끝이 난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서 자라난 저와 같은 20대는 아무리 자본론을 연구하고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혁명을 꿈꾸는 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이미 맑시즘의 한계와 효용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시대가 체득하게 해주니까 말이죠.”
 
통진 소녀: “이념전쟁이 끝났다고요? 누가 그래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전쟁은 지금 진행형입니다. 마르크시즘의 효용은 제가 저절로 체득하게 된 게 아니죠. 선생님들이 잘 가르쳐주셔서 아는 겁니다. 참고로 저희 학교 역사 선생님 두 분은 전교조 소속 이예요. 마르크시즘의 한계라고요? 그런 건 없어요. 혹시 오빠도 ‘강력한 힘을 가진 부르주아’?”
 
필자가 김 교수의 글 한 대목을 이렇게 길게 인용하면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박영 학생의 댓글과 (또는 인용문 속 박영 학생의 주장과) 이에 대한 김 교수의 (또는 인용문 속 [통진 소녀]의) 반박이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을 너무나 절실하게 전형화(典型化)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필자 자신이 박영 같은 논리에 대해 항상 느끼고 있던 바를 김 교수가 너무나 똑같이 느끼고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반가움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래 그런지 김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필자의 입에선 "그렇지, 그렇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 ▲ ⓒ유튜브 캡처화면
    ▲ ⓒ유튜브 캡처화면
     
    우리 주변엔 박영 같은 논리가 도처에 많아도 아주 많다.
    박영 같은 논리는 어떤 것인가?
    그의 논리는 우선 소위 말하는 극좌는 아니다.
    본격적인 의미의 좌익도 아닐 수 있고, 그런 좌익이 될 덩치도 되기 어렵다.
    본격적인 좌익은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많고 깊은 독서를 해야 하고, 사회과학 이전에 일정한 철학적 훈련을 거쳐야 하고, 이른바 '투쟁'의 실제상황 속에서 단련을 받는 시행착오도 해 봐야 한다.
     
    요즘 세대는 그러나, 우선 책을 읽지 않는다.
    이러면서 그들은 이념교사, 이념 교수, 이념구호, 이념 이벤트, 이념 대중연예, 이념 미디어, 이념 종교인, 이념 스타, 현실적 불만, 그리고 마침내는 이념 국사교과서의 글과 말과 비디오-오디오, 광고, SNS를 접하면서 슬슬 "그쪽이 유행이자 대세이며 사부(師父)이고 '구루(guru)'이며 또한 [이문 남는 쪽]"이라고 믿기에 이른다.
     
    거기다 용어상으로도 [보수] 하면 어째 고루하고 더럽고 거드름 피우고, 썩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느껴지고, [진보] 해야만 어딘가 신선하고 약자 편이고 최신의 것이고 젊은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 연예인과 인기 교수와 그럴 듯해 보이는 종교인과, 대박 낸 영화와, 이마에 띠 두르고 수염 덥수룩한 [운동가]가 연단에 올라 주먹을 불끈 쥔 채 "투재애~~애앵 !!!!" "진보오~오오오!!!" 하고 사자후를 터뜨리면 "아, 저거구나!!" 하고 뿅 가는 것이다.
     
    투쟁 용어 역시 [자유민주/시장경제] 어쩌고 하면 영 심심하고 밋밋하고, 간에 기별이 가지 않는데 반해, [민족해방/계급해방/민중해방] 어쩌고 하면 어쩐지 으스스 해지면서 스릴이 느껴지고 근사한 감이 든다.
    아,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민족을 위해, 약자를 위해, 평등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하는 데야, 짧은 밑천에 뭐라고 반박한단 말인가?

    그래서 적잖은 청소년들이 짧은 기일 안에 "난 이제 모든 걸 알아 뻔졌다"며, 마치 도통(道通)이라도 한 양 두 눈이 번쩍 띄는 기분이 되는 것이다,  
    21세기 한국 판 [깡통 진보] [얼치기 좌파]가 태어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한국의 경우에도 착실히 진행돼 왔다.
    처음엔 대중문화로 시작해 이벤트로 가서 광장으로 갔다가 드디어 역사관으로까지 왔다.
    1980 년대부터 [워밍업]을 한 30~40년 하다가 이제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반(反)민족적, 제국주의 앞잡이" 라는 것을 드디어 공교육 차원에서도 [정설(定說)]로 굳힐 총괄단계에 이르렀다는 선언이다.
     
    문제는 이 과정과 결과가 너무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진행되고 주입되고 축적되었기 때문에, 제법 배웠다는 친구들조차 자신의 인식과 감각과 미(美)의식이 실은 체제변혁의 문화이론-사회과학-역사관에 물든 [편향되고 당파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이게 보편적이고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움 그 자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100이면 100이 모두 [유사-아류 홍위병]처럼 되는 건 아니다.
    그 중 상당수 또는 다수는 [강남 리버럴]이 된다.
     
    왜 [강남 리버럴]이 되는가?
    한 마디로 안토니오 그람지의 이론 맞다나, 급격한 [와장창 혁명] 이론이 아니라, 지극히 완만하고 감성적이고 문화적이고 절충적인 묘약(妙藥)으로 변혁이론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주입받고 내면화했기 때문에 그런 어정쩡한 유형이 되는 것이다.

    그람지 진지(陣地)론의 한 파생물인 셈이다.
    "나는 좌파는 아니고 [자유로운 지성인]일 뿐..."이라고 자처하면서, 그러나 막상 싸움이 왕창 붙으면 [좌파 친화적인(Left friendly)] 입장에 서는 유형인 것이다.
    그것도 선진 자유국가 정치의 한 축(軸)인  [민주적 좌파]에 대해 친화적인 것이라면 또 모른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론 한국 좌파 운동권은 NL(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등, 전체주의적 좌익에게 거의 먹혀버렸는데도 말이다. 
     
    자신들은 언제나 소(小) 부루주아로서 [즐김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 머리와 입으로는 자기들보다 오른 쪽이면 경멸해 주고, 왼 쪽이면 전체주의적이라 하더라도 가산점을 주는 게 멋쟁이이고, 먹물 들어 보이고, 예쁘장한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유형-이런 타입이 우리 주변엔 정말 흔하다.

    특히 486 가운데, 학생 때 겁이 나 데모는 못하고 좌익으로 갈 만 한 크기의 간(肝)도 가지지 못했고, 그렇다고 [보수-우익] 소리만은 절대로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유형인 셈이다.
    이런 유형의 존재 자체를 나무라는 게 아니다.
    자유사회의 멤버십엔 이런 스펙트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 나름의 몫과 역활도 있다.  
    다만 그러나 이런 유형이 내세우는 [이론]과 [논리]와 [명분]에는 [실제적]이 아닌 [관념적]인 데가 있고, 그래서 곧잘 허위의식 같은 게 묻어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런 [관념적] 논리 중 한 가닥이 바로 "다양성을 위해 국정화는 안 되고, 설령 [문제 있는 교과서]라 할지라도 그냥 가르치게 내버려 둬야 하며, 그냥 내버려 둬도 아이들이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것"이라면서, "내가 국정화론자들 너희보다 훨씬 더 지적(知的)-미학적-시류(時流)적으로 우월하다"는 투로, 자기가 보기에 참으로 무식하고 고루하고 구제불능의 [보수꼴통]을 향해 비웃으며, 놀리며 한 마디 척 던지는 전형적인 [강남 리버럴] 스러운 논리다.
     
    정말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은 것일까?
    필자는 괜찮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박영 학생의 말처럼 "그냥 내버려 둬도 영향력이 없다"고 가정을 한다 해도, 지금의 국사교과서들은 좌파이기 전에 [거짓]이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둬선 안 된다.

    공교육 현장에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거짓을 가르친 다는 것은 교육의 근본을 파괴하는 [악덕]이기 때문이다.
    이게 영화인가?
    코미디인가?
    픽션인가?

    아니다.
    이건 교육이다.
    교육의 으뜸가는 요건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이 [!+!=3]이어선 안 되고 반드시 [1+1=2]라야 한다는 것이다.
     
    "분단의 책임은 이승만의 정읍발언이었다" "6. 25는 수많은 소규모 충돌의 연장선상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하면 그건 순, 새빨간 거짓말(1+1=3)이다.

    "분단과 단독정권 수립은 '북조선 인민위원회' 수립이 먼저 한 것" "6. 25는 김일성이 스탈린, 마오쩌둥의 재가를 받아 남침한 것"이라고 말해야 그게 참말(1+1=2')이다.

    스승이라면 교단에서 마땅히 1+1=2라고 가르쳐야 옳다.
    이래서 현행 국사교과서는 공교육 현장에서 가르쳐선 안 된다.
    좌니 우니 하는 건 그 다음 순서다.
     
    이런 원칙은 제쳐둔 채, 참과 거짓을 '다양성'이란 명분으로 대등하게 일렬횡대로 세우려는 것은, 그리고 그렇게 해도 아무런 영향력 없으니 신경 끄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너무 피상적인 관찰일 수 있다.
    김철홍 교수의 세 번에 걸친 글 가운데 가장 최근 것을 읽고 적어보는 감상문이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