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언론인들의 소련을 위한 간첩 행위 실태 보고

    美 오하이오 주립대 알렉산더 러브레이스 교수의 寄稿
    "스탈린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하탄 계획’의 진도에 관하여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보다 앞서서 보고받고 있었다."

    이동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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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언론에 침투한 소련 간첩들의 활동에 관한 새로운 보고서 -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알렉산더 러브레이스(Alexander G. Lovelace) 교수는 동유럽의 군사분야 전문 계간지(季刊誌) 최신호(2015년 7월1일자)에 게재된 '언론계의 스파이들: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및 냉전 초기 미국 언론기관에서 암약한 소련의 간첩들'(Spies in the News:Soviet Espionage in the American Media during World War II and the Beginning of the Cold War)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일반에서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미국 언론인들이 이 기간 중 소련을 위한 간첩 행위에 종사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소련의 존속 기간 중 소련을 위한 간첩 행위에 종사한 미국 언론인들의 숫자가 대단히 많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의 간첩 활동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끼친 위해(危害)를 수량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이 소련의 사용자들에게 전달한 정보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기간 중 미국과 미국의 연방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소련을 위한 간첩 행위를 자행한 미국 언론인들 가운데 일부는 미국 정부의 최고위층에게까지 접근할 위치에서 이적성 정보들을 소련 당국에게 제공한 것이 사실이었다.

    러브레이스 교수가 인용한 소련의 정보소식통에 의하면 1941년 6월에 22명의 미국 언론인들이 소련을 위한 간첩 행위에 종사하고 있었다. 러브레이스 교수는 당시 소련을 위하여 활동한 미국인 간첩들 가운데 언론인 출신의 숫자는 기술자 출신에 이어 두 번째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그에 의하면, 소련에게 봉사했던 미국 언론인 출신 간첩들의 숫자는 1941년 이후 증가했다.

    소련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때부터 전 세계의 언론인들을 간첩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KGB는 1930년대에 미국의 사회당 기관지 'The Call'(부름)의 기명(記名) 기고가(寄稿家) 로버트 알렌(Robert Allen)과 존 스피바크(John Spivak)를 간첩으로 고용했다. 러브레이스 교수에 의하면, “미국의 언론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단순한 하수인이 아니었다. (미국의) 언론인들이 소련에게 엄청난 양의 비밀정보를 제공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많이 있으며 이들의 이같은 정보 제공 행위는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더불어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더욱 늘어났다”는 것이다. 러브레이스 교수에 의하면, 특히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소련이 이같은 방법으로 입수한 정보는 미국의 전쟁수행에 극도로 유해한 것이었다.

    여기서 특히 유념할 일은 그 당시 미국 정부와 언론 사이의 관계는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당시 미국 정부 기관들은 신문기사의 ‘배경 자료’로 많은 비밀 정보자료를 정기적으로 언론인들에게 브리핑해 주고 있었다. 당시의 미국 언론인들은 프랑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소아마비로 인하여 이미 수년 전부터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정보기관 KGB는 이때 이미 미국 정부와 언론 사이의 이같은 밀월(蜜月)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많은 정보를 입수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KGB는, 미국의 경우 언론인들이 각계의 모든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나서 아무런 의심 없이 무슨 문제도 물어볼 수 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1941년에 있었던 KGB의 한 내부 보고 문건은 KGB가 고용하고 있었던 미국 언론인들이, 많은 경우, '고도의 지적 수준을 보유하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었다. 그들은 1920년대부터 30년대 사이의 미국 언론인들은 다른 많은 미국인들과는 달리 대학을 다녔을 뿐 아니라, 대부분 일류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 소련 KGB가 고용한 미국 언론인 간첩들은 바로 이같은 학력 때문에 학창 시절부터 장차 사회 각 분야에서 고위급 직책을 떠맡게 될 사람들과의 교분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예컨대, 주간 <타임>(Time) 지는 소련의 간첩들 및 親蘇 인사들의 소굴이었다. <타임> 지의 편집기자였던 휘타커 챔버스(Whittaker Chambers)는 한때 소련의 간첩이었지만 뒤에 용감하게 전향(轉向)한 사람이다. 그는 <타임> 지의 편집방향이 지나치게 친소적이라고 불평한 것 때문에 주변의 친소 인사들과의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역시 <타임> 지의 편집기자로 소련의 간첩이었던 존 스콧(John Scott)이 그를 파면시키려 기도하기도 했다. 같은 잡지의 기자였던 스티븐 레어드(Stephen Laird)는 유럽 지역에서 활동하던 다른 언론인들의 동태를 사찰하여 KGB에 보고했다.

    역시 <타임> 지의 리차드 로터바크(Richard Lauterbach) 기자는 1940년에 발생한 '카틴(Katyn) 숲의 학살(虐殺)' 사건을 독일군의 범행으로 왜곡하는 기사를 보도함으로써 KGB로 하여금 기뻐하게 만들었다. 문제의 '카틴 숲의 학살'은 실제로는 소련의 비밀경찰이 무려 2만 명의 항복한 폴란드군 장교들을 집단 학살한 사건으로 1944년에 그 전모(全貌)가 드러난 사건이었다. 챔버스는 로터바크의 사실을 왜곡한 기사 가운데 몇 건은 보도되지 않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한 달 전에 <타임> 지의 레어드 기자는 그의 소련측 고용자에게 “미국 외교관들이 소련에게 적대적”이라고 보고했다. 레어드 기자를 인용한 KGB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 외교관들은 “이번 전쟁에서 소련을 지원하는 것은 공산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에 앞서 KGB는 미국의 언론인 간첩들에게 미국인 가운데 영향력이 있는 고립주의자였던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와 나치 독일에 동정적인 조셉 케네디(Joseph P. Kennedy, Sr.) 전직 대사 및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전 대통령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요구하기도 했다.

    이 무렵 KGB가 미국 언론인 간첩들을 통하여 수집한 정보 중에는 아직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전 대통령의 어록(語錄)도 있었다. 이에 의하면, 트루먼은 모두 전체주의 국가였던 소련과 독일에 대하여 똑같이 적대적이었다. 트루먼은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미국은 두 나라 가운데 약한 쪽을 지원함으로써 두 나라가 서로 가능한 최대한의 인적·물적 피해를 상대방 국가에게 가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 KGB는 트루먼이 1945년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그 같은 견해를 아직 유지하고 있는지를 궁금하게 생각한 나머지 월간 '네이션' 지의 기고가 이시도르 스톤(Isidor F. Stone)과 전설적인 방송 평론가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을 비롯한 몇몇 미국 언론인들을 상대로 그들과 트루먼 대통령 사이의 관계와 함께 트루먼 대통령의 배후 세력 등을 캐묻기도 했다.

    KGB는 특히 젊은 시절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월터 리프만을 한때 사실상 간첩으로 활용했었지만 1930년대에 들어와서 그가 사회주의를 배척하자 그를 단념하고 그 대신 그의 비서였던 매리 프라이스(Mary Price)를 매수하여 그녀를 간첩으로 고용했다. 리프만과 그밖의 애국심을 보유한 일부 언론인들은 KGB에 고용된 다른 미국 언론인들과 정보교환을 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중에 많은 전략 정보를 소련이 입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소련은 소련이 고용한 미국 언론인 간첩들을 통하여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 한 달 전인 1944년 5월에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사이에 '전후 독일 처리' 문제를 싸고 언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시카고 선>(The Chicago Sun)의 토마스 레이놀스(Thomas Reynolds) 등 루스벨트 대통령과 가까웠던 일부 기자들은 무의식중에 소련의 간첩들에게 독일 점령 계획을 유출시키기도 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하탄 계획’(Manhattan Project)의 진도에 관하여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보다 앞서서 보고받고 있었다.

    <뉴욕 헤랄드 트리뷴>(New York Herald Tribune)의 피터 로드(Peter Rhodes) 기자나 <부루클린 데일리 이글즈>(Brooklyn Daily Eagle)의 윈스턴 버데트(Winston Burdett) 기자 같은 사람들은 핵심적인 소련 간첩들이었다. 특파원으로 핀란드와 유고슬라비아 및 터키의 전장을 누비는 동안 버데트 기자는 시종 KGB를 위한 간첩 행위를 동시에 수행했다. KGB는 로드 기자를 가리켜 '우리의 매우 소중한 자산'이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소련의 고정 간첩으로 일하는 동안에도,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에드가 후버(Edgar Hoover) FBI 국장에게도 매일 정보 보고를 하고 있었다.

    '후작'(Marquis)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던 <아메라시아>(Amerasia) 지의 조셉 밀톤 번슈타인(Joseph Milton Bernstein) 편집인은 미국 정부의 기밀문서들을 입수하여 소련군 첩보기구인 GRU에 정기적으로 제공했는데 그가 넘긴 기밀문서에는 중국에서의 미군의 동향, 중국(자유중국) 대사관의 무역 관계 보고서, 동부 전선에 배치된 독일군 규모 및 소련 블라디보스톡의 경제 상황 분석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번슈타인은 또한 미국의 對 영국령 인도 정책에 관한 토의 내용과 미국의 군사 계획에 관한 정보 및 중국 국민당군과 일본군의 전력에 대한 평가 내용들도 소련측에 넘겨주었다. 번슈타인의 간첩 조직에는 언론인 비쏭(T. A. Bisson) 및 <아메라시아> 지 창간인 필립 재피(Philip Jaffe)와 그의 수하 2명의 사서직(司書職)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CIA의 전신인 OAS는 <아메라시아> 지 사무실을 급습하여 수백 건의 미국 정부 기밀문서들을 발견하여 압수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실제로 사회주의자였던 존 리드(John S. Reed)와 같은 자들은 고용된 간첩이기보다는 소련의 기만적인 선동·선동 활동의 하수인으로 활동한 자들이었다. 리드가 저술한 소련의 ‘10월 혁명’ 목격담인 '세계를 격동시킨 열흘'(Ten Days That Shook the World)이라는 책은 최소한 좌익 세력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소련에 대한 이미지를 높여주는 데 공헌했다. 그의 공을 기린 소련 당국에 의하여 그의 시신이 모스크바 크레믈린 공원묘지에 안장된 리드의 생애는 소련이 1981년에 제작, 보급한 영화 'Reds'(공산주의자들)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의 미국인 아내로 역시 공산주의 동조자였던 루이스 브라이안트(Louise Bryant)는 미국을 순회하면서 공산주의를 선전했고 1917년 10월 혁명과 때를 같이 하여 러시아에서 발발한 내란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의 월터 듀란티(Walter Duranty) 기자는 소련의 10월 혁명을 옹호하기 위하여 소련에 관한 왜곡된 기사를 작성하여 보도하는 것을 일삼았다. 스탈린이 1930년대에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극의 일환으로 엄청난 기아(飢餓)를 불러일으켰을 때 듀란티는 적극적으로 스탈린을 옹호했다.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발했는데도 스탈린은 이를 가리켜 “우리 체제의 사소한 부작용”이라고 호도했는데 이 무렵 듀란티도 적극적으로 스탈린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그는 그의 기사에서 “도대체 이 판국에 수백만 명의 인명이 대수냐.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1933년 3월 그는 “(소련에는) 기아로 인한 사망자는 물론 기아 자체가 없다”는 기사를 써서 보도했고 그로부터 수개월 뒤에는 “소련에서 기아가 발생했다는 보도는 과장이거나 악의적인 선전”이라고 주장했다. 듀란티의 이 같은 터무니없는 기사들에 대해서 스탈린이 친히 감사의 뜻을 전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듀란티는 1932년 퓰리처 언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가 받은 퓰리처 언론상은 지금까지도 회수되지 않고 있다.

    미국 언론인들의 좌경화 현상은 오래 된 일이다. 오늘날 그들은 미국의 적들을 선량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을 능사로 하고 있으며 전쟁 중 미군의 행동에 관한 그들의 기사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미국의 전쟁 수행을 훼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경우가 허다하다. 미국 언론인들에 의한 이같은 반역행위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의 ‘구정 공세’ 때 월터 크롱카이트(Walter Cronkite) 기자가 이로써 “미국은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보도하고 <무브온>(Move-on)이라는 TV 방송이 데이빗 페트리어스(David Petraeus) 주월미군사령관을 가리켜 “우리를 배신한 장군”(General Betray-us)라고 비아냥한 것이라든가 줄리안 아싼지(Julian Assange), 브래들리 매닝(Bradley Manning),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 등이 폭로하는 1급 비밀문서들에 관한 언론들의 무절제한 보도 행위 등이 그 사례들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같은 언론의 그릇된 보도 태도가 일상화, 보편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즈>의 경우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 신문은 1971년 미 국방성이 작성한 월남전 경과에 관한 비밀보고서인 '국방성 보고서'(Pentagon Papers)를 임의로 보도함으로써 국가안보의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었다. 최근의 흐름을 보면 이 신문은 미국이 수행하고 있는 범 지구 차원의 대 테러 전쟁 수행을 훼방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2006년 이 신문은 부시(Bush) 행정부의 비보도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의 무허가 통신감청 행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부시 행정부는 통신감청 사실이 공개되면 그 결과로 “간첩 행위 수사에 지장이 초래되고 테러행위 용의자들에게 그들이 조사 대상이 되어 있다고 경고를 해 주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호소했지만 이 호소는 <뉴욕 타임즈>에 통하지 않았다.

    2006년 <뉴욕 타임즈>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및 <월 스트리트 저널>과 함께 부시 대통령의 '테러 행위 지원 금품 추적 계획'의 내용을 공개하여 보도했다. 하원은 이들 신문의 이같은 사실의 공개, 보도 행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피터 킹(Peter King)(공화당·뉴욕 출신) 의원은 이 은 보도 행위에 관련된 기자들을 가리켜 '기밀 사항의 유출 공범'들이라고 호칭하면서 그들은 “만약 앞으로 테러 행위가 자행될 경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05년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 CIA가 이집트와 요르단 및 모로코에서 테러범 심문을 위한 비밀 수용시설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미국 CIA가 이들 소위 ‘흑색(黑色) 시설’들을 운영한 것은 미국 수사관들로 하여금 미국 본토에서 하는 것보다 더욱 적극적 방법으로 테러범들을 심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폭로 보도에 대해서는 워싱턴 내에서 많은 비난이 가해졌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록 이들 미국 언론인들이 의도적으로 적대국이나 테러 조직과 협조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의 불공정하고 선동적인 보도 행위가, 마치 과거 소련에 고용되어 간첩 행위를 자행한 소수의 영향력 있는 미국 언론인들의 행위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국가 이익에 손해를 끼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