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의 유쾌한 바람끼? 박근혜의 통 큰 정치?
  • <윤창중 칼럼세상> 

     심상정의 유쾌한 바람기(氣)

     
    발칙하다, 심상정! 새누리당이라는 적진(敵陣)에서 주최한 원외 당협위원장(옛 원외 지구당위원장) 워크숍에 초청 연사로 찾아가 박근혜가 빨간 색 셔츠 입고 활짝 웃으며 손 흔드는 대형 걸개그림 밑에서 자신도 웃으며 ‘대선의 시대정신’에 대해 논하는 진보당 전 대표 심상정. 조선일보 사진기자 이준현은 기 막히는 장면을 포착했다. (오늘자 조선일보 2면)

  • 심상정? 기회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보수우파 세력을 향해 복창 질러대는 소리 해대는 바람에 보수우파 진영에서는 ‘국민 밉상여(女)’로 찍혀있지만, 오늘만큼은 여야를 넘나들면서 뭔가 대한민국을 바꿔보려는 진정성 있는 여장부(女丈夫)로 새삼 눈에 들어온다.

    대한민국 정치, 특히 진보니 뭐니 하는 정치인들은 되지도 않는 진영논리에 붙잡혀 정말 짜증나게 할 때가 태반이지만, 심상정의 발칙한 외출을 보면서는 그의 진정성이 짠하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아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 정치를 관찰하는 직업을 포기하기 어려운 건 역시 이런 짜릿짜릿한 장면이 그래도 가끔 나오기 때문에 이걸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에서 아닐까? 고기 잡히지 않는 호수인줄 뻔히 알면서도 낛싯줄 늘여놓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강태공의 심정이라 할까. 이런 내 삶은 30년을 넘어 또 한해 그렇게 지속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왜 새누리당은 심상정을 연사로 불렀고, 심상정은 응했는가? 정말 재미있는 상상을 할 수 있다. 정치는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심상정이 순수한 마음에서 그 자리에 갔다?

    대학 운동권 시절부터 머리띠 두르고 길바닥에서 드러누워 데모하다가, 정치판에 들어와서도 산전수전 다 겪으며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진보당 당대표하고, 국회의원 재선까지 해 이 자리에까지 올라 선 심상정이?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그 속 마음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복선이 숨어있다고 봐야 한다! 엄청난 계략이!

    그게 뭘까?

    두 가지 포인트에서 심상정의 이번 새누리당 외출은 의미심장!

    첫째, 그가 한 강연의 골격.

    “최근 새누리당이 여러 정책 변화를 말하고 박근혜 후보가 통합을 위한 폭넓은 발걸음을 하고 있다.”

    이건 심상정으로선 엄청난 변화! “재벌 개혁, 비정규직 문제 해결, 정치개혁을 위해 현재 권력인 박근혜 후보가 과감히 나서는 용단을 보여 달라”고 했다.

    완전히 ‘여야의 틀’을 허무는 심상정의 거침없는 조언! 더 들어보자. 박근혜의 과거사 발언에 대해서는.

    “과거에 집착하고 합리화하는 모습을 보여 미래를 선택하려는 국민에게 큰 실망을 줬다.”

    둘째, 왜 심상정이 거기에 갔는가?

    심상정, 노회찬, 유시민은 지금 ‘종북(從北) 통합진보당’으로부터 탈당할 타이밍을 찾고 있는 중!

    이 대목을 유심히 봐야한다! 이 대목을! 정치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는 말을 새삼 기억하면서.

    심상정 같은 산전수전 다 겪은 정치인이 자기 진영의 엄청난 반발을 뻔히 예상하면서도 순진무구하게 새누리당 진영에 걸어가 강연을?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 1980~90년대 ‘일본 사회당 재건의 마돈나(Madonna)'를 떠올려본다.

    1989년 일본 도쿄의 뉴 오타니 호텔에서 열린 ’김영삼 민주통일당 총재 환영 리셉션‘에서 일본 사회당 당수 도이를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61세, 11선 의원, 일본 최초의 사회당 여성 당수-도이는 그야말로 여장부였다.

    남성 주도의 일본 정치 무대에서 여성파워를 과시하는 당당하기 그지없는 도이. 그 해 그가 이끄는 ’만년 미니야당‘ 사회당은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의 과반수 획득을 일격에 저지한데 이어→이듬해 중의원 선거에서는 사회당의 의석수를 두 배로 늘려 집권 자민당의 55년 장기집권에 종말을 고해놓았다.

    도이가 이 때 한 유명한 말.

    “산(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도이 당수가 대한민국의 ’보수우파 정객(政客)‘ 김영삼을 전격 초청해 당시 동북아 정세를 압도했던 냉전의 벽을 허물었다.

    도이 당수는 여세를 몰아 1993년 ’자민당+사회당+신생당‘을 엮는 3당 연립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해 사회당 출신인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를 총리로 만들고 자신은 여성 최초로 중의원 의장이 됐다.

    적(敵)과의 동거(cohabitation)! 물과 기름의 거대한 융합(fusion)을 정치판에서 만들어 냈다. 이게 정치엔 불가능이 없다는 정치의 묘미!

    새누리당의 심상정 초청은 옛날 상도동 YS계인 친박계 이성헌의 발상이었다는데 아주 발칙한 상상력이고, 거기에 전격 응한 심상정도 대단한 담력일 뿐만 아니라 탁월하게 모험적인 정치인이다. 다시 보게 됐다.

    물론 박근혜가 이성헌의 발상을 ‘재가’했기 때문에 이것 또한 흥미로운 대목이다. 

    ‘새누리당+심상정을 포함한 진보 알파세력’을 엮는 일종의 ‘정책 연합’이나 ‘연정 구상’, 이 걸 절묘하게 굴려가다 보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큰 획을 긋게 될 작품이 충분히 탄생할 수 있다.

    잘만 만들어 가면 ‘안철수+민주당 대선후보’ 간 단일화 효과에 맞설 수 있고, 그것보다 더 흥미롭고 극적인 드라마가 나올 수 있다. 심상정의 유쾌한 바람기(氣), 기대해보자.

     

    윤창중 칼럼세상 대표/칼럼니스트/전 문화일보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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