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원자로 기공식 반세기 만에… 한국은 原電수출국이 됐다

    김성현 /문화부 기자 E-mail : danpa@chosun.com

    [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18] 쉼 없이 달려온 原電

    原電 잠재력 주목한 이승만
    10달러 써도 결재받던 시절, 6000달러 드는 유학에 투자
    연수생 손에 달러 쥐여주며 "자네들에게 미래가 달렸네" 
    고국 돌아온 國費 장학생들, 원자력院·연구소 이끌어
    1959년 실험용 원자로 기공… 반세기 뒤인 2009년 UAE에 47兆 규모 原電수출

    1956년 7월 미국 전력 산업의 대부(代父)로 불리는 워커 시슬러(1897~1994)가 방한(訪韓)했다. 시슬러는 2차 대전 당시 미 국방부 전쟁물자생산국장을 지냈다. 전쟁 직후에는 유럽의 전력 설비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고 프랑스를 방문했다. 전후 프랑스가 유럽 최대의 전력 강국으로 급부상한 데는 시슬러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시슬러는 디트로이트 에디슨 전기 회사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시슬러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 들고나온 건, 작은 나무 상자였다. '에너지 박스'라는 이 상자에는 미량(微量)의 우라늄과 석탄이 들어 있었다. 시슬러는 상자를 보여주면서 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만한 석탄으로는 4~5㎾의 전기를 생산하지만, 같은 양의 우라늄으로는 무려 200만배가 넘는 1200만㎾를 생산합니다. 석탄은 땅에서 캐는 에너지이지만,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에너지입니다. 한국처럼 자원이 적은 나라에서는 사람의 머리에서 캐낼 수 있는 에너지를 개발해야 합니다."
  • 사진설명=1959년 7월 한국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 기공식에서 이승만(사진 위) 대통령이 직접 삽을 뜨고 있다. 아래 사진은 반 세기 뒤인 2009년 12월 아랍에미리트(UAE)와 원전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상황실에서 한전 직원들이 환호하는 모습. /원자력문화재단 제공

    시슬러의 설명에 놀란 이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을 추진할 방법을 물었다.
    시슬러는 "당장 50여명의 젊은 과학기술자를 해외에 보내 교육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며 "원자력 문제를 전담하는 행정기구와 연구개발 기관을 설치하고 인재 양성에 힘쓰면 20년 후에는 원자력 개발이 가능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로 끼니 걱정을 근근이 해결하던 때였다. 당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65달러로 2014년(2만7900달러)의 0.2%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새로운 에너지원의 잠재력에 주목한 이 대통령은 원자력 개발 추진 결정을 내렸다.
    1956년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의 연구 개발과 이용을 전담하는 원자력과를 신설했다.
    이듬해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창립될 당시 한국은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당시 한국은 유엔 회원국도 아니었다.

    이 대통령은 원자력 분야를 공부할 국비 장학생도 선발했다.
    미국 아르곤 연구소에 첫 국비 원자력 연구요원으로 파견된 윤세원·김희규 등을 시작으로 230여명이 미국과 영국으로 떠났다. 외환은 단돈 10달러를 쓸 때도 대통령 결재를 일일이 받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10개월 연수 기간에 최소 6000달러가 드는 원자력 유학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연수생들에게 손수 달러를 쥐어주며 "자네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우리나라가 부강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하네"라고 당부했다.

  •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 정부와 학계에 자리를 잡으면서 '과학 한국' 건설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57년 초대 원자력과장에 임명된 윤세원 전 서울대 교수가 대표적이었다. 윤 교수는 서울대에 강의하러 올 때마다 기사가 운전하는 지프차를 타고 왔다. 이 대통령이 윤 교수에게 원자력연구소 부지를 물색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전용차를 배정해준 것이었다. 서울대에 전용차가 있는 교수는 총장뿐이던 시절이라, 윤 교수의 지프차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이승만 정부는 1958년 원자력법이 제정되자 이듬해 원자력 정책을 담당할 기구인 원자력원(院)과 연구 기관인 원자력연구소를 만들었다. 불교계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로 문교부 장관을 지낸 김법린(1899~1964) 선생이 초대 원자력원장에 임명됐다. 문교부 기술교육국장을 지낸 물리학자 박철재(1905~1970)씨는 초대 원자력연구소장을 맡았다. 김법린―박철재―윤세원의 '원자력 라인'이 탄생한 것이었다. 1958년에는 국내 최초로 한양대에 원자력공학과가 설치됐다. 이듬해에는 서울대에도 원자력공학과가 생겼다. 당시 한국에서 원자력은 '최첨단'을 뜻했다.

    관련 법과 기관이 생겼지만 정작 실험용 원자로가 없었다. 이 때문에 원자력원은 미국 회사 제너럴아토믹(GA)으로부터 실험용 원자로를 도입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는 1956년 체결한 한·미 원자력 협정에 따라 원자로 구입비 35만달러를 무상 원조했다. 한국 정부는 1958년 예산에 38만달러를 책정해서 총 73만달러에 원자로와 부속 기자재를 도입했다. 이 실험용 원자로의 이름은 '트리가(TRIGA)'였다. 실험(training)과 연구(research), 동위원소(isotope)의 머리글자에 제너럴아토믹(GA)을 붙인 것이었다.

    1959년 7월 14일 현재 서울 공릉동 한전인재개발원 자리에서 한국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 기공식이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 등 3부 요인과 외교 사절, 과학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 대통령은 기공식에서 직접 삽을 떴다. 원자력 개발 의지를 천명(闡明)한 것이었다. 준공식 기념 우표도 발행됐다. 하지만 이 시험용 원자로에서 '제3의 불'이 처음으로 점화된 건 3년 뒤인 1962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4·19혁명으로 하야하고 하와이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1961년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이듬해 원자력발전대책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이승만 정부의 원자력 발전 정책을 이어받았다. 1978년에는 국내 최초의 원전(原電)인 고리 1호기가 가동에 들어갔다. 2009년에는 아랍에미리트(UAE)와 47조원 규모의 한국형 원전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실험용 원자로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뜬 지 정확히 반 세기 만에 원전 수출국이 된 것이다.
    -----------------------------------
    한국 표준형 원전 개발 주도… 정근모 前과학기술처 장관
    "우리 미래는 '제3의 불' 원자력에… 이승만 대통령 예견 들어맞아"

  • ▲ 정근모 전 장관/이태경 기자
    ▲ 정근모 전 장관/이태경 기자
    정근모(76·사진) 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1959년 스무 살에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행정대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전공을 바꾼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과학 기술을 천대하는 풍토에 항의하기 위해서"라고
    호기롭게 답했다.
    정 전 장관은 본지 인터뷰에서 "당시 이공계 대학원은
    실험 기자재나 교과서도 변변치 않아 일본 책으로 공부해야 했고, 졸업해도 물리 선생님 외에는 달리 진로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한국 최초의 원자력 담당 정부 기관인 원자력원(院)에 인턴으로 배치됐다. 김법린 초대 원자력원장의 보좌관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1959년 7월 한국 최초의 실험용 원자로 기공식은 정 전 장관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이 기공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삽을 뜨면서 원자력 개발 의지를 밝혔다.
    정 전 장관도 과학기술자의 길을 걷기로 그때 결심했다.

    그는 "당시 이 대통령은 '제3의 불'로 불리던 원자력 개발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예견했다"면서 "이 대통령이 그런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은 원전 수출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듬해 그는 미국 미시간주립대로 물리학과 박사과정을 공부하러 유학을 떠났다.
    2년 반 만에 졸업한 뒤에는 남플로리다주립대 물리학과 조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미국 언론은 24세의 그를 '소년 교수(boy professor)'라고 불렀다.

    정 전 장관은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하자 충격에 빠진 미국은 과학 기술 분야에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다"며 "덕분에 박사 학위를 받으면 곧바로 미국
    강단에 설 수 있었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 프린스턴대 핵융합연구소와 MIT 핵공학과 연구교수 등을 거쳐 1971년 KAIST 교수 겸 초대 부원장으로 귀국했다.

    그는 1982~86년 한국전력기술 사장을 재임하며 한국 표준형 원전 개발을 주도했다.
    1990년과 94년 두 차례 과기처 장관을 지낸 그는 현재 한전 고문과 한국해비타트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정 전 장관은 "전 세계의 경제 원조로 연명할 만큼 가난했던 시절에도 정책 당국자들은 '과학 입국(立國)'을 표방했다"면서 "현재 젊은 이공계생들도 새로운 아이디어와 개척자 정신이
    부(富)와 일자리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성현 기자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조선일보=뉴데일리 특약]