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마침내 고국에 반환될 것으로 알려진 이천항교 오층석탑이 미술사의 시각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4년 무렵 이후다.

       그해 미술사학자인 정영호 현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장이 이 탑을 다룬 글을 발간한 데 이어 1996년에는 도쿄에서 발행되는 한글잡지 '월간 아리랑' 역시 이 탑을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이를 계기로 2003년 마침내 이천 현지에서 석탑이 불법적으로 약탈된 것이니 이를 환수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런 움직임은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이 2006년 5월 방영된 MBC '느낌표'에 출연해 이 탑을 소개하면서 이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다시금 가속화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 일본 도쿄의 오쿠라 호텔 미술관 뒤편 마당에 서 있는 이천 향교방5층석탑의 모습.

       하지만 이 탑이 학계에 공식 데뷔한 시기는 이보다 훨씬 빨라 조선총독부가 1916년에 펴낸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蹟調査報告)-다이쇼(大正) 5년도'라는 한국문화재 조사보고서에 이미 이름을 올린다.

       이 보고서 105쪽에는 "(경기 이천) 향교 인접 지점에 탑 2기가 있으니 (그 중) 하나는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이건(移建. 옮겨세움)하고 3층탑 1기만 남았다"고 했다.

       이 보고서 외에도 다른 관련 문건을 종합해보면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겼다는 석탑은 1915년 9월10일 이후 같은 해 11월30일까지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총독부 '시정(施政) 5년 기념 공진회(共進會)' 행사장 장식을 위해 경복궁으로 옮긴 것으로 드러난다.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시정)가 5년 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한 박람회(공진회) 자리를 '빛내고자' 제자리를 떠난 것이다.

       그런 탑이 결국 당시 일본의 저명한 실업가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의 수중에까지 들어간다. 오쿠라재벌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문화재 수집광이기도 했다.

       그의 수집품은 1917년 도쿄에 개관한 사설 박물관인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이란 곳에 기증된다. 이 박물관은 일본 최초의 사설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은 박물관 설립 이후에도 여전해 1918년에는 마침내 한국의 석탑에도 관심을 표명하기에 이른다.

       오쿠라는 그해 7월21일 지금의 문화재위원회 정도에 해당하는 조선고적조사위원회 앞으로 조선 문화재를 내지(內地), 즉, 일본으로 가져가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낸다. 그가 요청한 반출 대상은 평양정거장 앞에 있는 육각칠층석탑이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퇴짜를 맞는다. 하지만 그가 워낙 재계의 거물이었기 때문인지 고적조사위원회는 같은 해 10월3일 회의에서 평양 석탑 대신 경복궁으로 옮겨다 놓은 이천 석탑을 가져가라고 결정한다.

       이에 따라 이천향교 오층석탑은 인천세관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되고 지금은 도쿄 시내 오쿠라슈코칸 건물 뒤편에서 평양 율리사 터에서 반출한 같은 고려시대 석탑인 팔각오층석탑과 나란히 서게 됐다.

       고적조사위원회는 왜 평양석탑 대신 이천석탑을 가져가라고 결정했을까.

       황 소장이 이끄는 문화유산정책연구소가 최근 펴낸 '이천 오층석탑 환수를 위한 연구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 탑의 학술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다른 석탑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한다.

       즉, 당시 고적조사위원회에서는 "우수한 석탑이 많은 조선에서 (이천석탑을) 특히 박물관에 보존하여 진열품의 하나로 헤아림은 오히려 적당하지 못한 감이 있다"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보다 더 뛰어난 석탑이 조선에는 많으므로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두고서 계속 전시할 만큼 학술적 가치는 크지 않으니 일본으로 반출해도 그다지 문제가 없다는 의미다.

       그렇게 처량하게, 그리고 강제로 고국을 떠난 이천석탑이 이번에 정말로 돌아온다면 제자리를 찾는 데 무려 80년 이상이 걸리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